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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la Jun 22. 2024

아니, 대X리가 꽃밭이네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넋두리

대책없이 뭐든 잘 될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멍청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여러가지 상황을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절대 될 가능성이 없어보였기 때문입니다.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뜬 구름 잡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X리가 꽃밭이네. 세상 물정 참 모르네. 저러다 어쩌려고. 쯧쯧. 제대로 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상황이 이 지경인 데도 잘 될거라는 말이 나오나? 어차피 안될 거야.






자녀들을 명문대에 보낸 엄마의 자녀 교육법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내 자식이 명문대를 가는 것도 아니고, 투자에 성공한 사람이 말하는 투자법을 따라한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컨설팅 회사에서 말하는 성공 전략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내 회사가 갑자기 잘되는 것도 아니죠.


세상 만사는 수 많은 우연과 인연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에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엄마 아빠로부터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유전자를 받은 것부터 우연의 시작이고, 그 이후 내가 공부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나를 응원해주는 선생님을 만난 것도, 어떤 콘텐츠나 사람을 만나 대학 진로를 정하게 되는 것도 많은 우연과 인연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주의자들은 우연과 인연의 힘을 잘 믿지 않습니다. 태어나길 현실주의자로 태어난 사람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마음껏 원하는 것을 해볼 수 있는 정서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이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지능이 높은 편이라면 더욱더 현실주의적인 면모가 강화됩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당장 나에게 주어진 자원을 빠르게 파악하고 자원을 가성비 있게 활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하는 환경에 놓여있었다면 현실주의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왜냐하면 항상 상황이 악화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사실 이거 제 이야기입니다. 하하 그리고 많은 80년대, 90년대생들의 이야기이기도 할 거라 생각합니다.  


현실주의자들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내가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며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왔기 때문이죠. 성공을 경험 했을 경우 내가 잘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내 판단이 옳다는 생각이 강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연과 인연의 힘이 아닌 현실 파악과 주변의 선험적 사례에 의거하여 내리는 판단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결과물을 내가 주도하지 못하는 상황을 감지하면 굉장히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이런 성향이 매우 극단적인 사람들은 자녀를 낳는 것도 꺼려합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너무나 많은 변수에 나를 맡기는 일이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들이 지극히 낮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출산 연령이 높아져서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부터 내가 무언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불안해서 출산을 꺼리거나, 자식을 내가 원하는대로 키우기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부터 엄습해서 육아에 막연한 부담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을 하나씩 구체적으로 파악해보았을 때 모든 팩트가 안좋은 쪽을 가리키고 있고 내가 뭔가를 더 열심히 더 잘해본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판단되면 세상이 잿빛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연과 인연에 승패가 달려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어차피 안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이 잘 안보이는 상황에서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 행운과 좋은 인연이 또 나타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찬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대X리가 꽃밭이라고요. 맞잖아요? 특히나 이렇게 험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런 상황에서 애를 낳는 건 미친 짓이잖아!






대X리가 꽃밭인 사람들이 그래서 어떻게 됐나? 생각해보니 다들 자신만의 삶을 잘들 살고 있습니다. 하하

매사 현실적으로 이것 저것 따지고 안될 거라고 생각한 건 저였고, 뭐든지 안 좋은 쪽으로만 상황을 해석하는 저만 마음이 지옥이었습니다.


대X리가 꽃밭인 게 알고보니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하 이것을 알게 된 것은 저에게는 엄청난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실수를 하거나 부족함이 있었더라도 우연과 인연의 힘으로 성공해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어린 시절 마음껏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여유를 부려본 거잖아요? 머리 속에 꽃밭을 가꿀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 부러운 고급 인생 스킬인 것입니다.


사실 대X리가 꽃밭이라는 말이 좀 과격해서 그렇지만 상황이 좋을 때나 안좋을 때나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어쩌면 엄청난 회복탄력성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상황이 안 좋은 쪽을 가리킬 때, 모든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 비판하고 부정하고 안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끝까지 해보지 뭐, 어떻게든 될거야! 라는 마음으로 버텨보는 것.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내일을 꿈꾸는 사람이 결국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하는 무언가를 해냅니다. 수만가지의 안될 이유를 대기보단 일단은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되게끔 하려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승승장구할 수 없습니다. 좋은 시절이 있으면 안좋은 시절도 옵니다. 안 좋은 시절을 어떻게 버티느냐에 따라 또 다음 좋은 시절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또 안 좋은 시절이 오겠죠. 개인적인 삶이든 회사든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닥칠 안 좋은 시절엔 대X리가 꽃밭인 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다시 현실주의자 얘기로 돌아가서... 대X리가 꽃밭인 사람들을 경멸하는 현실주의자들은 가만히 관찰해보면 오만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내가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알게 모르게 누린 수 많은 우연과 인연에 대한 감사함을 모릅니다. 과거의 저였습니다.


가 이룬 것들은 다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것이라고 믿을수록 좋은 운과 좋은 인연은 내 주변에서 멀어집니다. 내가 잘해왔다는 오만함을 조금 내려놓고 다가오는 작은 우연과 인연에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특히 저는 제 인생을 통틀어 단 한번도 계획에 없던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더욱 제게 주어진 우연과 인연에 큰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우연의 연속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남편을 만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아이를 낳고 저와 너무나 다른 성격과 성향의 아이를 키우게 된 것은 전부 우연의 결과인데, 덕분에 외연과 내면의 확장을 경험하고 더 겸손해진 것 같습니다. 하하 내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만 그런대로 그것도 나름의 기쁨과 행복이 있더란 것이죠.


요즘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을 몇몇 만나면서 거울 치료를 제대로 받고 있습니다. '아 나도 저랬었지' 하고요. 기회가 된다면 그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마음의 여유없이 달리느라 고생했다고. 항상 뭐든지 잘할 수만은 없다고. 머리 속에 작은 꽃밭을 만들고 잘 안될 것 같을 때는 꽃밭에 누워서 쉬엄쉬엄 해보라고요. 그러다보면 우연이 빚어내는 즐거움과 놀라움을 경험할 수도 있을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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