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찾길 바라. 다시 네 엄마가 온다면 물어봐서 연락처를 적어둘게. 네 연락처도 하나 적어두고 가렴.
남자는 가게 명함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녀가 가정부로 일했다던 단서를 토대로 L은 부유한 동네로 이동해 보기로 했다. 유명한 사장이 산다는 동네는 A시에서는 단 한 동네뿐이었다. 버스 두 번을 갈아타고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 대저택에 살고 있기에 이사도 가지 않고 뿌리를 내린 채 몇십 년을 살고 있었다고 들었다. 동네에 들어서기도 전에 경비원들에게 쫓겨나지는 않을까. 엄마가 있는 집을 찾으면 대문 안으로 들어가기는 할 수 있을까. L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설령 초인종 앞에 서서 얼굴도 볼 수 없는 상대편과 대화를 하게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어느새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이정혜를 만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여자의 생을 추적하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하루 종일 긴 여정 끝에 지친 L은 버스 엔진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종착지에서 내려 거기서도 더 안쪽으로 대저택이 빽빽이 들어찬 골목에 들어서자 지나가던 주민들이 L을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하나같이 품격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 자신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다는 걸 깨달은 L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마침 굳건한 대문 하나가 열렸고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온 가정부인 것 같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여기서 일했던 이정혜라는 가정부를 아세요?
가정부는 잔뜩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누구시죠,라고 물었다.
-저는 그 사람 딸인데요 엄마를 찾고 있어요. 여기 저택 중 한 곳에서 가정부를 하고 계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끝은 자연스레 흐려졌다. 다행히 가정부는 오랜 경력자처럼 보였다. 또한 호사가인 것 같았다.
-H그룹 김 회장님 댁 전 가정부가 이정혜라는 여자이긴 했는데... 딸이 이 정도 나이라기엔 그 여자 좀 어렸는데.
가정부가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알려달라고 캐묻듯 L을 흘깃 바라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L은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곤 되물었다.
-그 회장님 댁이 어디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가정부가 바로 기억했다는 건 적어도 일을 관둔 지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에서 오늘,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정부가 알려준 곳은 수많은 저택들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높이 솟은 철 대문 밖에 선글라스를 쓴 두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서있었다. 초인종도 누를 수 없을 정도로 기에 눌린 L이 조심스럽게 대문 쪽으로 다가섰다.
-이곳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돌아가.
-잠깐, 아가씨 친구 분일 수도 있잖아.
-행색이 저런데 어딜 봐서.
-그래도 조심해 자칫 실수하면 모가지야.
두 경호원이 서로 약간의 말다툼을 벌이다 L의 시선을 의식하곤 방문이유를 물었다.
-이곳에서 일하셨던 가정부 한 분을 찾는데요. 이정혜 씨라고 아실까요.
-작년에 관둔 그 가정부? 그렇다면 더더욱 이곳에 올 수 없어 돌아가.
-왜요?
경호원이 말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 입을 꾹 다물고 L을 무시했다.
-왜요?
L이 다시 되묻자 다른 경호원이 계속 얼쩡거리면 회장님 눈에 띄기 전에 던져버린다며 마지막 경고라고 L을 협박했다.
다행히도 저 아래 골목에서 호기심 많던 가정부가 여전히 서있었다. 되돌아온 L이 가정부에게 그 댁에서 이정혜 씨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물었다.
가정부는 그녀를 왜 찾는지, 무슨 사이인지 먼저 말하라며 또 다른 소문을 수집할 수 있는 기회에 신이 난 것 같아 보였다.
-먼저 말씀해 주세요. 아줌마는 먼저 이야기해 줘도 저는 숨어버릴 곳이 없으니 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지만 제가 먼저 이야길 꺼낸 다음 아줌마가 회장님 댁으로 돌아가 버리면 전 아줌마의 이야길 들을 수 없잖아요.
그럴 생각이었던 건지 가정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헛기침을 한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곤 H그룹 저택 쪽을 힐끗 쳐다본 뒤 소곤거렸다.
-그 가정부랑 회장님 댁 둘째 아드님이랑 정분이 났는데 회장님이 노하셔서 아예 쫓아내 버렸잖아. 여기 A도시 자체에 발도 못 붙일 거야 아마. 이거 정재계에서도 잘 모르는 소문이야. 이런 이야기 퍼지면 난리 난다고.
근데… 사실 저 댁 둘째가 난봉꾼으로 유명해서 서로 정분난 게 아니라 여자가 겁탈당한걸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어. 둘째 뒤로 따라다니는 소문이 유난히 많은 집안이거든.
여자는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하며 L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난리 난다는 이야기를 신원확인도 제대로 안된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아마 여러 사람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으리라. 이곳에서 엄마의 이야기는 금기어이자 가십거리에 불과했던 걸까. L은 여자를 도발하듯 자극적인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정혜 씨는 내 엄마예요. 미혼모였어요. 날 낳고 고아원에 버렸죠. 그래서 찾으러 왔어요. 복수해 주려고.
딱히 복수하고자 찾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엄마에 대한 애증이 증폭되는 것 같았다. L의 이야기를 들은 가정부는 어쩐지 그런 사람 일 줄 알았다며 난리를 쳤다.
그런 사람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왜 이정혜 씨는 그런 사람이 된 걸까. 이게 다 미혼모였기 때문인 거라면 L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잘 사는 여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걸까. 그녀가 절도를 했다는 사실도,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나는 왜 엄마를 찾으려는 걸까.’
L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본능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만나고 싶은 걸 거야. 환상 속의 신기루처럼 닿을 듯 말 듯 한 엄마와의 거리는 사실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소문만 무성하게 들리는 이정혜라는 여자. 여전히 그녀를 꼭 찾아야 하는 건가. 이게 맞을까.
-그래서 그 후로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적어도 여기 A시엔 없을 거야. 사람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다. 사정은 딱하지만 차라리 돈을 모은 후 흥신소에 가서 의뢰하렴.
다시 원점이었다. 더 이상 찾아갈 곳 없이 막막해지자 L은 고아원으로 돌아갔다. 하루가 꼬박 지나고 새벽녘 지친 발걸음으로 고아원의 문을 열자 원장은 잘 다녀왔냐며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다시 이곳에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L은 주저앉아 울었다. 원장은 다정스레 L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고생했어 아가야.
-마음이 아팠어요. 내가 태어나버려서 그 여자의 삶이 불행해진 것 같아요. 흔한 사진 한 장 남겨진 게 없어서 모습조차 알 수 없지만 찾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마른 손으로 지쳐있는 L의 어깨를 다독이던 원장의 눈동자가 L의 눈동자와 맞닿았다. 그 눈 속에 L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엄마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이 여자야말로 L에겐 엄마이자 스승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음을. 한결같이 L을 지켜봐 온 유일무이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늘 같은 자리에서 계속.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엄마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지 그게 너로 인한 건 아니란다. 그저 그 사람의 선택이었을 뿐이지.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L은 어린아이처럼 원장의 품에 안겼다. 이 이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따스한 온기가 넉넉한 이 품에서 지친 심신을 기대고 무거워진 눈꺼풀을 감을 뿐이었다.
서서히 동이 터오는 듯 창문 너머로는 흰 빛이 새어 들어왔다. 마침내 새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