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인생의 시작

나는 번역가다 #5

by 와룡

번역이라는 한 단어로 말하기에,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그 분야가 다양하다.

우선, 어떤 언어를 옮기느냐에 따라 언어별로 나눌 수 있고, 옮긴 글의 내용이나 쓰임새에 따라 도메인별로 나눌 수 있고, 옮긴 글이 일부에게만 공개되느냐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느냐에 따라 대상 독자 별로 나눌 수도 있겠다.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글을 번역하는 것은 또, 매체의 형태에 따라 출판 번역과 영상 번역으로 나뉜다. 여기까지는 내가 들어 본 분류이고, 그 밖에 내가 전혀 모르는 수없이 많은 분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책으로 출판되는 콘텐츠를 번역하는 출판 번역가다. 출판 번역가도 분류를 나누자면 많을 텐데, 나는 장르 소설을 주로 번역한다.

번역하는 일은 다 같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출판 번역과 영상 번역은 많이 다르다. 아니, 어쩌면 영상 번역 자체가 다른 것과는 많이 다르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영상 번역을 해본 적은 없지만, 건너 건너 듣기로는 번역 방식에 조금 더 제약이 많다고 한다. 게다가 당장 방영일 혹은 상영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피를 말리는 작업이라고도 들었다. 그에 비해 출판 번역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편이다. 우선 그날그날 번역해서 공개하지 않아도 되고, 만에 하나 기간 안에 번역을 완료하지 못하면 출판사에서 큰 문제가 없는 한 약간은 미뤄주기도 한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최근에 와서.


웹 소설 독자가 늘어나고 플랫폼이 생기면서 번역되는 장르 소설도 웹 소설 플랫폼에 론칭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전자책을 즐겨 보는 사람이라, 처음에는 웹 소설이 단순히 전자책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웹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웹 연재라는 독특한 공개 방식이다. 작품을 일주일에 몇 화씩 조금씩 공개하는 방식인데, 완결 작품이 아니고 실시간으로 쓰는 작품들이 많다고 한다. 물론 예전에도 신문이나 월간지 등에서 연재하는 작품이 있긴 했지만, 장르 소설 대부분이 웹 연재 방식으로 나오는 지금과는 그 규모가 사뭇 달랐으리라 생각한다.

웹 소설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이런 방식이 좋은 점은, 독자의 피드백을 반영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반응이 좋지 않으면 조기 완결 짓고 다른 작품을 시작해도 부담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독자로서 좋은 점은 뭘까? 플랫폼마다 다양한 과금 정책이 있으니 조금 싸게 볼 수 있고 피드백을 줄 수 있다는 점일까? 솔직히 나는 한 자리에서 한 작품을 쭉 보는 쪽을 선호해서 이런 방식이 맞지 않지만, 큰 성공을 거둔 웹 소설이 종이책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을 보면 독자들도 웹 연재에 많이 몰리는 것 같다.


각설하고, 아무튼 번역된 장르 소설이 이렇게 웹 연재 방식으로 공개되면서 나 같은 번역가도 마감 인생을 맞이했다. 물론 번역을 다 끝낸 다음 연재하면 이런 일이 없겠으나, 번역 도중에 연재되는 상황도 있다. 다른 번역 작품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한 달 기한으로 정해진 양의 번역문을 넘겼는데 짧다고 할 수 없는 내 인생에서 그렇게 고된 일은 처음이었다. 실시간으로 쓰는 웹 소설 작가들은 하루 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마감할 텐데 어떻게 살아있는 것일까! 인기 많은 연재소설 작가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데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다.

고되다는 말에는 몸의 고됨도 있지만 정신적인 고됨이 훨씬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스트레스에 강한 편이라 자부하지만, 그 작품을 번역하는 동안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더불어 댓글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다. 실시간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번역하는 것인데 뭐가 그리 어렵다고 고작 이것밖에 안 푸냐는 글이 쏟아져서, 빨리빨리 연재하지 못하는 것이 다 내 잘못 같고 내가 빨리 못해서 작가와 출판사에 피해를 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독자 반응을 보는 까닭은 첫째는 좋은 의견을 들으며 힘을 내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독자 반응은 간데없고 빨리 안 올리느냐는 댓글만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보지 않았다. 나만 그랬을까? 출판사 담당자도 댓글을 보려면 심장이 튼튼해야 한다며 한방차를 마셨더랬다.


결국 나도 다소 여유로운 – 시간적인 여유로움이지 물질적인 여유로움은 아니다 – 번역 천국에서 밀려나 영상 번역 못지않게 기한에 시달리는 세상에 들어왔다. 여러분이 만약 장르 소설 분야의 번역가라면, 행여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웹 연재의 무시무시한 길로 들어가야 할 테니 각오를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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