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공부하기로 마음먹다

by 화니샘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마전이란 마을이다. 20여 호가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아주 궁벽한 곳이어서 논농사를 짓는 집은 딱 한 집 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밭농사를 짓거나 외부에 나가 품을 팔아서 살아가는 그런 곳이었다. 마을 뒤에 불국산이라는 산이 있고 앞에는 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그 냇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면 늘 불안해하셨는데 결국 내가 5살 때쯤 대홍수가 나서 방죽이 무너지고 우리 집과 옆집이 다 떠내려갔다. 집만 아니라 집터조차 함께 쓸려가서 집을 다시 지을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웃 을용이네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는데 거기서 막내가 태어나서 4살 때까지 살았다. 을용이는 둘째고 그 형은 갑용이었는데 시내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해서 돈을 꽤 잘 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을용이도 중학교를 졸업한 뒤 형의 뒤를 이어 때밀이로 취직했다. 명절 때 엄마가 갑용이가 일하는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고 오라고 해서 한 번 간 적이 있었는데 다들 벌거벗은 목욕탕 안에서 갑용이만 팬티를 입고 때를 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린 나이에 멋져 보여서 나도 커서 때밀이를 할까 했었는데 철이 들고 나서 내가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바로 접었다.


을용이네 집에서 우리집 막내가 태어났을 때 나는 7살이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기억이 또렷하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었는데 갑자기 집안이 분주해졌다. 이웃집에서 산파가 오고 아버지는 능숙한 솜씨로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날 때도 아마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거기까지만 보고 우리는 집 밖으로 추방당했다. 집 밖을 서성이면서 동생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데 울음소리가 들리고 문설주에 금줄이 걸렸다. 그제야 우리는 동생이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금줄에 고추가 대롱대롱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어난 막내는 이후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점지해 주신 삼신할매의 시샘 때문에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여기서는 넘어가기로 한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 대부분은 이곳에서 쌓았다.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대개의 친구들은 여기 냇가에서 발을 적신 친구들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부족한 것이 없었고, 고단했지만 아쉬움 없이 잘 놀았던 것 같다. 특히 단짝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논농사를 짓던 큰마당 집 아들이었다. 귀하게 얻은 부잣집 장남이라 그 집에 가면 부모님이 친구 왔다며 대우를 잘해 주었다. 평소에 밥도 얻어먹고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크려고 그랬는지 하루는 대판 싸움이 붙었다. 원추리 꽃이 막 피기 시작한 때라 온 산을 누비며 다니던 때였는데 정확한 원인은 뭐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남의 집 감자밭에서 싸운 건 기억이 확실하다. 밭을 망쳐서 둘 다 혼이 나야 하는데 그 집 부모님이 나서는 바람에 나만 오지게 혼난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세상은 뭔가 불공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동네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내를 하나 건너고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했다. 두 번째 고개에서 가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마을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는 늘 함께 다녔다. 한 번은 앞서서 고개를 넘던 아이들이 흰옷을 입은 귀신을 봤다며 되돌아오는 통에 다들 놀래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가 다른 동네 아이들과 합세하여 각자 손아귀만 한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비장한 각오로 고개를 넘었는데 귀신은 오간 데 없고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후 혼자서 다닐 때는 무서워서 감히 이 고개를 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멀리 돌아가는 길로 다녔다. 지금은 큰 도로가 생겨서 고개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 아버지 고향은 원래 이곳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임시로 정착한 곳일 뿐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할아버지는 평생 한량으로 사셨는데 우리 집안의 역사를 새로 쓰신 분이다. 대대로 우리 집안은 벼슬에 나가지 않는 전통이 있어서 조상님들은 글 읽기만 한 탓으로 대부분 한량이셨는데 철도 나기 전부터 한량으로 시작해 죽을 때까지 직업이란 걸 가져 본 적이 없는 분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할아버지가 최고였던 것 같다. 그 많은 세월을 노는 것으로 일관했으니 그 일생 또한 파란만장했을 것 같은데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 그 아까운 인생 스토리는 그냥 묻혀 버렸다.


할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신 덕에 우리 아버지와 삼촌들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릴 적부터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아버지 직장 따라 흘러들어 온 곳이 이곳 마전이다. 어머니는 3대가 망하면 3대가 흥한다면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망했으니 이제 너희 때부터는 흥한다면서 우리를 독려하셨는데 그 덕분인지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안의 대소사 때마다 자기는 종손 며느리로서 할 일은 다했다면서 아주 당당하게 큰소리치신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한다. 어머니의 말씀은 이로서 입증된 셈이다.


어머니는 예지력은 있으신 분이셨다. 나도 조금은 그걸 물려받아서 정세전망을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정세전망을 한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정세전망 대신에 소설이라도 쓸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어머니 말씀대로 우리 형제들은 그 궁벽한 마을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하나는 열심히 해야 했다. 그것이 공부이든 농사이든 말이다. 난 조금 쉬운 걸 택했다.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