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의 영생>, 류츠신 저
삼체 2부 <암흑의 숲>을 읽고 난 후, 작가가 대체 무슨 내용으로 3부를 썼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2부라면 지성과 감성이 잘 어우러진 행복한 결말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무슨 내용을 더?
내가 순진했다.
행복한 결말이란 지구인 입장일 뿐, 삼체 문명은 여전히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암흑의 숲"인 우주에서 멸망을 앞둔 외계인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2부는 동화 같은 결말일 뿐 현실의 결말이 아니다.
삼체 시리즈는 3부에서 완성된다. 비록 1부만 한 충격과 반전은 없을지라도. 1부는 비교적 현실적인 과학을 이야기했지만, 3부는 상상력을 더해 훨씬 더 미래의 과학을 이야기한다. 1부는 지구와 삼체를 이야기했지만, 3부는 그보다 더 발전한 다른 문명과 다른 차원을 이야기하고, 거시 우주의 빅 크런치와 우주의 재탄생까지 다룬다. 규모에서는 1부 비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비록 1부 <삼체 문제>가 훨씬 유명하고 재미있지만, 3부까지 읽어야 류츠신이 만든 우주를 제대로 구경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부의 주인공은 청신, 2부 감상문에 썼다시피 이름부터 뤄지와는 반대로 감상적인, 인류를 향한 사랑이 가득한 성모 같은 사람이다. 청신은 삼체 위기가 밝혀진 시대에 인류를 적진에 보내 훗날의 무기로 삼기로 한, <계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당시 인류의 기술로 삼체 함대까지 날려 보낼 수 있는 탐사정에는 많아야 500g밖에 실을 수 없었기에, 계단 프로젝트는 사람의 뇌만 보내기로 했다. 불치 선고를 받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 중 누군가의 뇌를 절제해서 보내기로 한 건데, 하필이면 그 대상이 청신이 후보자로 추천한 대학 동기, 청신을 짝사랑한 나머지 죽기 전에 약 280광년 떨어진 항성을 사서 무기명으로 선물해 준, 윈톈밍이었다. 청신은 윈톈밍이 뇌 절제술을 받은 후에야 별을 선물한 사람이 그인 것을 알고 몹시 괴로워했고, 프로젝트의 제안대로 윈톈밍이 삼체 문명에 성공적으로 섞여들 훗날을 대비해 긴 동면에 들어갔다.
뤄지의 협박으로 지구와 삼체가 온건한 관계가 되고, 윈톈밍이 선물해준 항성에 지구와 비슷할 것으로 예측되는 행성이 딸려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 소유권을 가진 청신의 동면도 끝났다. 윈톈밍의 뇌를 실은 탐사정은 항로가 어긋나 종적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청신은 윈톈밍을 기리고자 행성 두 개만 UN과 지구 함대에 팔고 항성은 계속 소유하기로 했다.
삼체의 좌표를 '암흑의 숲'인 우주에 알리면 삼체와 태양계 모두 멸망할 것은 분명하다. 이런 극단적 상황을 미끼로 삼체가 지구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기술을 전수하게 만든 것이 2부에서 뤄지가 한 일이었다. 삼체의 좌표를 우주로 발사할 수 있는 버튼을 손에 쥐고, 삼체가 그 협박이 무서워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을 검잡이라고 한다. 초대 검잡이 뤄지는 벌써 100살이 넘었고, 이제 검잡이를 교체할 때가 왔다. (실상 더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이렇게만 줄여서 이해하자)
위기로부터 260여 년이 지난 지금, 지구는 삼체로부터 유입된 기술로 놀랍게 진보했고, 인류의 문화를 모방해 재창조한 삼체의 문화에 물들었다. 풍요롭고 안온한 세월 동안 인류는 200여 년 전보다 훨씬 여성스러워져, 거칠고 사나운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들을 살려준 뤄지가 한때 어느 항성의 좌표를 알려 파괴를 유도한 일마저 비난할 정도였으니, 세상이 얼마나 살기 편해졌는지 알만하다. 검잡이 후보는 뤄지와 같은 시대의 남자가 대부분이지만, 사람들은 마치 성모 같은 청신에게 열광하고 그녀를 검잡이로 선출했다.
하지만 2대 검잡이 청신이 뤄지로부터 버튼을 넘겨받고 5분 후,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숨어있던 삼체의 물방울(강한 상호작용 탐사정) 6대가 곧장 지구로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틀렸다. 그녀가 무의식의 깊은 곳에 그려놓은 검잡이 임무는 완전히 틀린 그림이었다. 물론 그녀도 최악의 상황을 준비했다. (중략)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고, 알아차릴 수도 없었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사실 그녀가 제2대 검잡이로 당선된 것도 이 실수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
애초에 아이AA가 "적이 내 위협에 굴하지 않으면 버튼을 눌러 두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을 때 "내가 그런 자리에 오를 리가 없잖아. 그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야"라고 대답해놓고는, 사람들이 원하자 "내겐 다른 선택이 없어!" 하면서 쉽사리 올라선 것 또한,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일어났다. 삼체는 인류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인류의 문화를 배우며 융화하는 것 같았지만, 생존 문제를 잊은 것이 아니었다. 뤄지가 검잡이였던 100년 동안, 인류를 여성화하고(아마도 삼체가 적으나마 역할을 했을 것이다) 청신 같은 사람이 검잡이가 되도록 유도했다. 청신이 검잡이가 되면 절대로 버튼을 누르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뤄지의 위협력이 90% 대라면, 청신의 위협력은 겨우 10%대. 검잡이가 되고자 경쟁자인 청신을 죽이려 했던 웨이드의 위협력은 100%였다.
청신은 물방울이 곧 지구에 도착한다는 카운트다운을 받으면서도 인류애에 빠져 끝내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로부터 10분 후, 물방울이 지구에 있는 중력파 발사대(삼체의 좌표를 우주에 전파하는 용도)를 모두 망가뜨렸고, 위협은 끝났다.
이 장면에서 청신을 비난하지 않은 독자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독자야말로 청신에 버금가는 성모일 것이다. 하지만 한발 나아가 보면, 청신이 버튼을 눌렀다 한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삼체는 해결할 수 있을 망정 다른 공격은 피할 수 없다. 가장 큰 책임은 애초에 청신을 검잡이로 만든 사람들에게 있다.
첫 번째 물방울 침공 때 장베이하이가 훔쳐 달아난 자연선택호를 쫓느라 살아난 함대 중에서 서로를 무차별 공격한 끝에 남은 두 함대는 블루스페이스호와 청동시대호다. 그중 청동시대호는 뤄지의 위협이 발동한 후 지구의 귀환 요청에 속아 지구로 돌아갔다가 처벌당했지만, 블루스페이스호는 더욱더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지구의 단 하나뿐인, 움직이는 중력파 발사대 그래비티호가 블루스페이스호를 추적했고, 그 사이 삼체의 재공격이 시작되었다.
삼체는 청신이 검잡이를 이어받는 순간 그래비티호를 폭파하려고 일부러 그래비티호에 물방울을 딸려 보냈지만, 놀랍게도 블루스페이스호가 물방울을 막아내고, 그래비티호 승선원을 설득해 삼체의 좌표를 발사했다. 이제와 발사한들 아무 소용도 없지만, 복수라도 하기 위해서였다. 그 복수가 결국 지구를 무너뜨리게 될 텐데도.
블루스페이스호가 물방울을 막아낼 수 있었던 건 4차원 조각 덕분이었다. 당시 그들이 있는 곳은 지자의 사각지대, 즉 지자의 통신 기반인 양자 얽힘이 끊어져 영원히 통신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우주 곳곳에 자리한 4차원 조각. 4차원 조각이 우주선 일부를 침식하면 마치 공간이 절단된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되는데, 그곳(비틀린 점)을 통해 4차원으로 갈 수 있다. 3차원에 사는 인간은 4차원의 방향을 알 수 없어서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일단 4차원에 들어가면 3차원 물체를 평면처럼 훤히 볼 수 있다. 반면 3차원 물체는 4차원에 있는 물체를 인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블루스페이스호 승선원은 이 점을 깨닫고 4차원 조각에 들어가 3차원 물체인 물방울을 제압할 수 있었다.
3부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마법 반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블루스페이스호가 4차원 조각에서 발견한 4차원 물체, 마법 반지. 둥근 테처럼 생겨서 마법 반지라고 부른 거지, 사실 4차원 우주선이다.
인류의 탐사정이 마법 반지에 다가가서 인사차 소수 수열(이때 1을 넣고 보낸 건 작가의 오류다. 개정판에서는 2로 고쳤는데, 아쉽게도 '개정판'이라고 달고 나온 한글 번역본에 반영되지 않은 모양)을 보내자, 마법 반지는 재깍 그다음 소수 수열을 보내 응답한다. 언어 해석 시스템을 보냈더니, 점을 찍어 카운트다운하다가 금세 아라비아 숫자로 카운트다운을 이어간다. 이 놀라운 해석력에 독자인 나조차 탐사자들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하는 순간,
나는 무덤이다.
라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첫마디가 날아든다. 인류가 처음 접한 4차원 외계 문명이 무덤이라니.
무덤, 즉 마법 반지와의 대화는 은유와 비유의 범벅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무슨 뜻인지 쉽게 알 수 있다.
- 본래는 우주선이었지만 지금은 무덤이다: 우주선이었지만 공격을 받아서 승선원은 죽었고 이곳은 무덤이 되었다.
- 우리는 바다에서 왔다: 바다란 4차원을 말한다. 4차원 조각을 탐사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3차원을 좁고 답답하다고 느꼈다고 한 만큼, 넓은 공간인 4차원을 바다에 비유했을 것이다.
- 이곳은 물웅덩이다. 바다는 말랐다: 물웅덩이는 쪼그라든 4차원을 의미한다. 넓은 4차원 공간이 쪼그라들어 좁은 공간만 남은 건데, 이건 나중에 벌어질 차원 공격이 다른 차원 외계 문명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 바다가 말라 물고기가 물웅덩이에 모여드는 것이다. 물웅덩이도 말라가니 물고기도 사라질 것이다: 4차원 공간이 쪼그라들어 4차원 물체가 모두 여기 모였다. 공간이 전부 쪼그라들면 4차원에 있던 물체는 사라진다.
- 바다를 말려버린 물고기는 여기 없다. 그 물고기는 바다가 마르기 전에 육지로 갔다. 한 암흑의 숲에서 또 다른 암흑의 숲으로: 차원 공격자는 4차원에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은 이미 스스로를 3차원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뒷 내용은 모든 차원은 각기 암흑의 숲이므로 대규모 차원 공격이 일어나 점점 저차원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의미. 1부에서 딩이가 한 말, 우주는 고차원에서 저차원으로 펼쳐지고, 그 마지막은 저차원 원자구조일 것이라던 예측이 거의 맞아떨어진 셈이다.
마법 반지는 인류의 탐사정에 물고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달라고 청한다. 작은 유리공 속에 들어있는 물고기와 해초인데, 이걸 받은 후로 마법 반지는 더 대답하지 않는다. 3부 후반부에 지구 생명을 이어가지 위한 소우주가 나오는데, 물고기 유리공이 마치 그 작은 세상 같아서 그걸 비유한 것인가 싶다.
다른 독자의 의견을 찾아봤는데, 가장 그럴싸한 의견은, 마법 반지가 3차원 생명체인 지구의 물고기를 분석해서 자기 스스로를 3차원으로 바꿔 3차원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했다는 것이다. 마법 반지가 물고기를 받자마자 말이 뚝 끊겼고, 스스로를 물고기에 비유한 만큼 그들이 물고기와 비슷하다고 추측할 수 있으니 논리도 꼭 맞아떨어진다.
4차원 조각이 우주에 많이 있냐는 마지막 질문에 마법 반지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과학자 관이판은 틀림없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고, 추옌은 아마 인류는 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3부 초반에 나온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 겉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사람 뇌를 뽑아내는 마술사는 바로 4차원 조각을 통해 3차원에 있는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이다. 즉 4차원 조각은 가까운 과거인 1400년대에도 존재했다.
블루스페이스가 삼체의 좌표를 발사한 탓에, 41억여 명의 인류를 모조리 호주 대륙에 몰아넣어 끔찍한 약육강식 세계로 만들려던 삼체의 계획은 중단되었다. 삼체 2함대는 방향을 돌렸고, 삼체 행성은 3년 10개월 후에 날아든 작은 광립을 맞아 멸망했다. 뤄지가 저주했던 항성과 똑같이.
인류로부터 기만을 배운 삼체는 생존 문제 앞에서는 그 기술을 적절히 썼지만, 생존 문제가 아닐 때는 처음처럼 솔직했다. 삼체 행성이 폭발한 후 지자는 청신과 뤄지를 불러다 놓고 도움이 될 몇 가지를 알려준다.
첫째, 다른 문명이 보기에 삼체는 지구보다 더 위험했다. 그래서 일찍 파괴되었다. (광속 우주선 항적)
둘째, 암흑의 숲 공격은 임의의 상황에 일어나고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그 항성의 파괴 에너지를 자극하는 방식을 쓴다. (차원 공격)
셋째, 우주를 향해 안전 보장 성명(지구는 너희에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보장)을 발표하면 무사할 수 있다. (저광속 블랙홀)
지구를 떠나기 전, 지자는 마지막으로 청신에게 말한다.
윈톈밍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윈톈밍은 살아났다. 그의 뇌는 삼체 함대에 포획되어, 알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다시 본래 몸을 얻었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어떻게 삼체의 기술을 알게 되었는지, 어쩌다 삼체에서 제법 인정받게 되었는지는 끝끝내 알려지지 않지만.
여기서 윈톈밍(雲天明)의 이름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천명을 말하다(雲天命, 발음이 같음)'라는 뜻이라 생각했는데, 어떤 사람은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날이 새는 것을 보다(撥開雲霧見天明)'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인류에게 살아날 방법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그는 신 같은 존재일 뿐,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인터스텔라에서 '그들'이 누군지 왜 그렇게 됐는지 중요하지 않듯이)
삼체는 윈톈밍이 청신과 통신하게 해 줬을 뿐, 상세한 정보는 흘리지 못하게 했다. (이제 와서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쪼잔하게 지구에 복수를 하고팠나 보다) 하지만 윈톈밍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던지, 오래전부터 동화를 지으면서 그 속에 복잡한 암시를 숨겨두었다. 수백 년이 지나 다시 만난 청신과 윈톈밍은 서로의 감정을 나눌 틈도 없이 암시를 보내고, 그 암시를 외우며 짧은 만남을 보냈다. 윈톈밍은 시리즈 동화 세 편을 들려주었는데, 거기에는 인류가 태양계에서 도주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광속 우주선 기술, 우주 안전 보장 성명을 발표할 수 있는 저광속 블랙홀 이론이 담겨 있었다.
우주의 곡률을 평평하게 변화시켜 곡률이 높은 쪽으로 우주선이 흘러가게 하는 기술이다. 동화 속에는 비누를 녹여 바다를 건너고, 종이를 평평하게 다려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암시했다. 종이배 뒤에 비누를 묶어 물에 띄우면 비누의 계면활성제 덕분에 물의 표면장력이 낮아지고, 물 분자는 자연스레 장력이 높은 앞쪽으로 모이게 되므로 종이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이 방식대로 우주의 곡률을 변경하면 우주선을 광속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말.
진공 내 광속을 태양계 탈출 속도(제3우주 속도) 이하로 낮춰 빛조차 태양계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면 태양계는 우주로부터 고립돼 다른 문명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 블랙홀이라 불렀다고 해서 진짜 블랙홀과 유사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진짜 블랙홀은 중력이 클 뿐 광속은 똑같지만,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든 건 광속만 떨어질 뿐 중력이 높지 않아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인류가 태양계를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문제지만, 어차피 광속을 떨어뜨리는 방법 자체가 연구된 바가 없어서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다.
윈톈밍이 암시했다기보다는 작가 류츠신이 암시한 내용인데, 노주는 곧 청신이고 장범은 훗날 우주에서 그녀와 만나 평생 함께 하는 관이판이다. 관이판(关一帆)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관일범, 즉 장범의 이름 범(帆)과 같다. 관이판은 그래비티호에 탑승한 과학자이고, 마법 반지와 소통했으며, 마법 반지에 물고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청신이 소우주를 떠나면서 물고기가 든 유리공을 남겨두는데, 관이판이 마법 반지에 준 그 자체는 아니겠지만 그것과 연결 지어볼 수는 있겠다.
인류는 곡률 추진 우주선을 포기했다. 곡률 추진 우주선은 눈에 띄는 항적을 남기는데 그것이 문명의 존재를 알리기 때문에 공격자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좌표를 알리기 무섭게 삼체가 당한 것도 곡률 추진 우주선이 삼체 항성 근처에 남긴 항적 탓이었다. 어차피 인류의 관념상 일부만 살아남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니, 전 인류를 실을 우주선이 아닌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을 계획이기도 했다.
저광속 블랙홀도 포기했다. 방법이 없을뿐더러 인류가 우주를 완전히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천명을 말하는 윈톈밍이 알려준 모든 것을 포기한 인류는 실로 오만했다. 그들은 목성형 행성 뒤에 벙커를 만들어 광립이 태양에 충돌할 때 그 충격을 피한 후 폭발한 태양의 헬륨과 수소를 채집해 핵융합을 함으로써 태양과 비슷한 에너지를 얻어 생활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마법 반지와의 통신과 지자의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광립만이 유일한 공격 무기는 아니다.
3차원 우주에서 차원을 조종(?)할 수 있는 어느 문명(태양계를 공격한 자 명칭을 따서 가수의 문명이라고 하자)이 태양계의 좌표를 발견했고, 태양계가 삼체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판단(남을 공격하면서 자기를 안 숨기는 걸 보면 대단한 기술이 있을 거라는 크나큰 오해)해 차원 공격을 한다. 광립으로는 태양계 행성 8개를 모두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차원 공격이 일어나면 그 주변 우주는 저차원으로 떨어진다. 이런 공격이 자주 벌어지면 3차원 우주 전체가 쪼그라들고,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마법 반지가 있었던 4차원 우주처럼. 가수의 문명은 이미 오랜 전쟁을 치르며 우주 곳곳의 차원을 무너뜨린 지 오래고, 자기들도 곧 2차원으로 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즉, 3차원에서는 그들이 마법 반지가 말한 '바다를 마르게 한 물고기, 육지로 올라간 물고기'가 되는 것이다.
태양계에 있던 인류 중에 차원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는 청신과 아이AA 뿐이다. 아이AA 즉 IAA는 식물 성장을 촉진하는 옥신의 약어다. 새 문명에 꽃을 피울 역할을 하는 캐릭터라 그런 듯 하지만, 별 뜻 없이 지은 이름이라고 류츠신이 직접 말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살아난 건 청신의 회사가 남몰래 곡률 추진 엔진 연구에 성공해 우주선을 한 대 만들어둔 덕분이었다. 이게 다 웨이드가 해낸 일인데, 정작 청신은 웨이드의 판단을 믿지 않고 눈앞의 위협만 걱정해서 연구를 중단시키고 웨이드를 사형당하게 했다. 그런데도 살아난 건 청신이다. 청신이 뤄지보다 매력 없는 이유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젊음과 돈, 선량한 마음만으로 온갖 실수와 실패를 딛고 살아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우리네와 같은 평범한 주인공이라는 색다른 맛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주인공 보정이 심한 것 같다.
곡률 추진 우주선은 우주의 곡률을 바꾸기 때문에 우주선이 지나간 곳에서는 다시는 같은 속도를 낼 수 없다. 즉, 그곳의 광속이 떨어진다. 이를 활용해 곡률 추진 우주선을 많이 만들어 태양계 주변에서 운항하면 태양계 전부가 항적에 둘러싸여 광속이 떨어지고, 이로써 저광속 블랙홀을 만들 수 있다. 그 항적이 영원하다면, 한번 간 경로는 다시 못 지나간다는 말이니, 언젠가는 모든 우주가 저광속이 될 것이다. 전 우주의 광속 변화 역시 전 우주의 차원 변화와 마찬가지로 늘 있어왔고, 우리가 아는 광속은 사실상 현시점의 광속일 뿐일 수 있다.
태양계가 점차 2차원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뤄지가 청신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곡률 추진 우주선 연구를 중단시킨 것을 질책할 때, 독자로서 또 한 번 청신이 미웠다. 물론 그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인류가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차원 공격이란 자체를 모르는 오만한 인류는 저광속 블랙홀을 포기하고 벙커 방식을 고수했을 테니까.
광속으로 태양계에서 달아난 청신과 아이AA는 또 다른 인류의 한 무리, 블루스페이스호와 그래비티호와 조우한다. 실상은 윈톈밍이 청신에게 사준 항성계의 행성으로 갔다가 우연히 그곳을 조사하러 온 관이판을 만난 거지만. 삼체 함대 식민지에 있던 윈톈밍도 그들의 도착을 알고서 찾아왔지만, 복원자의 광속 우주선이 남긴 저광속 구간에 갇히는 바람에 만날 수 없었다. 청신이 관이판과 우주선에서 저광속으로 떠도는 며칠 사이, 아이AA와 윈톈밍이 남은 행성에서는 수억 년의 시간이 흘렀다.
삼체 시리즈의 우주는 10차원의 원시 시대로부터 암흑의 숲 싸움으로 점점 저차원으로 떨어지는 상태다. 복원자란, 이 우주를 0차원으로 떨어뜨려 빅 크런치가 일어나면 다시 빅뱅이 일어나 원시 우주로 회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명 또는 조직이다.
그런데 윈톈밍이 청신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 소우주가 문제가 되었다. 소우주는 대우주와 분리된 또 다른 우주, 훗날 대우주가 빅 크런치를 일으킨 후 다시 살만해졌을 때 되돌아갈 수 있는 광속의 문을 가진 독립된 대피 공간이다. 하지만 여러 문명이 대우주에서 소우주를 만들어 하나둘 분리하기 시작하면서 대우주가 가진 질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빅 크런치는 우주의 질량이 우주 팽창 에너지보다 클 때 발생하는데, 질량이 점점 줄어들어 임계치 아래로 떨어지면 우주는 무한히 팽창할 것이다. 복원자는 우주에 존재했던 온갖 문명의 언어를 사용해 모든 소우주에게 가져간 질량을 돌려달라고 촉구한다. 그중에는 지구의 언어도 있었다. 뤄지와 다른 사람들이 명왕성에 남긴 박물관의 언어가 끝내 살아남아 사용된 것이다.
소우주를 선택하면 두 사람은 비록 작지만 평화로운 공간에서 살 수 있다. 어쩌면 아담과 이브처럼 소우주의 인류 시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우주가 빅 크런치를 일으키지 못해 팽창하다가 흩어진다면, 그들의 후손은 평생 이 좁은 소우주에서 살아야 한다.
대우주를 선택하면 두 사람이 가져간 질량은 복원되지만 다른 소우주들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운이 좋으면 그나마 살만한 곳을 찾아내 빅 크런치 또는 우주의 종말까지 견뎌낼 수 있겠지만, 운이 없으면 쉽사리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물론 청신과 관이판은 대우주를 택했다. 윈톈밍의 동화에서 외부와 단절된 "이야기 없는 왕국"에서 벗어났던 두 사람답게 이번에도 넓은 우주의 모험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청신은 작은 물고기가 든 유리공을 소우주에 두고 왔다. 아주 작은 질량이지만, 그 정도 질량으로도 우주의 빅 크런치를 실패하게 할 수도 있다. 관이판에 따르면, 우주의 전체 질량이 빅 크런치 임계치에 딱 맞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빅 크런치는 실패했을 것이다.
그럼 그 결과는 무엇일까? 청신이 쓴 <시간 밖의 과거>는 누가 발췌해서 알려진 것일까?
어쩌면 물고기일지도 모른다. 청신이 소우주에 남겨둔 바로 물고기. 4차원 마법 반지가 원했던 물고기. 인류 또한 물고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듯, 원시의 생명체는 물속에서 시작할 것이다. 소우주에 남은 물고기는 진화하고 진화해서 언젠가 지혜를 가진 생명체가 될 것이고, 오랜 과거의 기록에서, 그 표류병에서 과거의 데이터를 찾아내지 않았을까?
3부의 제목 <사신의 영생>은 다소 반어적이다. 여기서는 '영생'이 아니라 '사신'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노르웨이 모스켄 섬에 홀로 사는 잭슨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죽음이야 말로 유일하게 영원히 불을 밝힌 등대야. (중략) 모든 건 언젠가는 사라지고 사신만이 영생할 수 있어.
영원한 것은 죽음뿐이며, 죽어야만 영원할 수 있다는 말. 이걸 보면, 청신과 관이판은 영원을 위한 죽음을 향해갔다. 그들은 죽었지만, 결국 다른 방식으로—빅 크런치에 성공한 대우주든, 살아남은 소우주든— 또 영원만큼 기나긴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