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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la Jun 18. 2024

초치기의 유용성

번역, 글쓰기, 그리고 소프트웨어 메뉴명 정하기

일에는 언제나 마감 시간있어야 합니다.


통번역대학원 다니던 시절, 번역 시험을 볼 때 말도 안되는 분량의 텍스트를 30분만에 번역해야되는 시험을 치면서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 실제로 번역으로 밥벌어먹으려면 초치기에 강해야합니다! 거의 80%의 일이 초치기 스킬을 요하기 때문이죠.


초치기로 작업한 것을 나중에 다시 보면서 '아니 내 머리에서 이런 게 나왔디고?' 할 때가 있습니다. 엄청 대단해서 감탄한다기보다는 이런 겁니다. 평소에는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서 머리를 쥐어 짜내도 잘 안나오는 표현 때문에 애 먹을 때가 있는데, 의든 타의든 초치기를 하여 성한 작업물에 의외로 나쁘지 않은, 그리고 가끔은 꽤 좋은 표현이 발견되어서 감탄하는 것이죠.






글을 요즘 너무 안썼다 싶을 땐 일요일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텀블러에 캡슐 커피 한잔을 내린 후 노트북을 들고 아이와 함께 아침에 성당에 갑니다.


아이를 주일학교 교실에 데려다주고 성당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켭니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화면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악상이 떠올라 글쓰기에 몰입합니다.


50분 뒤에는 주일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이를 데리고 미사에 가야하고, 그 뒤에는 점심 식사와 오후 활동 계획이 있기 마련이라, 저에게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는데에 주어진 시간은 성당 마당에 앉아있을 수 있는 그 50분 뿐입니다.


평소에 머리에 많은 생각들을 담고 있어도 좀처럼 글이 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와 잠깐 떨어져있는 이 끌맛같은 시간에는 갑자기 초치기 스킬이 발동되면서 글이 써집니다.






글쓰기의 원동력은 역시 마감시간인가봅니다.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판단되면 두뇌가 나도 모르게 풀가동되어 평소보다 더 잘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잦은 초치기는 두뇌 건강에 악영향이 있을 것 같지만 적당한 텀을 두고 하는 초치기는 제게 내재된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주어 시간 투자 대비 아웃풋이 상당히 좋습니다. 매사 극강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저에겐 초치기 후 결과물을 돌아봤을 때 기분이 항상 좋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네이밍도 비슷합니다. UX 라이팅에 있어서 가장 애를 먹는 것이 신규 피쳐나 메뉴 이름 정하기 입니다. 네이밍은 중요합니다. 메뉴 이름이 정해지면 그에 따른 하위 메뉴와 컴포넌트 카피도 맞춰집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고 소개하고 파는 글의 방향과 톤도 정해집니다. 버튼 이름은 막판에 바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메뉴 이름을 릴리즈 직전에 바꾼다는 것은 다 길아 엎겠다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네이밍은 언제나 신중하게 세련되게 센스있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네이밍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오랜 시간동안 고민한다고 반드시 좋은 네이밍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1시간이면 1시간, 이틀이면 이틀, 마감시간을 정해놓고 내가 정해둔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 두뇌를 풀가동하여 정해버리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장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면서 최선의 결론을 내는 방법입니다. 시간을 무한정 두고 고민하면 고민은 고민대로 하고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좋은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를 가능성은 매우 낮았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사안이니 여러 이해관계자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서 네이밍 회의를 하는 것도 최악입니다. 저는 최대 3명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이들의 의견이 섞이면 산으로 갑니다. 자신의 의견은 사전에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피력하되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 의견이 더 적합해보이면 내 의견은 거둬들일줄 아는 유연함이 모두에게 있다면 좋은 네이밍이 나올 겁니다. 물론 회의 시간도 반드시 제한이 있어야겠죠!  



우리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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