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나는 일기장 앞에 펜을 쥔 나를 매일 마주치는 상상을 한다. 분명 익숙한 자리에서, 때로는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일기장을 펼친 뒤 비슷한 자세로 고쳐 앉을 것이고 그날의 궤적들을 영화를 틀어놓듯이 떠올릴 것이다. 그런 다음 펜 촉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장면>을 기다린다. 다가온다는 건 스쳐 지나가는 것들과는 다르게 느린 속도로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좋았거나 낯설었거나 다정했던 그 장면들은 언어가 되어 일기장에 적힌다. 나에게 일기란 그 마음을 적는 것이기에 하루를 돌아보는 쉼이자 매일 일정하게 나에게 집중하는 명상의 시간이다.
어느 날은 그림을 배우려는 분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의 풍경은 사진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어요. 가을 캠핑장에서 모두가 잠든 새벽 아침에 잠이 깬 아이와 슬그머니 나와 강가로 걸어갔죠. 하늘이 마법처럼 여러 빛의 천연색으로 펼쳐져 있었어요. 그 색을 그리고 싶어서 왔어요.” 그날 우린 캔버스를 펼치고 자연과 닮은 색을 만들며 떠올린 장면에 더 가깝도록 재현했다. 그 가을 캠핑장의 장면이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기록되었는지 완성된 그림 앞에 서있는 모습에서 기쁨이 느껴졌다.
작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각을 느꼈을 때 그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장면을 세밀히 묘사하는 것도 그렇고, 추상적일지라도 실제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마음에 닿았던 색과 형태들을 재구성해 하나의 장면을 새로운 이미지로 재현한다. 직접 그린 드로잉들은 내가 경험했던 깊은 감각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 기록을 통해 일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취향을 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드로잉은 무척 좋은 메모법이다.
나는 누군가의 일기장을 보는 행위 자체가 왠지 사적인 영역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 앞에 보이도록 놓여 있더라도 가만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드로잉 일기장은 뭔가 다르다. 궁금하고 펼쳐보고 싶고 그림 속에 오래 머물며 그 사람의 하루를 함께 걸어보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그러니까 그림책은 <공유 일기장>에 가깝다는 말이다. 예술 작품은 나의 영감으로 시작해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이야기되며 공감의 언어가 될 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저 기록하고 싶어서 그린 드로잉 북도 좋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멋진 일이다.
드로잉 북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그림 수업을 시작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도 비슷한 이유였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려 모인 작은 화실에서, 각자의 작은 메모로부터 끄적이며 시작한 그림들을 공유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매일 일기를 쓰듯이 바라보고 생각한 것들은 드로잉으로 담겨 한 권의 책이 된다. 그 드로잉 북을 서로 천천히 읽어보며 타인의 마음과 지난 풍경을 산책하다 온다면, 무척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다. 나의 화실은 6개월을 주기로 드로잉 북 전시를 연다. 드로잉 일기가 한 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펼쳐본다는 건 한 해의 절반을 회고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정말 6개월 동안의 시간을 기록하듯 그리는 사람이 있고, 언젠가 꼭 한번 그려보고 싶었던 주제를 선택해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방향이든 꾸준히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사유의 시간을 스스로 그만큼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림일기가 작품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한다. 그 마음을 알게 된다면 오늘 하루의 삶도 시가 되고 그림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며 한 걸음씩 걸어갈 것이다. 때로는 버거운 하루를 살아가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고 지탱할 수 있는 경험에는 그림 기록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살면서 한 번은 드로잉 일기를 작게나마 시도해 보면 좋겠다. 분명 그림일기를 그리는 사람도, 그 일기장을 살며시 열어보는 사람에게도 기분 좋은 안도감이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