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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Aug 23. 2023

정혜씨 이야기(중)

성냥갑에 적힌 전화번호의 마지막 숫자는 0이었다. 여러 번의 통화 끝에 다방이라고 소개하기에 위치가 어딘지 물어 찾아갔는데 달동네 인근이었다.

엄마의 흔적은 고아원에서 달동네, 다방 레드로 이어지는 공간까지 모두 A시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입구 쪽엔 새로 주문한 간판을 달아놓은 건지 있어 보이는 필기체로 RED라고 쓰여 있는 붉은 입간판이 보였는데 실제론 양 건물들의 사이인 골목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 붉은 입간판 때문인지 그곳은 다방을 가장한 퇴폐업소 같은 느낌이었다. 낮인데도 그늘이 진 곳이라 음침해 보여 선뜻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L은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하여 호신용으로 가져온 커터 칼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어쩌면 판자촌의 미친 여자가 이정혜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검은 선팅지로 가려진 유리문을 살며시 열자 문에 달려있던 종이 딸랑거리며 울렸다. L은 여전히 발을 다 들이지 않은 채로 고개만 살짝 비추곤 뭐 좀 물어볼게요,라고 말을 걸었다.

입구 옆 카운터에서 왼쪽 눈에 긴 흉터가 있는 우락부락한 스포츠머리의 남자 하나가 나왔다. 남자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L을 분석하는 듯했다.


-아가야, 여긴 너처럼 어린애들이 오는 곳이 아냐. 커피는 머리 크거든 마셔라. 돌아가.

-이정혜라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아세요?      


쫓겨나기 전에 본론을 말하자는 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L을 굽어보던 남자는 뭔가를 생각하듯 이정혜라고 중얼거리다가 가게 안에 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철아, 이정혜가 누군지 아냐?      


철이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정혜? 뭐 연예인이야? 누구?


L이 아까보다 힘을 주어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엄마 이름인데요. 제가 엄마를 찾고 있는 중이거든요. 오래전에 여기서 일했었다고 들었어요. 혹시 뭐 기억나는 거 없으신가요?     


생긴 것과 다르게 인정이 넘치는 건지 남자는 갑자기 연민 어린 표정으로 L을 바라보며 고아냐고 물었다.

고아라고 말하면 이대로 원양어선에 잡혀가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에 아빠는 있는데요, 라며 거짓말을 했다.

엄마만큼이나 입에 담기 어색한 단어였다. 엄마가 애증인 것과 달리 아빠는 엄마를 미혼모로 만들고 L이 탄생했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그들 모녀에게 무심했고 아득한 존재였으니까.      


-아아, 생각났다. 왜 그 청소부 있었잖아요.      


철이라고 불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청소부?      


남자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투로 되묻자 철이라는 사내가 마담 쉐리가 데려왔던 여자요,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아아 그 예쁘장한 애?      


남자는 이정혜를 기억 한 건지 잠깐 들어오라고 말하며

가게의 불을 켰다. 암막 커튼을 열고 환한 백열등을 켜자 밝은 빛이 돌았다. 쭈뼛거리며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이자 부엌에서 컵을 닦던 철이 중얼거렸다.      


-그 여자, 아직도 자기 딸 못 찾아갔구나.     


흉터가 있는 남자는 자신을 빌이라고 소개하며 한국 이름은 촌스러워서 말해줄 수 없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철이라는 사내가 옆에서 봉식이형이야 라고 말하자 재떨이를 던지려는 시늉을 하긴 했다만 가게 안이 환한 탓인지 더 이상 남자의 흉터가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추억담을 늘어놓듯 어디서부터 말을 꺼낼까, 라며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 크리스마스 날 트리 아래서 원장이 쓰는 말투를 썼다.      


-거의 이십 년도 더 됐네. 대략 십육 년 전쯤 우리 가게에서 일하던 여자였어. 오 년 전까지도 우리 가게에 종종 오곤 했었던 거 같아... 처음 본 건 내가 군 제대를 하고 가게를 처음 열었을 때였지. 여기가 처음엔 그냥 다방이었는데 자리가 안 좋아서 그런지 손님들이 별로 없더라고. 내가 빨간색을 좋아해서 레드라고 지었는데 무슨 퇴폐업소인 줄 알고 안마방이냐고 찾아오는 미친놈도 있었고.      


남자는 말을 마치곤 철이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L은 대접받은 주스를 마실까 말까 고민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퇴폐업소 분위기인데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남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이 가게를 버리지 못한 이유는 대학 갈 돈도 없었고 먹고살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흑자는 낸 상태여야 했거든. 아버지의 유산을 이렇게 날리긴 싫었어. 이 가게가 잘되길 바랐는데 워낙 골목에 있어야 말이지. 그때 마담 쉐리가 아, 마담 쉐리는 내 전 여자 친구로 당시동업자였어. 지금은 양키랑 결혼해서 진짜 쉐리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지. 아무튼. 그 여자가 데리고 온 사람이 이정혜였어. 둘이 어떻게 안 건진 모르지만 달동네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군. 나이도 어린 데다가 미혼모였는데 돈이 없어서 아이를 버리고 왔다며 다시 데려가기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니 제발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더라. 기운이 없어 보였어. 가뜩이나 월급 줄 돈도 없는데 쉐리가 하도 사정해서 한 달만 일하게 해 주겠다고 했지. 근데 꽤 예쁘장해서 그런지 그 여자가 골목길을 청소하고 있으면 남자 손님들이 좀 몰렸어. 그냥 다방이란 걸 알곤 꽤 놀란 눈치였지만 사내놈들이 잘도 커피나 쌍화탕 같은 걸 시키곤 했지. 그래서 그냥 계속 고용하기로 했어. 한 일 년 가까이 일했을거야.


오래된 기억을 헤짚느라 미간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하던 그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곤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라지기 전. 그래, 밤에 가게를 찾아왔었어. 그날은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쉬게 했는데 밤중에 가게 문을 두드리면서 여기서 며칠 자게 해달라고 사정하더라고. 집주인에게 쫓겨났다 길래 불쌍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가져온 짐을 꺼내다 안색이 파래지는 거야. 그러더니 성냥갑이 없다고 중얼거리더라고. 담배를 피는가 싶어서 한 개비 주려는데 성냥이 없으면 여기 있어선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달치 월급도 안 받고 가버렸어. 그다음 날엔가 웬 여자 하나가 눈이 새빨개져서 이정혜 어딨냐며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었지. 알고 보니 집주인 돈을 들고 도망치던 모양이더군. 그 돈으로 아이를 찾았나 싶었는데 지금 네가 이정혜를 찾는 걸 보면 결국 못 만났구나.      


L은 엄마에게 속아 전 재산을 잃은 한 늙은 여자를 떠올렸다. 그 당시 그곳엔 그녀의 등에 업혀 손가락을 빨고 있었을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엄마가 자신을 찾기 위해 가지고 간 돈 때문에 독감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 돈으로 자길 찾으러 오지도 않은 여자…


이게 다 무슨 소용인 걸까. 일순간 L은 회의감이 들었다. 원장이나 판자촌 여자가 말한 것처럼 엄마의 존재에 대해 알면 알수록 상처받고 있었다. 더 이상 끌어내려질 바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어느샌가 바닥을 뚫고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멍한 표정을 짓는 L을 보고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집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후로 내가 쉐리랑 헤어지고 나서 찾아왔었어. 예전에 받지 못했던 월급을 달라고. 그 여자 덕분에 우리 다방이 입소문이 좀 난 후라 가게는 꽤 잘 굴러가고 있어서 당시 못 줬던 월급을 줬지. 아이는 찾았냐는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었어. 지난 오 년 간 뭐 하고 살았던 건진 모르겠지만 조금 여유로워 보이더라고. 딱히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관계는 아니어서 월급을 받고 그냥 가버리는 걸 놔뒀지. 근데 웃긴 건 그 뒤로도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곤 했어. 와서 커피 한 잔 마시고는 골목길 청소도 좀 해주고 그러고는 홱 가버렸지.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사오 년 전인데 뭐 하고 지내냐는 말에 가정부를 하고 있다고 했어. 무슨 유명한 기업 사장 댁이었는데... 어쨌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계속 돈 벌면서 이 근처 고아원을 돌아다니고 있던 거 같아. 이쪽에 고아원이 좀 많은 편이잖아... 나도 고아원 출신이고 뭐, 저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네가 이 근처 고아원에서 자랐다면 네 엄마가 한 번쯤은 왔을 텐데.     


L은 말없이 주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엄마가 날 찾고 있었다고? 단 한 번도 원장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몇몇 아이들이 친부모를 찾아 돌아가는 경우를 보긴 했지만 끝내 L의 엄마는 오지 않았다.

십여 년 전 원래 있던 조그만 고아원에서 큰 곳으로 이사를 왔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엄마가 자신을 찾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간혹 부모를 찾아 돌아간 아이들이 있었다. 거의 고아원에 온 지 이년이 채 안된 아이들이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지 오 년이 넘은 아이들은 부모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입양 가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친부모는 오지 않았었다.

이사를 했던 년도를 따져보니 L이 입양되고 이년이 채 안된 시기였다. 고아원이 이사 간 걸 모르던 엄마가 나를 찾아다녔던 건 아닐까. 그래서 마주칠 수 없던 건 아닐까.


별안간 L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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