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고배, 배움의 축배에 대하여.
2014년 8월, 슈퍼셀에 입사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나는 운이 좋은 녀석이로구나.' 생각했다. 당시의 나는 젊고, 가난했으며, 시간 말고는 잃을 것이 없었다. 영화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모바일 업계로 넘어온 2012년은 한국 스타트업의 전성기였지만, 버블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내가 속해있던 촉망받던 스타트업이 망한 이후로는 거의 프리랜서 수준으로 이런저런 스타트업들을 드나들었다. 왜냐고? 미래를 보고 창업한 사람들의 회사에는 미래가 없었으니까. 매각용으로 뻥튀기 된 회사들에서 실무자가 할 수(or/and) 배울 수 있는 건 딱 그대의 얼마 되지도 않는 주식 만큼이다.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을 때가 태반이고. (웃음)
매력적으로 느꼈던 프로덕트, 미디어에서 드문드문 읽었던 현실감 떨어지는 슈퍼셀의 조직 문화 덕에 지원했지만 면접 전까지만 해도 사실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았었다. '그래봤자 회사가 다 똑같지 뭐.' 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합격할 가능성도 적어보였기 때문인데... 한달이 꼬박 걸린 인터뷰(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3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에서 각 구성원들이 단순한 행복함을 넘어 스스로와 조직에 대한 엄청난 긍지를 가지고 있는 걸 보고 필사적으로 one of them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궁금했다. 회사원의 긍지라는 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회사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물론 차고 넘치지만, 오늘은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언론에서 가장 열광했던 그 놈의 '샴페인 파티'에 대해 업계의 외부인들은 물론이고 어쩌면 내부의 몇몇 사람들도 잘못된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이다.
조직은 복합적이다.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슈퍼셀은 더더욱 그렇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이례적으로 작은 사이즈일 것이다. 헬싱키, 샌프란시스코, 도쿄, 베이징, 서울 총 5개 오피스에 300 명이 안 되는 임직원이 일하고 있다. 각 업무의 담당자는 거의 1명이고, 백업따윈 딱히 없다. 상황이 이러니 책임감은 디폴트이고, 성공했을 때의 자부심은 당연한 팔로우업이다. 문제는 이러한 환경에서 실패했을 때다. 너가 알고 내가 알면 모두가 아는 사이즈의 이 회사에서는, 실패했을 때 변명할 여지가 없다. 스스로도 남탓을 할 룸 자체가 없으니 멘탈이 너덜너덜해질 때가 허다하다. 언론에서 숱하게 다룬 실패를 기념하는 우리의 샴페인 파티를 나도 몇 차례 치뤄봤다. 말이 파티지, 당사자의 기분은 참담하다. 실패를 축하해준다고? 막상 축하 받아봐라. 기분이 어떤지. 하하.
작년이었나. 일카가 우리의 조직 문화와 핵심 가치에 대해, 아주 면밀한 인터뷰를 했다. 여기 그 샴페인 파티에 대한 좀더 적확한 설명이 있다.우리는 실패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한 우리의 배움을 기념하기 위해 축배를 든다고.
"There have been a lot of press stories about how we celebrate failure with champagne, but I think that's a misleading picture of that process. Trust me, it's not fun to kill a game you've worked on for six or nine months, day and night. It's your baby. What we're celebrating with that champagne isn't the failure itself, but the lessons we've learned from it. We try to create an environment where it's safe to fail. My biggest nightmare is waking up and realising we've not failed in a year - that means we're not taking enough risks."
모든 실패에 배움이 있다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배움에도 퀄리티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뚜렷한 목표와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실패에서 오는 배움과 대충 이렇게 저렇게 해서 잘 될 줄 알았는데 말아먹었을 때의 배움은 완전히 다르다. 세상의 그 어떤 회사도 샴페인을 터뜨리며 '망했어! 훌훌 털어버리자!' 라고 파티를 하진 않는다. 적어도 우리의 전사적인 "샴페인 파티"는 (팀별로는 분위기가 다를 수 있다) Postmortem 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 했고 어떤 걸 잘했으며 어디서 잘 되지 않았는지,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는지를 꼼꼼히 되돌아보고 거기서 온 러닝을 모두와 나누고, 매서운 질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답변을 한 후에야 샴페인을 한 잔 할 수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은 슈퍼셀의 샴페인 파티 이야기를 듣고, 저렇게 실패를 장려해야 사람들이 리스크를 감수한다고들 하더라. 하지만 실패를 축하해준다고 해서 기꺼이 실패하겠다는 사람은 사실 단 한 명도 없다. 실패는 절대, 그 어떤 제도적 서포트 앞에서도 쓰디 쓴 것일 수 밖에 없으니까. 우리 모두 겁이 나니까. 우리의 샴페인 파티는 그런 닝겐의 본능적 두려움에 대한 최선이자 최후의 보루일 뿐이고. 이런 마지막 보루가 있다해도 용기를 내서 전력질주를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게 조직이고, 사회고, 세상이고, 인간이다. 보편타당한 닝겐의 본능은 안전한 걸 선호하지 않나.
그럼 뭐냐고, 어떻게 하면 더 실패를 잘 받아들이고 좀더 새롭고, 멋지고, 위험한 걸 해낼 수 있냐고 물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경험한 건, 결국 똑똑한 사람들은 빠르게 경험하고, 습득하고, 배워낸다는 건데 그 중에서도 몇몇은 고귀한 실패를 하는 법을 배우는 것 같기도 한다는 점? 몇몇의 샴페인 파티는 한숨이 나올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기와 진실함에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좋아하지 않는 샴페인을 마시고 서로 어깨를 두드려 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다 보면 우리의 다음 실패는 그 전 실패보다 훨씬 새롭고, 멋지고, 위험하고, 아름다워지기도 했다는 것. 진보할 때도 후퇴할 때도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함께 바라봐 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다 보면 그래도 그나마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의 배움을 또 나눌 수 있었다는 것. 정도겠지.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최선이자 최후의 보루는 그 마지막 안간힘을 위해서 존재한다. 안전한 길에서는 그 어떤 이변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지만, 최선을 다 해서 실패한 자 만이 얻을 수 있는 고귀한 배움에 필요한 인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니까. 그 길에 늘 함께할 두려움과 불안은 오롯이 그 혹은 그녀 뿐만이 지고 가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지고 가야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