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기획을 해야 한다

오독이 없이는 독해도 없다

by 화니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픽션이다.

내 삶 역시 픽션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내 영화의 주인공으로 사느냐 아니면 남이 연출하는 영화의 엑스트라로 사느냐의 선택이다. 나는 주인공으로 살기로 했다. 그래서 내 영화의 한 컷을 기획하느라 오늘도 바쁘다. 오만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나는 소크라테스적인 삶을 연출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 삶에서 일어난 일들은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 영화는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컬트적이랄까... 뭐 그에 조금 가깝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대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와 니체, 그리고 보들레르를 사랑한다. 최근에는 라캉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방황하는 나의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발견을 프로메테우스적이라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정말 대단한 발견을 했다. 20세기 지식의 일대 혁명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마땅히 거인으로 추앙되어야 하나 아직도 그를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프로이트는 자기 발견의 상속자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발견한 불씨를 누군가가 꺼뜨리지 않고 잘 보존하기를 바랐다. 그는 상속자들에게는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단지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의 이론을 혁신시킬 때까지만 그 이론을 관리해 주기를 원했다. 라캉은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혁신적인 독해를 제시했다. 그는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프로이트 이론을 사용했으며, 그 이론의 진정한 소유자가 자신인 것처럼 굴었다. 그 결과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트적인 것에서 벗어남으로서 진정한 프로이트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적 발견자가 되었다.

라캉 역시 그의 후계자에게 자신의 이론에 대한 관리만을 맡겼다. 그는 사위인 자크 밀레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그가 필경사임을 주지시켰다. 그는 라캉의 이론을 온전히 보전할 임무만 부여받은 셈이었다. 라캉은 이론을 읽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프로이트를 단순히 필경하지 않고 횡단해서 저 멀리까지 나아간 것처럼 누군가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오독이 없이는 독해도 없다”는 해롤드 블룸의 지적처럼 모든 이론은 오독을 통해 새로워진다. 텍스트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대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거나, 텍스트 안에서 지금까지 것보다 더 좋은 대답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텍스트를 읽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단지 남의 이론을 베끼는 필경사인 것이다. 오독에 이르려면 텍스트를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는 오직 비평, 혹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과학의 학습을 통한 직관에서 얻으려 한다면 그 시도는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결코 다른 세계를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새로운 진리는 과학적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우연적으로...)


라캉은 우리에게 라캉적인 것을 제시했는데 ‘보로메어 매듭’이 그것이다.

그는 평면, 선, 입체, 구(球) 라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빠뜨렸다고 생각했는데 매듭의 가장 기본적 형식인 고리였다.

우리가 흔히 세상을 보는 관점은 일종의 구(球)-어떤 공간의 안과 바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구분을 사용한다. 사물들의 안쪽 세계와 바깥의 실재와 나누던지, 아니면 혹은 둘 사이의 조화를 추구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사고체제에 의식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라캉이 제시한 것처럼 그것을 구(球)가 아닌 고리로 본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고리의 중심에 있는 모든 점은 동시에 고리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로 간주할 수 있다. 그 경우 이원론은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안에 있다’라든가 ‘바깥으로 추방한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구 혹은 사물을 담는 능력이 제거되어서 정신을 어디에 담을 수 없다면 사물들을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의 대답은 정신의 기본적 요소들은 매듭 혹은 사슬구조에 따라 조직된다는 것이다. 라캉은 매듭을 풀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묶여저 있는 매듭은 풀지 않고 또 다른 방식으로 묶여져 이어진다는 것이다.

‘보로메어 매듭’은 그들 중 어느 두 개의 고리도 서로 교차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결된 세 개의 고리들이다. 어떤 두 고리 간의 연결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구멍은 그대로 남는다. 따라서 두 개의 고리들은 한 고리의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두 개의 고리도 교차하지 않으며 그 둘은 오직 또 다른 세 번째 고리의 연결에 의해서만 결합되어 있어서 매듭은 어떤 하나의 고리를 끊으면 나머지 고리도 함께 풀려버리는 구조가 된다. 고리의 수를 늘려도 이러한 원칙은 똑같다.


이 개념은 이제까지의 형이상학적 철학이 가지고 있던 공간개념의 전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굳이 이 이야기를 끼워 넣는 이유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우리가 전복적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체계를 가지고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보는 창을 발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방안에 갇힌 신세를 면치 못한다. 거기서 뭘 한다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울 뿐 아니라 힘만 허비할 뿐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도 못할 수도 있다.


이론과 실천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듭지어져 있다. 어느 하나를 제거하면 나머지 하나도 허공으로 즉시 날아가 버린다. 이론은 실천에서 나오고 실천은 새로운 이론에 근거해야 한다. 이런 영원한 과정이 기획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사회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개인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기획을 해야 한다.

보로메어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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