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걸린 벽시계의 초침은 빙판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피겨스케이트 선수처럼 큰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큰 원을 그리며 도는 것 외엔 목적이 없다는 듯 그것만이 초침이 가지고 있는 사명인 것처럼. 초침의 부드러운 무빙을 따라 묘하게 버벅거리듯이 따라 움직이는 분침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나는 화요일과 수요일의 경계에 머물고 있는 지금 열한 시 오십구 분에서 열두 시 사이 그 마지막 일 분을 할 수만 있다면 뒤로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수요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정확히는 수요일이 아니라 일월 십이일이 오지 않기를.
그러나 불가항력의 법칙으로 얄궂게도 수요일은 시작되었다.
일 년에 단 한번 있는 생일. 다들 축하받으며 여느 날과 달리 특별할 것이라 기대하는 생일이지만 안나의 표정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저 한숨을 크게 내뱉었을 뿐. 그리고는 상판과 다리받침사이의 경첩이 헐거워져 이음새가 삐걱거리는 작은 밥상 앞에 주저앉았다. 과일무늬가 그려진 싸구려 플라스틱 쟁반에 초코파이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탑으로 만든 뒤 그 위로 유통기한이 임박한 플레인 요거트 한 통을 부었다. 걸쭉하고 뭉근하게 뭉쳐있던 요거트에선 발효된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올해는 케이크를 사지 않을 생각이었다. 생일을 축하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맨 꼭대기에 덩그러니 올라간 초코파이 안으로 은박지에 쌓인 스크류바모양의 얄팍한 초 하나를 푹 꽂고 합장하듯 두 손을 모은 안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볼품없이 초코파이에 꽂은 이 생일 초는 이년 전 생일에 빵가게 점원이 실수로 한 개 더 넣었던 것이었다. 집 근처에 생긴 <블랑>이라는 가게는 프랑스에서 제빵을 공부하고 돌아왔다는, 다소 밀가루 반죽처럼 희고 그리고 말랑해 보이는 뱃살이 두툼한 제빵사가 차린 개인 빵집이었다. 기본메뉴 같은 소보루빵, 슈크림빵, 소라빵, 식빵 등등 흔한 빵 종류와 더불어 에클레어, 마카롱, 브라우니, 몽블랑 같은 디저트류의 메뉴들도 팔았는데 언제나 가게에 들르면 자부심 가득한 말투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예쁘게 장식한 케이크들도 쇼케이스에 한가득 이어서 안나도 종종 가게 앞을 지날 때면 발걸음을 멈추곤 했었다. 가게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케이크는 먹을 수 있는 식용 꽃으로 장식된 플라워케이크였는데 눈으로 먹는 디저트인 만큼 맛도 디자인도 훌륭해서 SNS나 유명 여성지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
-예쁘다.
결혼 후 오랜만에 안나를 찾아온 그녀의 언니는 한동안 케이크 쇼케이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언니, 케이크 먹고 싶어?
-아냐, 먹고 싶은 건 아닌데......
-그럼?
-갖고 싶어.
안나는 <블랑>에 들어가 플라워케이크를 포장해 나왔다. 임신소식을 전한 언니에게 축하선물, 이라며 연분홍색 리본이 예쁘게 묶인 케이크 박스를 건넸을 때 언니의 표정은 밝고 순수한 아이 같았다. 병원에서 임신 축하드립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표정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언니가 얼마나 아이를 갖기 위해 고생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엄마는 언니의 임신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 긴 고생이 헛되진 않았구나,라고 말하며. 난임판정으로 몇 년간 산부인과를 열심히 다니면서 만삭의 임산부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을 언니는 아직 나오지도 않은 자신의 배를 행복하게 바라보며 쓰다듬었다.
-너무 행복해. 고마워.
언니는 한동안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그 케이크사진을 걸어놨었다. 반면에 그녀의 형부는 프로필 사진에 아무것도 지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안나 주변 기혼자들은 임신 소식을 공개적으로 알린 이후엔 초음파사진이라든지 아기신발이나 옷 같은 아기용품 사진을 프로필에 걸어두어 은연중에 기쁨을 표현하곤 했는데 그녀의 형부나 언니는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무뚝뚝한 형부야 늘 그랬지만 언니조차도 케이크를 선물 받은 그날 이후 아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안나는 스물여덟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엄마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언니에게선 형부와 여행 중이라 생일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연락이 왔었다. 삼 일 전부터 냉전 중이던 당시의 남자친구였던 A는 그녀의 생일날이 되었음에도 연락 한통 없었었다.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지인이나 친구들에게도 생일 축하한다는 간단한 축하연락 하나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 또한 곁에 있던 이들을 챙기지 않았었으니까. 띠링- 울리는 알림음에 혹시나 기다리던 연락인가 싶어 스마트폰을 보니 한 달 전 소프트렌즈를 맞췄던 안경점에서 그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생일날. 가까이에 있는 사람보다 모르는 이에게 받는 축하. 생일이라는 특별함이 평소였으면 그냥 넘겼을 법한 일들까지 의미부여를 하게 만들었다. 외로움과 서러움에 울컥 울음이 터진 안나는 그날 방구석에서 한참을 울었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챙기겠어. 한참을 울어서 붉어진 눈가로 생일 케이크를 사러 빵가게에 들렀는데 친절은커녕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어 보이는 다소 껄렁해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제빵사를 대신해 매대 앞에 서 있었다.
그녀를 가만히 주시하던 아르바이트생은 안나가 주문하려는 케이크를 가리키자 가격표를 보곤 피식 웃었는데 거기서 이미 심기가 불편해진 안나는 뭐가 웃겨요, 라며 되물었다. 네? 라며 아르바이트생이 되받아쳤다. 방금 비웃었잖아요. 그 말에 안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아르바이트생은 안 웃었는데? 라며 작게 말하곤 케이크 박스를 꺼냈다. 짜증이 났지만 여자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호의적인 미소를 내가 착각한 걸 지도 몰라. 내가 고른 케이크가 가장 저렴한 가격대라 무시한 건 아닐 거야.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초는 스물여덟 개를 달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생은 대답 없이 포장하다 케이크 박스 날개 부분에 케이크 모서리를 뭉개버렸고, 흠집난 케이크를 보며 살짝 긁힌 거니 괜찮죠? 라며 그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다시금 박스 안에 케이크를 넣었다. 쇼케이스에 있던 케이크 중 가장 저렴한 가격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대우받는 게 불쾌했던 안나의 평정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또한 스물여덟이라 말했지만 스물아홉 개의 생일 초를 포장해 주는 순간 온종일 응축되어 있던 억눌린 감정이생전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폭발해 버린 것이다.
스물여덟살인 사람에게 스물일곱개의 초를 건네는 실수는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분나쁜 상황까진 아니지만 스물아홉을 일 년 뒤에나 맞이할 이에게 스물아홉개의 초를 미리 건네는 건 무례한 행동이었다는 게 안나의 주장이었다. 표면상으로 보기엔 그 이유만으로 히스테리를 부렸던 안나가 미친 사람처럼 여겨질 만도 했다. 만으로 치면 스물일곱살에 불과한데 어째서 이 년이나 먼저 나이를 먹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가게의 빵을 누가 사 먹겠냐고, 가게 측의 불찰로 흠집난 케이크를 그냥 파는 것도 SNS에 올려 다시는 사람들이 못 오게 만들겠다며 클레임을 걸었던 안나로 인해 아르바이트생은 결국 그녀가 보는 앞에서 제빵사에게 해고를 당했다.
그날 이후 안나가 가게에 방문할 때마다 단골손님이라며 아는 체를 하곤 떠들어대던 제빵사는 그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면 서둘러 점원에게 계산대를 맡기고 제빵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
초에 불을 켜지 않은 채 숨을 불어 촛불을 끄는 시늉을 한 안나는 언니를 떠올렸다. 자신의 생일이기 이전에 죽은 언니를 위한 묵념의 시간이었으니까. 기일(忌日). 안나는 눈을 감고 영원히 서른 살에 멈춰있는 언니의 명복을 빌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녀에겐 生(생)을 위한 축하의 날이 언니에겐 死(사)의 안녕을 빌어주는 날이 되었으니. 언니와 동생의 생일이 같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 생일과 기일이 같은 날이 될 확률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연년생인 언니와 안나는 생일이 똑같았다. 아니, 똑같았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암묵적으로 사형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일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동시에 등골을 타고 찌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생일이 되면 언제나 같이 초를 끄고 소원을 빌면서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이었는데 언니가 없으니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할 미래만이 남아버렸다.
안나가 올해 케이크를 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서른이 자신의 묘비에 적힐 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1991~2020 '보잘것없던 삶 마침내 마침표를 찍다.'
고리타분하고 지독히도 염세적인 느낌이 강한 묘비명. 어떤 삼류 영화의 대사 혹은 낡은 헌책방 한구석에 꽂혀있는 먼지가 가득 뒤덮인 잘 팔리지도 않는 비주류소설의 한 구절에서 감명받은 대사 같은 구닥다리 묘비명. 서른이 되면 안나는 자신의 삶이 바싹 마른 낙엽처럼 져버릴 것 같이 느껴졌다. 그녀의 언니가 그랬고, 이모가 그랬었다. 그래서 사실은 두려웠다. 올해가 그녀의 마지막 생일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녀의 언니와 이모조차도 자신들의 서른이 생의 마지막 나이였음을 생일날엔 알지 못했을 테지. 그런 점에서 불행한 올해의 생일에는 스스로를 축하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들뜨지 않고, 설레지 말 것. 자기 암시를 걸었다.
클레임을 건 이후에도 안나는 가끔 그 빵집에 들르곤 했다. 그러나 그동안 봐왔던 클레임 손님들 중 그녀가 제일 악질적이었던 걸까. 제빵사는 쇼윈도 밖에서 그녀가 걸어오는 것만 봐도 제빵실 안으로 숨으며 그녀를 피하기 바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안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이는 제빵사일지도 몰랐다. 요 한 달간은 거의 매일같이 빵집에 들러 빵을 사 오곤 했는데 이틀 전부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 제빵사가 그녀가 오지 않았음을 가게 문을 닫을 때쯤엔 알아차리게 될 터였다.
하루 동안 있던 일을 복기하던 제빵사는 오늘따라 제빵실에 들어갈 일이 별로 없었음을 깨닫고는 그녀에 대해 떠올릴 것이다. 무려 꼬박 찾아오던 손님이 사흘이나 오지 않았음을 깨달은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에 신고를 하고 투철한 시민의식을 발휘했다고 자랑스럽게 뻐기며 또다시 매스컴의 인터뷰 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경찰들과 함께 불이 꺼진 어둑한 그녀의 집 안에 들어섰을 땐 썩어버린 초코파이 요거트 케이크 그리고 요거트 마냥 썩은 내를 풍기는 말라비틀어진 그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 일은 언제나 모르는 거니까. 그러면 놀란 제빵사는 늘 쓰고 다니는 제빵 모자를 벗고 목례를 한 뒤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요 한 달간 매일같이 빵을 사갔던 단골이었는데... 수요일엔 마들렌이나 에클레어를 사가곤 했죠. 이상하게 몽블랑은 안 먹더라고요. 우리 가게 몽블랑은 특별한 비법으로 만든 수제 크림이 들어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한 번 올 때마다 다섯 개 이상 사가곤 했거든요. 그 여자는 특별했어요. 유별난 여자였죠. 작년에 생일 초 하나 더 넣었다고 클레임을 걸며 미치게 했을 땐 정말....
그러다가 어째서 우리 가게의 몽블랑을 사가지 않는 건지, 라며 작게 소곤거리곤 이따 하나 사 가실래요? 라며 경찰들에게 가게 홍보로 마무리할 거라는 상상이 비디오를 튼 듯 자연스레 흘러갔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제빵사라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었다. 클레임 사건이 벌어지기 전엔 매주 수요일마다 가게에 들러 다른 과자를 사갈 때면 몽블랑 자랑을 늘어놓으며 이 몽블랑을 사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으니까. 그 몽블랑에 엄청난 자부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가게이름도 <블랑>이겠지.
안나는 공상에서 벗어나 혀를 차며 커튼을 열고 창문 저 아래 불이 꺼진 빵집을 바라보았다.
농담처럼 여겼지만 정말로 안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경우 가장 먼저 알아차릴 사람은 제빵사일 수도 있었다. 며칠 전, 마카롱을 사러 갔을 때 제빵사가 먼저 인사하며 그녀에게 곧 생일이시지 않나요, 라며 관심을 표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안나는 포장한 마카롱을 들곤 벌써 제 생일이라고요? 라며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제빵사는 나지막하게 딱 이맘때쯤에 손님이 쳤던 난리 덕분에 우리 가게가 SNS에 화두로 올랐으니까요, 라며 대답했지만 안나가 이미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가게를 나선 뒤였다.
*
벌써 십오 분이 지났다. 그녀는 밥상을 치우곤 몸을 일으켜 텅 빈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티비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쪼그려 앉아 마시는 맥주의 맛은 차갑고 떫었다. 강한 탄산에 목 넘김도 쉽지 않았다. 공허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껍데기만 두른 채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는 느낌.
평소였다면 생일 축하한다고 연락이 왔을 언니에게선 더 이상 연락이 오질 않았다. 습관처럼 어플을 켜고 언니와 대화를 나누었던 대화방을 들어가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았다. (알 수 없음)이라고 나와 있는 상대방의 프로필 사진은 사람의 실루엣이 푸른 배경에 박힌 기본화면이었다.
입술을 비죽이며 맥주를 마시던 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콧볼을 타고 내려온 짭조름한 눈물이 입가에 고여 부르트고 바싹 말라 곧 각질이 떨어질 것 같은 입술을 적셨다. 곁에 남은 이가 아무도 없다는 공허함과 두려움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끈덕지게 깊은 우울로 밀어 넣었다. 애써도 잡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안나는 그 우울에서 빠져나올 의지조차 없었다..
아- 미련이 없는 생인데 지금이라도 콱 죽어버릴까. 불면증으로 처방받았던 수면유도제 한팩을 바라보던 안나는 애써 고개를 내두르며 우울감에서 빠져나오려고 자신의 뺨을 때렸다. 창가 쪽에 외풍이 돌아 발가락이 시려오자 무작정 새벽기차표를 끊어 떠났던 강릉이 생각났다. 겨울바다를 보겠다고 즉흥적으로 떠났던 여행. 허공을 떠돌며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 짐승처럼 울부짖다가 이내 투명하게 부서지며 물보라 아래로 다시 스며들던 파도. 해변가 인근의 노상에서 음식을 팔며 싸구려 스피커를 틀어 흘러 보내던 유행이 지난 노래.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던 바닷물, 모래알. 이따금 발바닥을 찌르던 조개껍질의 파편. 습기로 푹 젖은 축축한 모래에 뒹굴던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어 무언가를 계속 써도 계속 파도에 묻혀 사라지던 순간들... 당시에 함께했던 연인과의 결말은 결국 잠수이별로 마무리되었지만 그녀는 그냥 모든 걸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인연은 이렇게 쉬이 끝나기도 하는구나. 덧없음을 체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