7월 7일(1)

by 홍진희

용악산 절벽에서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세 번째 밤을 보내게 될지 여부는 전적으로 해인에게 달려있었다. 과연 해인이 지승의 말을 믿고 경찰서로 향했을까? 지승과 해인이 강우의 전화로 통화를 한 건 어떤 지식을 가져다 댄다 해도 설명하기 힘든 현상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인이 10일 후 미래의 지승과 통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거다. 당장 생존의 문제가 달려 절박한 지승이야 이 황당한 추론에 모든 걸 걸고 매달릴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허위 제보에 시달렸던 해인은 또 한 번의 악의적인 장난에 시달린 것뿐이라 치부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승이 인평경찰서를 찾았던 날 정문 앞에서 벌어진 교통사고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자세히 설명을 하긴 했지만 그것도 해인이 경찰서로 지승을 만나러 왔을 때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두 번의 통화를 했던 상황을 돌이켜 봤을 때 강우의 핸드폰의 전원이 들어오는 시간과 해인과 통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이틀 연속 정확히 11시 49분에 전원이 들어왔었고 정확히 자정이 되면 전원은 다시 꺼졌다. 그리고 통화를 할 수 있는 상대는 오직 해인뿐인 것도 분명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11분. 다시 통화를 할 수 있다면 이 귀하고도 짧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해인과 오늘도 통화를 하게 된다면 해인이 과거의 지승을 설득하는 걸 실패했다는 뜻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앞으로 지승이 겪을 미래 중 그건 가장 암담한 미래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틀은 길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최소한의 의식주가 갖춰진 사람에게는. 하지만 지금 지승에게는 그 세 가지 중 단 하나도 제대로 갖춰진 게 없었다. 산속의 밤은 서늘했지만 다행히 여름이라 '의'와 '주'가 없는 것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허기가 지는 건 큰 고통이었다. 그나마 절벽 바위틈으로 흘러나오는 물로 갈증까지 겪지는 않아도 된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소량의 물로 허기까지 달랠 수는 없었다. 밤이 되어 강우의 핸드폰 전원이 다시 들어온다면 어떻게든 해인을 설득해 보려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 상태로 과연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틀을 굶으니 절벽 틈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라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 깊고 검은 절벽 아래로 사라진 배낭이 못내 아쉬웠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머릿속에는 배낭 속에 있던 비상식량들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렇게 집착적인 생각은 어느새 또 다른 배낭으로까지 이어졌다. 스스로를 바위에 묶는 걸 선택한 강우가 메고 있는 배낭.

처음 해인에게 강우의 옷에 대해 설명할 때도, 강우가 로프로 스스로를 묶은 걸 확인했을 때에도 지승은 시신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가능한 시신을 처음 본 상태 그대로 경찰에 넘겨 강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절박해지자 생존만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써보고 싶어졌다. 시신의 모습을 지승이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기억해 두었다가 증언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뼈가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시신이 왼팔에 감고 있던 로프의 매듭을 풀었다. 세심한 움직임에 추락할 때 부딪힌 어깨가 욱신거려 왔다. 처음에는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충격을 받은 몸이 서서히 고통을 호소해 오기 시작했다. 온몸에 타박상은 기본이었고 오른쪽 발목도 많이 부어있었다. 큰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쑤셔오는 걸로 보아 갈비뼈는 골절 혹은 금이 간 것 같은데 그래도 발은 골절이 아닌 것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시신이 백골화되며 로프가 느슨해진 덕분에 매듭을 풀고 난 후 로프를 벗겨내는 일은 수월했다. 남은 건 바위와 시신 틈에 낀 배낭을 꺼내는 일. 오랜 시간 햇볕과 비, 바람을 맞은 옷은 삭아있어 조금만 힘을 가해도 찢어지고 바스러졌지만, 시신에 가려져 햇빛의 영향을 덜 받아서인지 아니면 재질의 탓인지는 배낭은 비교적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었고 상태도 양호했다.

등산용 로프와 배터리가 나간 랜턴, 아이젠, 휴대용 나이프, 몇 모금 마시지 않은 생수와 사탕 몇 개, 그리고 에너지바 세 개가 배낭에서 건진 수확물이었다. 지승은 가장 먼저 15년 동안 갇혀있던 생수병의 물을 비우고 절벽 틈의 물이 흘러나오는 곳에 빈 생수병을 기대어 놓았다. 사실 강우의 배낭을 뒤지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기대했던 물건이 생수병이었다. 수분을 보충할 수는 있다지만 바위틈으로 흐르는 소량의 물로 갈증을 완벽하게 해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물을 담을 수 있는 병이 있다는 게 수확이라면 나름의 수확이었다.

갈증의 문제가 해결되자 그다음 문제는 배고픔이었다. 배낭 안에서 먹을만한 걸 발견할 거라고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에너지바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통기한은 찾아보나 마나 한참 지났겠지만 놀라운 포장 기술로 에너지바의 겉모습은 방금 전 편의점에 들러 사 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새거나 다름없었다. 지승은 이틀이 넘게 굶은 상태였다. 아무리 오래된 음식이라 해도 허기진 사람이라면 유혹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결국 매끈한 비닐 포장에 싸인 에너지바를 꺼내 한 입 깨물었다. 하지만 입에 넣자마자 미처 씹기도 전에 뱉어버리고 말았다. 겉보기에는 곰팡이 핀 부위도 없고 멀쩡해 보였지만 깨무는 순간 지방과 견과류가 산패되면 만들어 낸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먹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예상했으면서도 실망이 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함께 들어있던 사탕은 먹을만했다. 긴 공복 후 맛본 당분은 적은 양으로도 제법 기운을 차리게 해 주었다. 그렇다고 이 사탕 몇 알로 오랜 시간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괜히 울화가 치민 지승은 바닥에 흩어져있던 에너지바를 들어 절벽 아래로 던져버렸다. 몇 초 후 바닥에 비닐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벽 아래는 깊지만 그렇다고 지승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끝이 없는 블랙홀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지승의 시선이 문득 배낭에서 반쯤 흘러나와 있는 로프로 옮겨갔다. 배낭에 보관되어 있던 로프는 여전히 굵고 단단했다. 양손에 힘을 주어 로프를 당기던 지승이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절벽 사이사이 나뭇가지들이 뻗어 나오기는 했지만 묵직한 로프를 던져 매달기는 역부족이었다. 설령 로프를 건다 해도 나무가 지승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도 미심쩍었다. 그렇다면 굳이 중력을 거스르며 로프를 위로 던지는 수고를 포기하고 아래로 늘어뜨리는 건 어떨까? 그러고 보니 지금껏 강우의 시신이 묶여있던 바위가 지승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로프를 타고 저 어두운 절벽 아래로 섣불리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절벽의 끝이 지승이 생각했던 것보다 깊어 로프가 닿지 않는다면 애써 힘을 쓴 보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인이 과거의 자신을 설득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강우의 핸드폰 전원이 들어왔던 기적도 오늘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승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빛이 없는 절벽 아래는 여전히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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