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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룡 Apr 19. 2021

일인칭 단수 읽고서

무라카미 하루키

<짤막한 서두>
미뤄왔던 책 읽기를 하기로 했다. 그간 사 놓고 못 읽었던 책, 북클럽에서 추천한 책을 읽고 간단히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일인칭 단수는 북클럽에서 고른 첫 번째 책이다. 

나는 하루키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데 (처음 읽은 책이 내 맘에 안들었기 때문일텐데, 그게 뭔지도 이젠 기억이 안난다), 북클럽에 간 이유가 그래도 뭐든 보라는 거 읽어보자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거부없이 잘 받아들고 왔다. 하루키 작품을 읽은지 워낙 오래 되었고, 시간이 흐르다보면 독서 스타일도 달라지기 마련이니, 혹시나 이 책은 마음에 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서.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옹고집이고 내 독서 스타일은 10년이 지나도 그대로인가 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일인칭 단수>라는 이 작품이 단편소설집이라는 것. 나는 소설은 좋아하지만, 그 깊이를 음미할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단편은 그리 즐기지 않는다. 


읽은지 시간이 꽤 지났고 딱히 감동받은 부분이 없어서 줄거리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북클럽 멤버 가운에 하루키의 팬이 있어서 들은 바에 따르면, 하루키가 젊은 시절에는 일인칭으로 작품을 썼으나 나이가 들수록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것이 어색해져서 잘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시 일인칭을 써서 이 단편집을 써낸 데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이 단편집에 나오는 일인칭 인물들이 흡사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낀단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소설 인물에 본인을 투영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글을 써도 그리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 책이 자전적 소설인지  그냥 에세이인지, 완전 픽션인지 따질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단편 하나하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당히 모호하다는 점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첫 번째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두 번째는, 단편집인데도 불구하고 딱히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성적인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제에 관해

말하는 원숭이 이야기에서 작가 스스로도 언급했다시피, 이런 이야기를 갖다주면 출판사조차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데요?"라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작가는 애초에 이번 단편선에 주제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인칭 단수>는 작가가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 상상했던 것들을 소품처럼 풀어놓은 것이지, 독자에게 뭔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없다고 봐도 좋겠다. 사실, 소설에 주제가 있어야 한다고 누가 꼭 정했던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즐거우면 되는 일이다. 이 점에서 이런 유의 작품은 하루키 같은 사람이니까 쓸 수 있는 것이고,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름없는 무명 작가가 이런 글을 썼더라면 어디서도 출간해주지 않았을 테니까. 어찌보면 작가의 이름으로 파는 작품이라 할 수도 있는데,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라고 해서 언제나 특별한 메시지를 주려고 머리 싸매가며 애쓸 의무는 없지 않은가?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이제 독자의 평이나 판매 부수에 상관하지 않고 쓰고 싶은 글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니.

아무튼, 그래서 이 작품에는 주제가 없고, 단순히 작가 자신을 투영했다는 것보다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장면에 관해

북클럽에서도 한 번 제기한 문제이긴 한데, 왜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섹스 장면을 넣어야 했는가? 단카를 짓는다는 이름모를 그 여자와 꼭 섹스를 해야만 단카집을 받고 그 여자의 속과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일까? 원숭이는 꼭 여자를 보고 (정신적이든 마술이든 뭐든 간에) 사랑을 경험해야만 이야기가 성립되는가? 

"이런 장면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주의는 절대 아닌데, 내가 이 질문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 정도가 뭐 그리 야하다고 그래요?", "난 그런 게 좋던데"의 반응이었다. 이런 유의 의문을 제기하면 늘 보는 반응이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이야기를 진행 못하기 일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왜 꼭 그 장면이 들어가야 했는가? 내 눈에는 필요 없어 보이는데 혹시 내가 놓친 개연성이 있었던가? 였다.

극작가 체호프가 정한 유명한 법칙이 있다. 


1막에 총이 등장했다면 3막에는 반드시 쏴야 한다. 

1막에서 주인공이 이름 모를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고, 또 그게 소설 전체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면 끝날 때쯤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밝혀야 한다. 내가 어리석어서 그 의미를 잡아내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인칭 단수> 섹스 장면에 관해 그런 건 없다. 이에 대해 받아들일 만한 의견은, "대중 소설이다보니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론

결론이라기엔 이미 앞에서도 썼지만, 하루키 작품은 역시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단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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