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문 자리가 너저분하더라도 그 흔적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때가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지우개 때와 팔레트에 덕지덕지 묻은 물감이 좋았다. 때 묻은 사물이 왜 이리도 좋았을까?
나에게 누군가가 일상을 무너지지 않게 유지하는 루틴을 물어본다면, 눈에 보이는 곳에 그림 도구를 두는 것이라 말하겠다.
그림을 그리고 지도하는 작업실에도 많은 도구가 있지만, 집 안 곳곳에도 스케치 도구들을 자주 시간을 보내는 곳마다 놓아둔다. 물론 늘 그림이 술술 잘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림을 그리지 않고 가만히 생각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커피를 마실 때 그 사물들에 둘러싸인 나는 묘한 안정감에 속해있다는 기분이 든다.
여행을 떠날 때에 그림 도구를 챙겨가는 것도 나의 꾸준한 루틴이다. 손바닥 만한 스케치북, 연필, 수채화 도구등을 노트북만 한 파우치에 넣고 여행지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테이블에 펼쳐놓으면 그날 발견할 것들이 그림이 되길 기다리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온 적도 꽤 많았으니, 여행 중 테이블 위에 놓인 사물들은 나의 완전한 여행을 위한 오브제로 진열된 것이겠다.
연필화를 그린 자리에는 흑연냄새가, 종이가 가득 쌓인 화방에는 특유의 코를 간질거리는 마른 냄새가 있다. 가만 보면 나는 화구들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린 날의 내가 감각했던 미술학원의 냄새가 오래도록 나의 안정제가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 나의 오랜 친구 같은 그 사물들은 가까이 있거나, 손에 쥐면 다정하게 나를 편안한 곳으로 데려다준다.
“30여 년 전 친구 따라 화실에서 유화를 그린 적이 있는데, 그때 그 냄새가 그리워서 왔어요.” 어느 날 화실을 찾아온 분의 첫 문장이었다. 냄새는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화실 냄새가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던 걸까. 그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감각으로 오랜 시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했다.
화실을 운영하며 짧게는 하루 길게는 몇 년을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에게 그렇듯이 다른 이들에게도 함께 고르고 만진 이 그림 재료들이 친밀하고 다정한 사물이기를 바란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함께 한 시간들이 오래도록 좋은 기억의 냄새로 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