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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la Nov 04. 2016

[트레바리 문하나] 농담 by 밀란 쿤데라

Come on, darling.  It Was a Joke.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실없는 농담에 화가 난 적도, 풀이 죽은 적도, 어쩌면 난처해진 적도. 난 개인적으로 농담만큼 진심을 담은 발언도 없다고 믿기에, 농담은 운좋게 유머를 타고난 아이들이 누리는 특혜 같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교태랄까. 무거움을 피하고 싶은 개인의 비겁한 필살기 같기도하고.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도 농담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기본적으로 농 안에 들어있는 메세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는 편이다. 따지고 들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늘 똑같으니까.

“왜 이래, 농담이잖아.”


지성, 모랄, 의리, 연민 등등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에 세련된 화법과 음악적 재능까지 타고난 주인공 루드비크는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내 주위의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역시도 농담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하는 말 안에 너를 기만하는 따가운 가시들이 유머로 포장되어 너도 나도 모두가 웃어제끼는 이 상황에 대한 묘한 우월감, ‘재밌잖아.’ 라는 일종의 면죄부.


하지만 예민한 사람이든, 진지한 사람이든, 바른 사람이든, 뒤틀린 사람이든, 누군가는 거기서 기만을 발견할 것이다. 이야기의 표면에는 제마네크가 대척점에 서있지만, 야로슬라프, 코스트카, 마르게타, 헬레나, 그리고 루치에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루드비크가 농담 하나로 인생을 날려먹은 가엾은 청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적, 이념적, 사회적, 개인적 모든 패러다임 사이의 끊임없는 줄타기에서 언젠가는 고꾸라지고 말았을 운명. 그 이후에 재기가 오든 패망이 오든, 한 번의 추락은 피할 수 없었을테지.


루드비크 처럼 영리한 사람들의 머리 속 시뮬레이션에서 사랑이 우선순위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 자체에 대한 거부감, 스스로를 보호하고 아껴줘야 한다는 의무감, 세상을 바꾸겠다는 청춘의 패기,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무의식에 깔린 만용. 오해하지 말 것, 비난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이해를 넘어 공감한다.



하지만 10년 후의 그가,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가장 그리워 할 누군가는? 결국 누군가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그때의 자신이리라.


그래서 루드비크에게 루치에는 그가 외면한 메시아였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만이 구원이 아닌 것 처럼, 뜨거운 태양 아래 누군가의 그림자가 안식처가 될 수도 있는 것 처럼. 그에게 필요한 건 젊고, 예쁘고 세련된 여성과의 섹스가 아닌 수줍게 전할 수 있는 순수하고 고귀한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사람이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진실된 애정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인정. 행복이란 것을 외면해야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허세에 대한 가장 고요하고 곧은 도전.


10년, 20년은 커녕, 고작 몇밤만 자고 일어나도 세상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그 안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상, 이념, 지식, 복수에 대한 갈망, 누군가에 대한 죄책감, 심지어 온 마음을 바친 애정까지도. 하지만 이 보편적인 가변성에 대한 두려움은 유난히 ‘사랑’에 집중되어 있는데, <농담>을 읽으면서 나는 그 가변성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믿음과 두려움이야말로 농담거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하지 않을 어떤 것에 대한 갈망,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고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 끊임없는 반복에 있어, 지식, 신념, 사상, 철학, 커리어, 그 외의 모든 것들 중 그 가변성을 전면으로 피해갈 수 있는 범주가 있던가. '언젠가 내가 혹은 너가 변할거야.' 라는 예정된 사실 같은 가정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은 늘 상대방에 대한 의심과 믿어버리고 싶은 스스로의 욕구가 상충한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섹스를 하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약속받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애시당초 기대하지 않는 게 속편해 라고 포기를 선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날선 말들로 상대방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어찌 보면 가변성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노력은 헛된 것이다. 없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 있는 것이 없다고 믿는 것. 다 우스운 일이다. 루드비크를 보라. 이 똑똑한 청년이 평생동안 짱구를 굴려 친구와, 양심과, 신념을 걸고 자행한 복수의 끝은 할리우드 B급 코미디 영화의 엔딩보다도 허무하지 않던가. 진리라고 믿었던 사상의 끝에는 패망과 외면, 망각이 남아있지 않던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의 섬광은, 적어도 후회를 남기지는 않는다. 그 순간이야 말로 불변하는 영원의 것. 살아가는 데에 있어 끊임없이 꿈꾸고 희망하게 하는 마음의 뿌리가 아니던가.


10년 전 쯤의 나 역시도 복수라는 것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다. 그 복수를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도, 삶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도,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쪽도 다 할 수 있다 믿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삶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삶 역시 우리를 그렇게 쉽게 놓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한 각기 다른 방식의 크고 작은 애정. 난 거기서 꿈을 보았고 희망을 보았고, 본질을 보았다. 그야말로 삶이 내게 건넨 구원.


그래서 나는, 다치고 말 마음, 어두운 밤, 휘청대는 세상, 끝이 보이지 않는 다툼이 기다리고 있대도 기꺼이 21세기 최후의 로맨티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적어도 오늘밤까지 만큼은.


*농담: 10년 후의 나는 이 글을 보면서 뭐라고 하고 있으려나.


**

<농담>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이응준의 구절들.

나는 네가 좋았어. 그건진심이었어. 믿지 않겠지만. 불행이 찾아오면 많은 소리를듣게 돼. 그때는 네가 소중한 줄 몰랐어. 내가 특별한 인생을살게 될 줄 알았어. - 이응준, 밤의 첼로


나는 궁금했다. 어째서우리는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 더 큰 확신을 가져야만 하는가? 왜 늘 먼 훗날의 일들을 걱정한 나머지, 지금 외로운 서로의 손을 더 오래 잡아주지 못하는가? - 이응준,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농담>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얼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가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중 어느것에도 꼭 들어맞질 않았고, 그저 그 얼굴들 뒤를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니고 있었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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