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나의 책 읽기 이력

by 화니샘

우리 집안사람, 이가 쪽 사람들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술 먹고 큰소리 지르는 것 외에는 별 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숨은 재주가 있었으니 바로 그림 그리는 재주였다. 우리 엄마의 음식 솜씨로 봐서는 김가 쪽도 별로 손재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해방 즈음 때 장티푸스에 걸려 일찍 죽은 외삼촌이 그림을 잘 그렸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그쪽을 조금 이어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재주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잠깐을 제외하고는 빛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때 그림대회에 나가서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친구와 바꿨는데 그 그림으로 친구가 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뒤로 나는 재주가 있다는 생각은 속으로만 감추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은 거스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림은 못 그려도 그림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니 말이다. 가끔 미술관에 가면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남들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림을 그리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어쨌든 재주를 숨긴 채 대신에 나는 책을 코에 박고 살았다. 앞서 말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눈은 낱말들과 늘 씨름했다. 그렇다고 글자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림이 같이 있는 걸 더 좋아했다. 나는 동네 만화방의 단골손님이었다. 만화방에 가는 것을 정말 세끼 밥 먹는 것처럼 했다. 거기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배웠다. 인생이란 결코 슬프지도 즐겁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좋아하는 장르는 아무래도 내가 허약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멜로보다는 액션에 가까웠다. 주먹으로든 뭐든 때려눕히고 악한 것을 없애는 것에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서 커서 장군이나 무술인이 되기를 원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철이 든 다음에 금세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학교도서관을 경험했다. 정식 사서인지 모르겠지만 사서가 있었고 까까머리 신입생인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제법 오래된 학교라서 장서가 많았는데 친구와 둘이서 경쟁하듯 책을 빌려 보았다. 처음에는 누구의 환심을 사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교양이라는 미명 하에 세계문학전집을 빌렸다. 제일 먼저 빌려 보았던 것이 아마 <테스>였을 것이다. 예전에 형이 보던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폭풍의 언덕>을 비롯하여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노인과 바다> 등 전집의 1/3 가량을 섭렵했을 때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뜻인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도 책을 계속 빌렸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답시고 책장을 넘기는 시늉만 한 셈이었다. 주변에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칭찬한 덕에 그랬던 것 같다.


연기를 계속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심 끝에 과학 공상 소설로 전향했다. 진짜 독서를 시작한 것이다. 과학 공상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소설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힘들다. 그렇게 2학년 때까지 학교도서관의 과학 공상 소설을 전부 통달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에 입문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에서부터 아가 사 크리스트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까지 당시에 나온 추리소설은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그중에서 백미를 꼽으라면 아기 납치극을 다룬 <아이는 프로페셔널>이다. 코믹 스릴러인데 그야말로 유쾌하면서도 스릴이 넘치는 소설이었다. 지금 봐도 재미있을 내용인데 추리소설에 빠진 중학생에게는 더할 나위 없었다.


기억나는 대로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자면 여자가 포함된 4인조 악당이 돈을 주고 아기를 빌려 부잣집 아이와 바꿔치기하는 기발한 유괴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래서, 아기를 빌려 공원에서 바꿔치기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부잣집에서는 아기를 찾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페셔널 아기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야말로 애교 만점인데 부잣집 아기는 못난이에다 하루종일 울어대는 애물단지였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것은 부잣집 부모가 아니라 4인조 악당들이었다. 왜냐하면, 빌린 프로페셔널 아기를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돈 받는 것은 포기하고 아기를 다시 바꿔치기하기로 하지만…. 뜻대로 될 리 없다는 그런 내용이다.


정말이지 거짓말 안 보태고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 있는 책이었다. 웬만해서 일치하기 힘든 우리 형제들도 다 돌려 보고 정말 최고라며 의견일치를 보았다. 별다른 즐길 거리가 없던 시절에 추리소설은 나에게는 최고의 오락이자 위안거리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처럼 열심히 책을 읽은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중3이 되고 나의 책 읽기는 막을 내렸다. 고교 입시라는 관문에서 추리소설과 같은 잡서를 들고 그대로 지나가는 것이 허용될 리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잡다하다고 취급받는 종류의 것은 다 내려놓아야만 했다. 나는 공통의 규칙에 따라 학교에서 정해준 교과서와 참고서라는 단 두 종류의 책만 가지고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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