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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la Oct 10. 2016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었던, 이준익의 <동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습니다.

"창씨개명까지 하면서 유학을 간다는 게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요."
"부끄럽지, 부끄럽고 말고.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고.
이렇게 늘 술만 마시고 있는 내가 부끄럽네."
...(중략)
"그렇지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윤시인, 부끄러운 걸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부끄러운 거지."

- 동주와 지용의 대화 中




모두가 자신감을 논하는 시대. 부끄러움을 논하는 영화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시를 쓰고싶은 게 부끄러웠다는 당신, <동주>.


개봉한 지 오래된 영화이니 만큼, 영화의 스토리 보다는 이 영화의 몸통 같은 단어 "부끄러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그토록 쓰고 싶었던 시집의 제목.

사촌이자 가장 친한 벗인 동주와 몽규는 완전 딴판이다. 동주는 하는 것마다 겨우 해내거나, 실패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몽규는 뭐든지 쉽게 해낸다. 간절히 원한 건 동주인데 대충 해보지 뭐 식의 몽규는 매번 합격이다. 신춘문예도. 대학입시도. 그런 몽규가 이런저런 사상에 휩쓸려 말을 바꿀 때마다, 선한 열정으로 섣부른 결론을 내릴 때마다, 그래서 시와 예술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치부할때 마다 동주의 마음은 어땠을까. 감히 짐작이 되었다. 꽤 쓰려웠다. 답답하고. 화도 나고. 그래서 더 부끄러웠을 테지. 통제되지 않는 치졸한 감정들이.


몽규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늘 잘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디폴트요, 행동력과 리더쉽,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이들. 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돌진하는 사람들. 날 선 포커스에 종종 사려깊지 못한 발언으로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존경할 만한 구석이 있어 절대로 밉지는 않은 사람들. 난 그들을 좋아한다. 자극적이고, 도움도 많이 되고, 뭔가를 자꾸 벌이고, 시작하는 게 좋아 보인다. 하지만 가끔,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만큼 그들이 나를 좋아하진 않을 수도 있겠다.


어쩌겠는가. 모두가 몽규와 같다면, 몽규는 더이상 빛나지 않을 것이다. 결과가 중요한 몽규 옆에 과정이 중요한 동주가 있었던 것 처럼, 자신감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람들 옆에 부끄러워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누군가가 앞만을 볼때, 누군가는 뒤도 보고 옆도 보아야 멀리 갈 수 있지 않겠나.


루저의 변명이라고 비웃어도 좋다. 나름의 용기를 내서 고백컨대, 나는 부끄러워하는 나를 부끄러워했었다. 자신있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 부족함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 흑백의 저예산 영화는 나에게 나지막히 말한다. 오늘 당장 모든 것을 이뤄내야할 필요가 있는가. 아침은 쉬이 올 것이고, 내일의 밤이 남아있으며, 나의 청춘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끄럽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나를 부끄러워하진 않기로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덜 부끄러운 것이라고 하지 않나.


저 어여쁜 미소만큼이나 강하늘은 동주와 참 잘 어울렸다. 대사의 선이 참 곱더라.


한줄평: 담담하고 고운 결의 흑백으로 표현한 부끄러움에 대한 찬가.

떳떳함을  찾는 <사도>와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동주>로 재기에 성공한 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를 드디어 깨부수고 나왔다. 수려하고, 아름답고, 훌륭하다.


몽규 동주 그리고 이준익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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