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의 메타포

태운다는 것의 미학(美學)

by 화니샘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제목 자체가 메타포다.

그 주체는 종수다. 그는 태생적으로 분노(화)를 가슴에 안고 사는 존재다. 그는 아버지의 분노를 이어받았고 어머니는 화를 참지 못해 집을 뛰쳐나갔다. 사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그는 작은 불씨만으로도 쉽게 타오를 수 있는 존재다. 불은 신성하고 물건들을 태워서 모든 것을 추상화시킨다. 또한 태운다는 것은 사라져야 할 것들을 없애 버리는 의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의식을 치를 때 뭔가를 상징적으로 태운다. 과거를 지운다면서 우리는 과거를 담은 사소한 물건들을 태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불은 인간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불은 이중적이다. 잘 사용하면 사라져야 할 것을 태우지만 잘못 사용하면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 종수의 아버지(최승호 MBC 사장 특별출연)는 그것을 잘못 사용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이웃에게 불안감을 주고 결국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어린 종수는 꿈속에서 비닐하우스가 불타는 장면을 바라본다. 여기서 빈 비닐하우스는 쓸모없는 것의 상징이다. (사용하고 나면 없어져야 하는데 철거비용 때문에 그대로 방치한 것들이다. 그래서 태우는 것이 낫다고 한다.) 그런데 종수는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건 종수가 분노를 속으로 감추는 이유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 때문이라고 짐작되는데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아버지의 죄의식을 대신 안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무력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유를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면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그가 화를 참지 못해 분노를 표출하는 건 알바를 구하러 갔을 때뿐이었다. 이름 대신 군대처럼 번호를 부르고, 야근을 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사는 것만을 따지는 채용과정의 부당함에 말없이 박차고 나온 것에서 잠깐 그가 세상에 분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매우 잠시... 소심한 저항이었을 뿐 더 이상 이어지는 행동은 없었다. 그 점에서 종수는 분노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 거세가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아예 분노라는 자체를 잊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버닝>은 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태우는 것으로 끝난다. 오프닝 장면은 종수가 담배를 태우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종수는 포르셰와 분노의 대상을 불태운다. 포르셰는 자본의 상징이고 벤은 고급 동네에 사는 서울의 ‘위대한 게츠비’를 상징한다. 즉 최종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은 불평등한 이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버닝>은 태워야 할 것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남선전 방송이 울려 퍼지는 파주의 모습은 분단 모순이고,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휘날리는 태극기도 사라져야 할 대상인 것이다.


감독은 뿌연 안개 낀 세상에서 그 실체를 보지 못한 채 헤매는, 분노조차 상실한 젊은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태우는 장면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것에 대한 정당한 분노의 필요성을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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