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1)

by 홍진희

주어진 면회 시간은 고작 10분.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들은 억관의 이야기는 지승이 보낸 지난 15년이라는 시간을 허물어뜨리기에 충분했다. 도박, 폭행, 절도 등 다양한 이력으로 전과 6범인 억관의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억관은 17년 전 용악산 인근에서 잠시 인부 생활을 했던 경험을 빼고는 인평시와는 아무 인연이 없었고, 청수교도소에 수감되기 전까지는 명우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그런 사람이 굳이 명우에게 득이 될만한 증언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명우가 협박을 하거나 회유를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러기엔 억관의 이야기가 명우를 구제할 만한 결정적 증거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억관과의 짧은 면회 후 지승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억관씨랑 무슨 얘기 했어요?"

주차장에 들어선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며칠 사이 너무도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유해인 기자님. 이젠 절 미행까지 합니까?"

미행이라는 단어 외에 이곳에 해인이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지승이 억관을 면회한 일까지 알고있는 건지는 미행이란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이지승씨."

해인의 분위기가 왠지 어제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인듯 오늘의 해인은 사뭇 차분하고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제가 어떤 설명을 해도 이지승씨는 이해 못해요.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을 말만 할게요. 전 야수 사건을 다시 취재할 생각이에요."

이해할 수 있을 말만 하겠다더니 해인은 정말 지승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은 걸까. 해인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가 오히려 지승에게 더 의문만 들게 만든다는 걸 해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야수에 대한 취재를 하든 드라마를 찍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방어적인 지승의 말에도 해인은 예상한 듯 덤덤했다. 무슨 마음을 먹은 건지 하루 아침에 해인은 너무도 달라져 지승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억관씨 만나러 여기까지 온 이유, 현명우씨 때문이잖아요. 이억관씨에게 야수 이야기를 들으려고."

"기자님이 취재를 한다고 해서 제가 뭔가를 말해줘야 할 의무는 없잖아요. 다만 취재를 핑계로 저에 대한 거짓 방송을 하거나 사생활을 노출 시킨다면 법적인 대응을 할 거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지난 며칠 동안 의도하지 않은 해인의 괴롭힘으로 지승은 생각보다 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밤이 되어 미래의 지승과 통화가 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승이 용악산에 가는 걸 막으려면 흥미를 갖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일 것 같았다. 그러려면 지승의 경계를 완전히 풀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해인의 취재에 관심을 갖게는 만들어야 했다.

"야수가 아직 용악산에 있어요."

"또 무슨 수작입니까?"

터무니없는 소리 취급을 하고 있었지만 해인은 알 수 있었다. 야수라는 그 말에 지승이 이미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이지승씨, 아버지가 시킨다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온 거 아니잖아요. 본인도 어쩌면 현명우씨가 범인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이억관씨를 만난 거 아니에요?"

"야수가 용악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 데요?"

"제보를 받았어요."

"그 제보가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데요. 그 사람이 야수를 직접 만나기라도 했대요?"

"네."

순간 지승은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야수를 만난 목격자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벌써 뉴스에서 떠들고 남았을 일인데 어디에도 그런 기사나 뉴스는 전혀 없었다.

"신원이 확실히 증명된 제보자예요. 거짓 제보를 할만한 상황도 못 되고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야수 사건을 다시 취재할 이유가 없잖아요."

지승이 의심할 새라 해인은 다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현명우씨를 무죄라 믿는 건 아니에요. 예전부터 공범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많았고, 또 제보자가 급박한 상황에서 착각을 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취재가 과거에 수사를 하면서 놓친 게 없는지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거예요. 이 취재로 제가 원하는 결과가 오든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든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면 밝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억관씨에게 들은 얘기를 저한테도 말해줘요."



억관이 명우를 찾은 건 단순한 이유였다. 17년 전 만났던 야수와 명우가 같은 사람인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

한 군데 정착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일을 하던 억관이 인평시에 머물게 된 건 마을 인근의 도로공사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도시가 개발되고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인구도 늘어나 편의 시설이나 유흥거리가 생겼지만 당시의 인평시는 아파트를 짓는다 도시를 개발하겠다 말만 떠들썩하지, 허허벌판에 구멍가게나 몇 개 있던 작은 도시였다. 그러다보니 휴일만 되면 무료해 환장할 노릇이었고, 자연스럽게 발이 향하는 곳은 용악산이었다.

일제 시대 일본 승려가 사람을 재물로 바치던 산이다, 무당이 죽으면 묻던 산이다, 귀신이 들린 산이다 등 산에 올랐다 못 내려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온갖 전설이 다 붙어있는 찜찜한 산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떠드는 그깟 소리에 귀 기울일 억관이 아니었다. 듣던 대로 험한 산이었지만 오히려 덕분에 등산객이 적어 돈이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간혹 짐승을 사냥하러 온 전문 사냥꾼들을 만나긴 했지만 찾고자 하는 게 서로 달랐기에 딱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억관이 야수와 시비가 붙은 장소는 용악산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동네 구멍가게에서였다. 당시는 세상에 야수가 알려져있지 않았을 때였지만 설사 야수의 존재를 알았다해도, 술에 잔뜩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한 채 구멍가게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널부러져 있는 남자를 야수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거다.

시비의 원인은 아주 사소했다. 일이 끝난 후 간단히 허기를 채울 겸 소주와 컵라면을 사서 가게를 나오던 억관이 테이블 위 엎어져 있는 남자를 지나칠 때였다. 돌연 남자가 일어나 비틀거리더니 억관에게로 몸이 쏠려 버렸다. 그 바람에 억관은 손에 든 봉지를 놓쳤고, 소주 두 병이 전부 깨지고 말았다. 원래 참을성이라고는 지니고 있지 않던 억관은 당연히 술을 버리게 만든 주정뱅이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술에 취한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욕을 하며 화를 내는 억관을 비웃고 있었다. 가소롭다는 듯.

"개새끼가, 진짜 죽고 싶냐?"

그 모습에 더 부아가 나 소리치는 억관을 남자는 조롱했다.

"사람 죽여나 보고 그딴 소릴 지껄이는 거야? 하지도 못 할 새끼들이 꼭 큰소리 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억관이 남자의 멱살을 잡았으나 만취한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을 때 눈에 생기가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봤어?"

억관이 씩씩거릴뿐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낄낄 웃기 시작했다.

"씨발 난 그래도 사람이니까 뭔가 좀 특별할 줄 알았지. 그런데 다 똑같잖아. 멧돼지든, 고라니든, 토끼든, 사람이든. 죽으면 다 똑같아. 다 같은 거였어."

억관은 남자의 말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술 취한 놈이 뭔 말인들 못하겠는가. 게다가 시비가 붙은 상황에서 평소 하지도 않던 허세를 부리는 건 늘 있던 일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쫄지도 않고 헛소리를 늘어놓을 때 가장 잘 통하는 건 역시 폭력이라는 원초적 방법이었다. 그날 억관은 구멍가게 주인과 지나가던 행인들이 말릴 때까지 남자에게 원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깨져버린 소주 2병의 값을 아주 후하게 받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싸움을 구경하던 동네 사람들이 남자를 두고 순한 사람이다, 최근 아내가 사라져서 저런 거다, 평소에 행실이 올바르고 어른을 공경하는 사람이다, 감싸는 소리들을 해대긴 했지만 용건이 끝난 억관에게는 다 쓸데없는 소리였다. 그렇게 지루하던 인평시에서 드물게 기억에 남을만한 하루를 만들고 그날 일은 서서히 잊혀졌다.


-계속-

일요일 연재
이전 12화7월 7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