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틈에서 흐른 물이 어느새 생수병의 절반까지 차올랐다. 절반을 채우는 데는 한나절이 걸렸지만 비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단번에 바닥까지 비운 지승은 왼손에 쥐고 있는 로프를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으로는 쉽게 떠올렸지만 막상 줄을 묶고 아래로 내려가려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이 갈등은 과거의 지승을 해인이 용악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주기만 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 되는 거였다. 해결 방법은 확실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승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난밤 해인이 민하가 지승을 찾아왔었던 이야기를 했을 때, 지승은 겪은 적이 없는 일인데도 민하가 집으로 찾아왔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건 해인이 바꾼 과거가 현재의 지승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그 이후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해인과 관련된 새로운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해인과 관련된 기억이 아니더라도 지승이 겪었던 과거에서 바뀐 기억은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이 지승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기억이 바뀌지 않았다는 건 과거에서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뜻하니까.
매분 매초 희망과 좌절이 오고 가는 가운데 지승은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해인에게도 더는 희망을 걸 수 없다면 결국 로프를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터였다. 다시 빈 생수병을 절벽에 기대어놓으며 지승은 또다시 무기력하게 해인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렸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지만 변한 건 없었다. 지승은 여전히 절벽의 돌출된 바위 위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오늘 밤도 어김없이 11시 49분이 되자 핸드폰의 전원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변하지 않은 현실에 실망했지만 그래도 지승은 해인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오늘도 해인이 전화를 받아준다면 무슨 수를 쓰든 간에 설득을 해야 했다.
"왜 아직 거기 있는 거예요?"
다행히 해인이 전화를 받았다.
"이지승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내가 분명 경고했잖아요. 용악산에 가지 말라고."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던 기억이 놀랍게도 해인이 언급을 하자마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평경찰서를 찾아 야수사건의 수사 자료를 받았던 날의 기억이. 자료를 받아 경찰서를 떠나다 교통사고를 목격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응급조치를 하다 사고현장이 정리되는 걸 보고 인평시를 떠난 게 그날의 원래 기억이었다. 이젠 그 기억에 또 다른 기억이 추가되었다. 해인을 만났던 기억이.
기억 속 해인은 지승이 명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지승에게 용악산에 가지 말라는 경고를 해주었다.
"이지승 씨가 분명 말했잖아요. 용악산에 갈 생각은 애초에 전혀 없었다고."
사실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승은 용악산에 오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뜬금없이 용악산에 가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해인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해인의 알 수 없는 말들이 전날 지승이 용악산에서 조난을 당했다는 거짓 신고를 한 것과 의미가 이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지승은 해인이 야수에 대한 분풀이를 자신에게 대신하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맞아요. 해인 씨는 분명 경고를 해줬어요. 제가 누군지 알았으면서도, 절 구하려고 노력했어요. 고마워요."
순간 해인이 말이 없어졌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지만 그렇다고 야수의 아들에게 감사인사까지 듣고 싶지는 않은 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인평경찰서에서 만났을 때도 해인이 비슷한 말을 하긴 했었다. 용악산에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해인에게 지승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물었었다.
'그냥 전 우리 아빠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뿐이에요. 아빠가 나 대신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지승 씨가 누구든 간에 분명 구하려고 노력했을 테니까요.'
그게 해인의 대답이었다. 당시에는 지승을 괴롭히기 위한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산에 있는 거예요? 갈 생각도 없었다면서 그런 경고를 듣고도 왜 거길 올라갔냐고요."
답답한 듯 해인이 재촉해 왔다.
"제가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한두 마디 경고로 쉽게 될 일이 아니었는데. 당시 해인 씨 충고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사실 바뀐 기억 속에서 용악산에 오르기 전 지승은 해인의 경고를 떠올리기는 했었다. 지승이 용악산에 오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던 해인의 모습이 떠올라 찜찜하기는 했지만, 우연의 일치라 여기며 애써 무시했었다. 지승이 애타게 부탁했고, 그걸 외면하지 않았던 해인의 시도는 고작 그 정도의 변화를 줫을 뿐 바뀐 게 없었던 거다.
전화기 너머 해인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죽게 생긴 와중에도 그 한숨에 지승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용악산에 가려고 결심한 계기는 뭐였는데요?"
이 저주받은 산에 오르게 된 계기? 하나로 딱 집어서 말하기 힘들었다.
지승이 야수사건의 수사 자료를 받아온 건 해인의 보도한 명우의 자해 소식 때문이었다. 이슈저널을 보며 지승은 이 뉴스가 명우가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닳고 닳은 용병 출신 명우고 정말 죽고자 했다면 실패할 리가 없었다. 그게 설사 감옥이라 해도.
명우가 야수가 된 후, 지난 15년 동안 부자는 서로가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살았다. 단 한 번도 서로를 찾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와 명우가 아들을 찾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무죄라 주장하며.
'청수교도소에 수감된 이억관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 봐.'
명우의 용건은 간단했다. 갑자기 무죄를 주장하는 이유를 물어도, 자해를 한 이유를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이억관이라는 사람을 만나라는 것뿐이었다. 명우는 알았던 거다. 그가 무죄일지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비추면 지승이 움직일 거라는 걸. 야수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짧았던 면회가 끝난 후 집에 오니 민하가 문 앞에서 지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바뀐 기억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후 지승의 행동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다음날 인평경찰서를 찾았고, 명우의 말대로 이억관이라는 사람을 만났고, 그렇게 사건에 대해 파헤치다가 결국 용악산까지 오게 된 거였다.
"그럼 다음날, 그러니까 6월 29일, 청수교도소에서 이억관을 면회했다는 거죠?"
"네. 그날 이억관 씨가……."
"이지승 씨, 곧 전화가 끊길 거예요."
그날 억관에게 들었던 야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는 지승의 말을 해인이 막았다.
"내일 청수교도소로 갈 테니까 같이 들어요. 그 사람이 무슨 얘길 하는지 함께 듣자고요.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막아볼게요. 이지승 씨가 용악산에 가지 않도록."
해인은 다시 지승을 구하려는 시도를 할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이지승 씨, 내일 내가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는 건지 빨리 말해줘요. 시간이 없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