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4장
선제가 붕어하고 사황자 홍력이 제위에 올랐다. 홍력의 처첩들은 선제의 영전을 지켜야 했고, 오라나랍 청앵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부가 황제의 옛 거처가 되고, 청앵의 부군은 군림천하의 자리에 올랐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영전에 모신 선제 덕분이었다. 청앵은 다른 처첩과 격격들을 돌아보았다. - 아니, 이제는 비빈들이었다. 아직 후궁 첩지를 받지 못했을 뿐.
그때 비명이 터졌다.
“중궁 마마께서 혼절하셨습니다!”
청앵은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혼절해 쓰러진 부찰씨를 부축해 일으켰다. 고희월도 달려와 말했다.
"중궁께서 밤새 꿇어앉아 계시더니 지치셨나봐. 서둘러 황상과 태후께 알려야지.”
그 때 황제와 태후 역시 피로에 지쳐 별궁에서 쉬는 중이었다. 청앵은 희월을 흘끗 돌아보고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수 있도록 말했다.
"중궁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셨다. 속히 편전으로 모시어 쉬시게 하라. 소심, 너는 마마를 모시던 몸이니 네가 가서 우리가 잘 보살펴드릴 터이니 황상과 태후께서 빗길을 건너 오시지 않아도 된다 아뢰어라."
희월은 청앵을 흘겨보았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태감들이 부찰 씨를 부축해 편전으로 들고 고희월도 함께 들어가려는 것을 청앵이 가로막았다.
"누군가는 이곳을 지켜야지. 태후와 태비들께서는 쉬러 가시었고, 중궁 마마는 내가 모시고 들어가겠네. 이 내가 가장 신분 높은 측복진이 아닌가."
고희월은 내키지 않는 눈빛을 하면서도 부드럽게 대꾸했다.
''누이도 나도 같은 측복진인데 어찌 나는 중궁 마마 곁에 있지 못한다는 거야? 더군다나 중궁께서 깨어나신 후 누이를 반긴다는 보장도 없는 것을."
청앵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 언니도 잘 아네.”
"나도 평생 그리 잘 알았으면 좋으련만."
청앵과 희월의 호칭이 다소 혼란스럽다. 좀 더 뒤에서 청앵이 희월을 "누이"라고 불러 희월이 다소 반발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청앵이 자신을 "언니"로 지칭하듯이 옮겨보았다.
고희월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고는, 물러나 다시 꿇어앉아 선제의 관을 향해 통곡을 시작했다.
편전에 든 청앵은 태감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했다.
쓰러진 부찰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나 물을 마시고 일어나 앉으며 시녀를 야단쳤다.
"어허, 측복진께 자리를 권하지 않고!"
청앵은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말했다.
"깨어나셨습니까, 중궁 마마."
"중궁이라니? 그런 칭호는 황후에게나 어울리는 것일세. 황상께서 책봉을 아니 하셨는데 너무 이르지 않는가?"
"황상께서 선제의 영전 앞에 등극하셨으니, 비록 책봉은 아니 하셨으나 황후가 되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복진이라는 말은 온당치 않고 황후라 부르기에는 아직 첩지를 받지 않았으니, 우선 중궁 마마라 부를 수밖에요."
부찰씨가 아무 말 없자 청앵은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중궁 마마, 만수무강하십시오."
부찰 씨는 가만히 탄식했다.
"그 말대로라면 내 자네를 측복진이라 불러 미안하네."
부찰 씨는 영전의 상황을 이야기들은 후 안도의 숨을 쉬며 청앵을 칭찬했다.
"과연 오라나랍 씨의 후손 답게 주도면밀하게 처리하였군."
은근한 지적에 청앵은 등골이 서늘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찰 씨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이제 궁에 들어왔으니 일가친척된 도리로 경인궁의 마마를 뵈어야 하지 않겠나?"
청앵이 대답했다.
"선제께서 붕어하시었으나 태후께서 경인궁 마마로 하여금 나와서 상을 치르라는 의지를 아니 내리셨으니, 첩이 어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인연이 있으면 자연히 만나게 될 터."
그럴 때 황제가 나타나 부찰 씨와 청앵은 예를 올렸다. 황제는 청앵을 보지도 않은 채 손짓으로 일어나라 말한 뒤 부찰 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랑화, 그대가 수고가 많구려."
부찰 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신첩이 무능하여 황상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부찰 랑화는 아직 책봉레를 하지 않아 황후가 아니라하지만 '신첩'이라 자처하는 것을 보면 이미 속은 이미 황후인것 같다.
"그대는 영련과 화경을 낳은 후로 줄곧 허약했는데, 상을 주재하고 후궁을 살피느라 참으로 고되었을 것이오."
부찰 씨는 힘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희월 누이와 청앵 누이가 신첩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황제가 나가자 청앵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황제가 조용히 말했다.
"짐이 보기 흉하지 않느냐?"
청앵은 웃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입술을 깨물고 꾹 참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황상, 옥체 보중하십시오."
"청앵, 몸 조심 하라."
청앵은 멍하니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고개를 돌리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짐은 나가 보아야 하니, 너무 무리 하지 말거라."
"예."
태의가 다녀가고 부찰 씨는 영전의 일을 청앵에게 맡겼다. 곡을 하는 사람들이 지친 것을 보자 청앵은 궁녀에게 나이 많은 여인들을 위해 어선방에서 인삼탕을 가져오게 하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은 편전에서 쉬다가 자시에 곡을 할 때 다시 나오게 하라 일렀다. 희월은 불쾌한 얼굴로 편전 쪽을 힐끔거리는 것을 본 청앵이 다시 전각으로 돌아가 말했다.
"누이, 중궁 마마를 대신하느라 수고가 많았네."
희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누이, 누이 하고 부르는 것이 참 자연스러운걸. 나이로 따지면 내가 일곱 살을 더 먹었어."
청앵도 무슨 말인지 짐작했으나, 잠저에서 그녀는 첫번째 측복진이었고, 신분은 나이와는 무관했기에 모르는 척 미소를 지었다.
"그랬던가?"
희월은 그런 태도가 고까워 고개를 홱 돌렸다.
곧 곡을 할 때가 되었다. 잠저에서의 신분에 따르면 희월은 청앵의 뒤에서 곡을 따라해야 했으나, 뜻밖에도 그녀가 청앵 앞으로 뛰어나가 애처롭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전각에 있던 사람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저에서 격격으로 있던 소록균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희월 복진, 이, 이곳은... 청앵 복진의 자리입니다. 희월 복진보다 높은 자리지요."
본래는 월 복진, 청 복진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정식 명칭인지는 알 수 없다. 헷갈리지 않게 이름을 넣어본다.
희월은 소록균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자리를 지키며 흐느끼기만 했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능욕을 당한 청앵은 슬며시 화가 났지만 말없이 꾹 참았다.
곡이 끝나자 희월은 먼저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잠시 쉰 뒤 내일 다시 곡을 하겠다 일렀다. 사람들이 순서대로 물러나자 청앵도 시녀 예심의 부축을 받으며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평소 소심한 격격 소록균은 시녀의 손도 뿌리치고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 화가 난 청앵은 전각 앞에 대기하던 난교도 타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보다 못한 예심이 외쳤다.
"소주, 소주, 잠시 쉬시지요."
청앵이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리며 바라보니, 소록균이 머리칼도 흐트러진 채 쌕쌕 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청앵은 쓴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삼황자를 출산한 지 석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리 빨리 달리면 몸이 상할텐데. 자네가 쫓아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 잘못이 크네."
록균은 다소 겁을 집어먹은 듯이 대답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몸이야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보다 오늘... 고 언니께서 그토록 예에 어긋난 행동을 하셨으니 어찌 해야 할지요?"
청앵이 대답하려는데 역시 격격인 김옥연이 난교를 타고 살랑살랑 다가왔다.
김옥연은 난교에서 내려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어찌 하긴요? 이만한 사건이라면 황상과 중궁께서도 곧 아시게 될 거예요. 태후전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설마하니 측복진께서 겪으신 수모를 갚지 못하기야 하겠어요?"
청앵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한 집안 사람 사이에 갚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나? 누이는 너무 심각하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여 그렇지요. 평소 온화하고 부드럽던 고 언니가 아닌가요? 그야 잠저에서도 측복진과 대립하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이런 적은 없었지요. 궁에 들어오면 사람 성격이 변하는 것일까요?"
록균이 황급히 가로막았다.
"변하기는 누가 변했다는 말인가? 옥연 누이야 황상의 총애를 받으니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 있다지만, 우리는 아닐세."
옥연은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총애라니요, 그런 말을 들이니 이 누이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여기 계신 측복진이야 말로 총애를 듬뿍 받으시는 분이지요."
그러더니 고의로 놀란 기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어머나! 설마 고 언니는 자금성에 들어왔으니 경인궁 마마와 한 집안인 측복진께서 황상과 태후의 눈 밖에 날 줄 짐작하고 그리 불경한 짓을 한 것일까?"
청앵이 살짝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선제께서 붕어하시어 효를 다해야할 때 총애 타령이라니, 그럴 때가 아니네."
그러는 사이 희월도 지친 몸을 이끌고 거처로 돌아갔다. 궁녀들이 대추를 넣은 연와탕을 가져다주자 희월은 머리에 꽂은 은비녀를 뽑아 심복인 말심에게 건네주고는, 팔목에서 반짝이는 줄무늬 비취에 순금으로 된 연꽃이 달린 팔찌를 바라보며 말했다.
"중궁 마마께서 내리신 이 팔찌는 상 중에 벗지 않아도 되어 참 다행이구나. 아니면 하루 종일 칙칙한 색만 보아야 하니 통 살맛이 나겠니."
말심은 비녀를 화장대에 올리고, 고희월의 머리에서 새하얀 견화와 진주 머리 꽂이를 뽑으며 말했다.
"소주께서는 자색을 타고 나셨으니 검정 비녀 하나만 꽂으셔도 미모가 발군이실 거예요. 하물며 똑같은 팔찌인데도 소주가 차시는 것이 청앵 복진보다 훨씬 잘 어울리신답니다."
희월은 마음에 드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말은 참 잘한다니까. 발군은 무슨? 김옥연을 봐. 황상께서도 그 독특한 아름다움을 총애하시지 않니?"
"독특해보았자 소국의 천한 여자인데 제가 어쩌겠어요? 중궁 마마께서는 몸이 약하시고, 소록균은 겁이 많고, 나머지 격격이나 시첩들은 말할 것도 없으니, 소주와 대적할 사람은 오라나랍 청앵 뿐이지요. 허나 소주께서 톡톡히 맛을 보여주셨으니 그 기세가 얼마나 가겠어요! 소인이 보니 중궁 마마께서도 싫어하시는 것 같았답니다."
희월은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같은 측복진이고 나이도 내가 많았지만 내 잠저에 격격 신분으로 들어갔으니, 나중에 측복진이 되었다하여도 모두들 나를 그 여자보다 못하다 여겼지. 이러저러하면서 몇 번이나 화를 참아야 했는지, 참. 이 팔찌도 본디 한쌍인데 하필이면 그 여자와 내가 하나씩 나눠 가지게 되었으니 짝이 맞지 않아. 한 쌍이 함께 있었으면 훨씬 예뻤을 것을."
"측복진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중요한 것은 후궁의 순서와 황상의 총애랍니다."
희월은 생긋 웃으며 칭찬이 담긴 눈길로 말심을 바라보았지만, 곧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오늘 영전에서 내가 한 행동은 실로 위험천만했어. 네가 들은 소식은 믿을만하겠지?"
말심이 웃으며 말했다.
"마음 푹 놓으세요. 중궁 마마를 모시는 연심이 황상과 중궁께서 나누시는 말을 듣고 직접 전해준 소식이랍니다. 연심이 간이 붓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말을 지어내겠어요!"
희월은 가늘고 아름다운 눈을 살며시 감으며 생긋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휴식을 취하던 부찰 씨는 친 아들인 이황자 영련이 멀리 황자방에서 울고 있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시녀 소심이 위로하자 그제야 안심한 부찰 씨는 생각난 듯이 물었다.
"일황자도 황자방에 있을 터인데..."
소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마께서 적절히 안배하지 않으셨습니까? 일황자께서 황자방에 계신다한들 어찌 우리 이황자께 비하겠습니까?"
부찰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황자의 생모는 나의 친척이지만 복이 없어 황상께서 등극하시기 전에 가엾은 아이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부드럽게 소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황자방에 일러 일황자를 성심껏 보살피게 하거라. 어미 없는 아이를 괴롭히면 아니된다."
소심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마마.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청앵 역시 거처로 돌아가니,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 아약이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하고 금빛 대야를 든 궁녀들을 줄줄이 세운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놀라 물었다.
"뭘 이렇게까지 했느냐? 잠저에서 하던 것처럼 간단히 씻으면 될텐데."
아약은 생긍생글 웃으며 청앵에게 다가오더니, 비밀이라도 말하듯 신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소주께서 잠저에 드신 후 황상께서는 소주를 가장 총애하시어 복진께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잖아요. 고 소주도 측복진이기는 하나 처음에는 격격이었으니 우리 소주만큼 귀하고 영광스러울 수야 없지요."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하세요?"
예심이 묻자 아약은 더욱더 환하게 웃으며 자못 기세를 부렸다.
"일황자는 격격이던 부찰 제영 소생이지만 제영 격격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으니 말할 것도 없고, 복진은 이황자를 낳았으니 자연히 황후가 되시겠지만 총애를 받을지는 모를 일이야. 소 소주께도 삼황자가 있지만, 고 소주나 마찬가지로 한군기 출신이니 별 도리가 없단 말이야."
청앵은 귀밑머리에 꽂았던 새하얀 꽃 장식을 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
아약은 신이 나서 청앵의 안색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그러니까, 소주께서는 필시 황후 다음가는 황귀비로 책봉되실 거예요. 적어도 귀비는 되시겠지요. 소주께서 황자만 생산하신다면 태자 자리는..."
"그만. 그리 떠들 힘이 있으면 가서 차나 가져오너라."
아약이 물러가자 청앵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렇게 나대기를 좋아해서야... 예심, 저 아이가 분수를 어겨 화를 불러들이지나 않는지 잘 지켜보아라."
"알겠습니다."
그 때, 병을 앓느라 영전에 나오지 못했던 해란이 방문했다. 문밖에 서있는 그녀를 보자 청앵이 얼른 말했다.
"이런 야밤에 무슨 일이니? 바람이 찬데 어서 들어오지 않고."
해란은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와 인사를 했다.
"자면서 땀을 냈더니 훨씬 좋아졌는데, 마침 측복진께서 돌아오셨다기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청앵은 빙그레 웃었다.
"나와 함께 지낸지가 얼마인데 아직도 그리 예를 차리는구나."
해란은 조심스레 청앵의 안색을 살폈다.
"듣자니 오늘 밤에 고희월이 또 언니의 화를 돋우었다지요."
"아이들도 참, 병이 난 너까지 가만두지 않는구나. 뭣하러 그런 이야기를 전한담."
해란은 놀라 일어났지만 청앵이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해란은 공손하게 말했다.
"첩은 소주와 같은 방에 살며 보살핌을 받은 덕에 잠저에서도 견뎌낼 수 있었으니, 마땅히 소주와 걱정을 나누어야지요. 잠저에 있는 동안에도 희월 복진은 소주와 대립했지만,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군 적은 없었어요. 아무래도 무슨 변고가 생긴 모양인데 소주께서 참아내시어 다행이예요."
"고희월이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하니 김옥연마저 의아하게 여기더구나. 참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너뿐이란다."
"고희월이 공공연히 소주를 모욕하였으니 용납해서는 안되겠지요. 허나..."
"허나 상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후궁의 자리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그녀를 벌하려면 황상이나 황후께서 하셔야겠지. 내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큰소리를 내어 선제의 상을 망칠 수는 없지 않겠니."
"역시 이미 잘 살피셨군요."
해란은 찬탄하는 눈빛으로 말했지만, 무언가 더 할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녀와 오래 알고 지내온 청앵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렴."
해란은 다소 불안한 듯 손수건을 꼬며 말했다.
"첩도 오늘은 몸이 조금 나아진듯 하여 중궁 마마의 문병을 갔지요. 그랬다가 연심과 소심이 탕약을 가지러 간 사이 엿들었는데, 희월 복진의 부친인 강남 하도 총독 고빈 대인께서 황상의 신임을 크게 얻고 있다 하더군요. 황상께서 필히 고씨 일족의 깃발을 올리시지 않겠어요?"
"깃발을 올린다고?"
청앵은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해란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왜 아니겠어요! 저는 비록 지위가 낮지만 수녀 출신이라 그런 일을 조금은 알아요. 성조 강희 황제의 생모이신 효강황태후 동씨 일족은 청나라 개국 후 첫번째로 깃발이 높아져 무한한 영광을 누렸지요!"
청앵이 우울하게 말했다.
"고희월은 한군기이니 깃발이 올라가면 만군기가 되겠구나. 본래는 나보다 출신이 낮았는데 그리 되면 나를 훨씬 뛰어넘겠지."
해란이 걱정스레 말했다.
"모두들 잠저 시절 소주께서 받으신 은총이 깊어 복이 많다 여기지만, 복으로부터 화가 생길까 걱정이예요. 그러니 부디 만사 조심하세요."
그녀는 살짝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청앵도 다소 안색이 바뀐 채 말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나 무엇보다 좋은 말이야. 고맙구나, 해란."
해란이 떠난 후 청앵은 곱고 영리한 그녀가 총애를 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본디 해란은 자수를 놓는 수방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홍력의 눈에 띄어 은총을 입었고, 청앵이 홍력에게 권해 겨우 격격의 자리에 올랐지만, 지금은 이미 황제의 기억에서 잊혀진 후였다.
청앵은 해란이 남긴 말을 곱씹으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청앵은 부찰 씨에게 문안을 올리러 갔다. 부찰 씨는 황제와 나이가 엇비슷했는데, 단아한 아름다움을 갖춘 덕분에 수수하게 꾸민 방 안에서 유난히도 산뜻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바람에 팔랑이는 고운 백목란처럼 희고 고우면서도 위엄이 있는 모습이었다.
청앵은 부찰 씨의 치장을 도우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찰 씨는 거울을 보며 만족해하더니, 살며시 눈을 감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 참으로 안타깝군."
청앵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황망히 무릎을 꿇었다.
"첩이 우매하여 마마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가르쳐 주시지요."
부찰 씨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어찌 왕부에 시집 와서 측복진이 되었는지, 자네 스스로 잘 알지 않는가."
무릎을 꿇은 청앵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공손히 고개만 숙였다. 부찰 씨는 그 태도를 보며 차츰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와 나는 자매와 마찬가지이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네. 자네의 화복은 오직 한 사람 손에 달렸네. 고 씨가 사사건건 자네와 세를 다투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찌 홍력의 측복진이 되었는지'란 경인궁 황후의 입김 덕이라는 의미, '자네의 화복은 오직 한 사람 손'이란 경인궁 황후의 화복이 곧 청앵의 화복이므로, 지금이 무척 위태로운 지경이기 때문에 고희월이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 같다.
청앵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첩과 희월 복진은 모두 황상을 모시는 사람인데 세를 다투다니요? 첩에게 모자란 점이 있다면 희월 복진이 가르침을 주어 마땅합니다."
부찰 씨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가르쳐? 왕부에 있을 때 그녀가 감히 자네를 가르칠 수나 있었던가? 이제 형편이 바뀌었으니 자네는 어찌 처신해야겠는가?"
그 말을 듣자 청앵은 식은땀이 흘러 어쩔 줄 몰랐다. 부찰 씨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금 평소의 우아하고 현숙한 표정으로 돌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네. 한 마디 일깨워준 것 뿐, 아직 사태가 그 정도까지 나빠지지는 않았네. 어찌되었건 나는 황후이고 황상의 조강지처이니, 자네가 분수를 지킨다면 고 씨가 자네를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야."
청앵은 그저 감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찰 씨의 시선이 그녀의 팔목으로 향했다. 줄무늬 비취에 순금 연꽃을 단 팔찌 외에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것을 보자 그녀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팔찌는 황상께서 황자 시절 안남국에서 조공으로 바친 진품으로 본디 한 쌍이었지. 당시 선제께서는 우리 왕부에 그 팔찌를 하사하셨고, 나는 자네와 고 씨를 평등하다 여겨 하나씩 나눠주었지. 자네 둘 사이에 호승심이 있다하나, 모두 같은 측복진이니 갈등을 일으켜 사사건건 대립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명심하게끔 하기 위해서일세. 아직도 매일같이 그 팔찌를 차고 있으니 자네는 내 그런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군."
당시 사황자였던 홍력은 이 팔찌를 얻고 무척 기뻐했다. 그에게는 신혼의 측복진 둘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적복진인 부찰 씨에게 선물했고, 부찰 씨는 부군의 마음을 헤아려 며칠 후 청앵과 희월에게 팔찌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자네는 사리를 아는 사람일세. 고 씨 또한 매일 그 팔찌를 차고 있으나 그 뜻을 새기지는 않는 모양이야."
부찰 씨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음, 어제 고 씨가 참람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닐세. 하지만 이제부터는 자네가 양보하는 수밖에 없네."
청앵은 어젯밤 해란이 한 말이 떠올라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부찰 씨가 먼저 말했다.
"자네가 오기 전 황제 폐하께서 고 씨 일족의 깃발을 양황기로 올리고 고가 씨 성을 하사하신다는 명을 내리셨네. 정황기와 양황기는 천자의 최측근이니 자네 또한 그 무게를 잘 알겠지?"
청앵은 가슴이 철렁하여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놀람 때문에 혀가 말을 듣지 않아 한 글자도 뱉을 수가 없어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부찰 씨가 말했다.
"왕부에서는 자네의 지위가 고 씨보다 귀했으나, 이제는 자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네. 휴... 그만 물러가게."
청앵은 천천히 부찰 씨의 전각에서 물러나왔다.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삼황자 홍시에게 거절당했을 때의 지금만큼 수치스럽지는 않았다. 힘껏 고개를 흔들어 홍시의 생각을 털어내며 예심의 부축을 받아 나오는데, 고희월과 김옥연이 다정하게 웃음꽃을 피우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청앵을 본 김옥연은 평소처럼 살짝 물러나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지만, 고희월은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청앵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이, 일찍도 왔네."
'누이'라는 말은 아마도 잔뜩 벼르고 한 말이 분명했다. 잠저에서의 신분이 바뀐 것이었다. 청앵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먼저 희월에서 평례를 취하며 생긋 웃어보였다.
"일찍 오는 것보다야 때맞추어 오는 것이 낫지요."
희월은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입궁한지 며칠이 지났는데 머물기는 좀 어때, 누이?"
"언니의 보살핌 덕에 잘 지내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누이가 왕부의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자던 것이 습관이 되어 크고 높은 자금성의 침상이 불편할까 걱정했거든. 한밤중에 덩그러니 혼자 깨어났다가 놀라면 어쩌나 했지."
청앵은 눈썹을 살짝 치켰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을 띠고 말했다.
"고 언니는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황상게서 선제의 영전을 지키느라 양심전에만 머물고 계시니, 언니와 함께 하실수도 없는 것을요."
희월은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똑똑한 누이에게도 상대가 생겼어. 경인궁의 오라나랍 황후도 누이처럼 한가할 테니 함께 한담이라도 나누면 되겠는걸."
청앵의 표정이 약간 굳자 희월은 한걸음 다가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황태후와 오라나랍 황후 사이에 낀 몸으로 총애를 다툴 틈이나 있을까 몰라. 어찌 처신해야 좋을지 잘 생각해보는 것이 좋아."
말을 마친 희월은 김옥연에게 손짓을 하며 친밀한 투로 말했다.
"거기 서서 뭘 하니? 어서 따라오지 않고!"
김옥연은 청앵을 흘끔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희월과 함께 사라졌다.
찬 바람이 싸하게 불어왔다. 이제보니 자금성의 9월은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예심이 청앵을 부축하며 분한 듯이 말했다.
"희월 복진은 소주와 동급인데 인사를 받고서 답례도 안하다니 어쩜..."
청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이런 날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 정도도 참지 못하면 여태 그녀와 함께 지내온 나날이 아깝지 않겠느냐. 하물며 본래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사람이니 양보하고 몇 마디 듣는 것쯤은 당연한 일이야. 지나치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러는 사이 영전에 나아갈 시간이 되었다.
희월은 당연하다는 듯이 청앵의 앞에 앉아 곡을 했다. 부찰 씨는 이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않고 도리어 평소보다 더 예의를 차려 그녀를 대했다.
진시 삼각이 되자 태비들이 차례차례 나타났고, 반 시진도 못되어 태후 뉴호록 씨가 복 상궁의 부축을 받고 나타났다. 연일 곡을 하느라 태후의 안색도 말이 아니었다. 태후는 선제의 희귀비로 줄곧 선제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보양을 잘 하여 춘추 마흔이 넘었음에도 서른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본래는 태후 오아씨라 되어 있으나 전작에 따라 뉴호록 씨로 수정했다. 원문의 오류일까.
태후는 본디 곡이 끝난 뒤 거처인 수강궁으로 돌아가 오찬을 하려 했다. 황실 규범에 따라 새 황제는 선제의 비빈들과 육궁에 거주할 수 없었으므로 선제가 붕어하자 육궁에 남아 있던 선제의 비빈들은 허둥지둥 수강궁으로 짐을 옮겼다. 태후는 수강궁 정전에 잠시 머무는 중이었으나, 오늘은 선제의 상을 치르는 마지막날이었기에 구태여 행차를 하지 않고 좀 더 선제의 곁을 지키기 위해 편전에서 오찬을 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오찬 시간을 틈타 이황자 영련을 보러 가려던 부찰 씨는 태후가 머물자 계확을 취소하고 정성을 다해 모셨다. 랑화가 밥을 푸고 희월이 찬거리를 덜고 청앵이 국을 담는 등 시중드는 사람은 많았지만 소리조차 내지 않아 편전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곁에서 시중을 드는 부찰 씨를 보고 태후가 물었다.
"이황자와 삼공주가 아직 어리건만, 가서 돌보지 않고 어찌 남아서 애가의 시중을 드느냐?"
부찰 씨는 단아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태후께서는 모르셨군요. 신첩은 후궁을 돌보고 조종의 규범을 따르기 위해 이황자를 황자방에 보내 유모에게 맡겼습니다."
태후는 다소 놀란 얼굴로 몹시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어찌 그리 했느냐?"
"황실의 가법에 따르면. 황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성지를 받으면 지위가 높은 비빈에게 아기를 맡겨 기를 수 있으나, 성지가 없으면 모두 황자방의 유모가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모자의 정이 너무 깊어져 황상을 정성으로 모시지 못하여 후사를 이을 기회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이지요. 신첩은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이황자와 일황자를 모두 황자방에 보내었습니다."
태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따스하게 말했다.
"힘든 결정을 했구나. 네 말대로라면 소 씨가 낳은 삼황자도 소 씨가 키워서는 안될 터. 복가, 격격 소 씨에게 즉각 삼황자를 황자방으로 보내고 정성을 다해 어가를 모시라 전하거라."
평소 태후는 탕을 먼저 먹는 것을 좋아했기에, 청앵은 하얀 죽순과 빨간 화퇴가 어우러져 기름이 자르르 흘러 보기만 해도 절로 입맛이 도는 화퇴선순탕을 그릇에 담아 죽순을 띄워 내놓았다. 소록균에게 명을 전하고 돌아온 복 상궁이 웃으며 말했다.
"태후께서 평소 화퇴선순탕을 좋아하시나, 연일 선제의 상을 지키며 애통해하시느라 곡기를 입에 대지 않으셨으니, 맛이 강한 국을 드셨다가 입맛을 버리시지나 않을지요."
청앵은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고 희월은 냉소를 지은 채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찰 씨가 나섰다.
"국은 무방하나, 죽순이 신선하기는 해도 과하면 속을 상하니 태후께는 맞지 않지요."
태후는 손을 내저으며 입맛이 없으니 그만 치우라 일렀다. 고희월이 들으라는 듯이 비아냥대자 청앵은 이를 악물고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더 드시기를 청하였으나 태후는 여전히 손을 내저었다. 보고 있던 부찰 씨가 은숟가락으로 걸쭉하게 끓인 죽을 떠서 태후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선제를 생각하시어 죽 한 그릇 드십시오. 어전에서 새로 수확한 쌀로 지은 죽인데, 쌀알이 옹글고 매끈매끈하여 입에 넣으면 단 맛이 나고 부드러우면서 씹는 맛도 있어 걸쭉하게 끓여 먹으면 입맛이 돌지요. 황상께서도 선제의 서거로 비통해하시고 조정의 일로 분주하시어 입맛이 없으시다 하셨으나, 신첩이 어선방에 분부하여 만들어 올렸더니 몇 숟갈 드셨습니다."
태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죽을 맛보았다.
"이 죽에 담백한 생강 맛이 느껴지는구나 . 덕분에 위가 따뜻해지고 편안해졌느니라."
부찰 씨도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뒤에 서 있는 어선방 태감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찌된 일이냐?"
태감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마마의 분부대로 어전에서 새로 수확한 쌀로 죽을 끓였으나, 황상께서 지난 밤에 드시고 속이 차갑다 하셨사옵니다. 청앵 소주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는 특별히 생강을 넣어 온기를 더하라 하셨고, 황상께서도 맛보신 후 좋아하시어 오늘 태후에 올리는 죽도 그렇게 끓였사옵니다."
태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여전히 꿇어앉은 청앵을 향해 말했다.
"얘야, 네가 신경을 많이 섰구나. 영전에서도 그리 꿇어앉았는데 여기와서도 그러고 있으니 혹 무릎이라도 상하면 황제가 얼마나 마음아파 하겠느냐. 어서 일어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