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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만 Sep 18. 2023

목발과 애벌레


 딸이 손녀를 안고 아파트 계단에서 넘어져 복숭아뼈가 부서졌다는 이야기를 늦게 알았다. 어떻게든 제 딸은 잘 붙들었는지 손녀가 다친 곳은 없었다. 제 딸이 안 다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딸애의 얼굴이 놀랍도록 편안해 보였다. 그때 딸이기보다 진짜 엄마로 보였다. 나까지 걱정하는 내색은 삼가야 할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다닐 만한 때에 딸네 가족이 플라스틱 화분 3개와 모판을 차에 싣고 왔다. 포대에 쌓인 흙과 씨앗 봉투도 있었다. 아파트 옥상에는 햇볕이 좋았다. 새싹이 나오기까지 닷새 만에 연두색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쌈 채소들이 금세 무성했다. 손녀와 새싹을 키우는 일이 딸의 회복으로 여겨졌다. 다친 다리를 자꾸 묻기보다 옥상의 ‘농장’ 이야기를 꺼낼 수 있어 좋았다.

 네 살 손녀가 식물 이름을 꺼내기만 하면 하나 둘 늘었다. 제 아빠와 먹고 난 체리 씨앗과 파프리카 모종도 가져와 심었다. 나비가 다녀간 후였을까. 파프리카는 꽃이 떨어진 곳에 초록색 과육을 만들고, 2주 만에 발아한 체리의 떡잎 두 장은 제 역할을 끝냈고 새 잎을 세웠다. 채송화와 봉숭아는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라는 노래처럼 키가 달라서인지 한 화분 안에서도 잘 자라 꽃도 피었다.

 나방 같은 벌레들이 어디선가 모여들어 야채잎 사이에 알을 낳았고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었다. 초록잎 속에 초록 애벌레는 눈에 띄지 않는데 잎에 구멍이 숭숭 나있었다. 한 마리를 겨우 찾아 없앴는데 이미 생태계가 만들어졌는지 거미줄도 쳐 놓았다. 쌈채 쪽은 솎아주기 바빠 앞집과도 나누었고, 초여름까지 먹을 만큼 따먹은 상추와 치커리가 키만 커가고 꽃을 올리면서 관상용이 되었다.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아내가 가위로 싹둑싹둑 잘랐다. 흙 바로 위까지 잘랐는데 과감한 모습에 말릴 수도 없었다. 일주일이 다 되어도 댕강 잘린 녀석들은 물관과 체관을 희멀거니 내보인 채 싹이 돋을 것 같지도 않았다. 줄기가 뻥 뚫려있는 것은 말라죽을 것 같았다. 광합성을 할 잎이 하나도 없으니 평소보다 물을 줄였다.

 덩치를 키운 녹색 애벌레를 집어 내 옥상 에폭시 바닥에 시든 잎으로 덮어 두었다. 직접 살생을 저지르기는 싫어 사막 한가운데로 추방하여 살든지 죽든지 네 운명이다라고 하는 셈이었다. 산 채로 장례를 치렀는가 혼란스러웠다. 폭염 속에 애벌레들마저 나비가 되어 날아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들은 흔적도 없다. 내가 놓쳤을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덮어두었던 크고 징그럽던 애벌레도 온데간데없다.  

 싹둑 잘린 쌈채 일부를 재배치하다 보니 뿌리는 흙을 크게 붙들 만큼 튼튼했다. 댕강 잘린 치커리는 새 잎을 빠르게 키워 내는데, 상처를 이겨내는 데는 흙 속 뿌리와 함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싹둑 잘린 상추는 제 옆구리에 겨우 움을 트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말없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중이었다. 파프리카 열매를 보려 목발을 짚고 옥상까지 걸어 올라온 딸네 가족을 바라보기 안쓰럽다. 딸의 발목 철심을 떼어내는 것도 일 년 후라고 들었다.

 여름 동안 그늘도 없는 강한 햇빛에 도움이 될까 싶어 흙 한 포를 더 넣었다. 싹둑 자르는 일에 내심으로 방조한 죄를 진 심정이 조금 나아졌다. 쌈채를 심을 때 애벌레 때문에 약도 쳐야 한다는 것은 예상하지 않았다. 애벌레들이 쌈채잎을 얼마나 먹겠나 하며 약을 치지도 않았다. 쌈채에 애벌레가 갉아먹은 구멍이 넓어지며 공격을 받은 쌈채는 결국 죽어갔다. 파프리카와 붕숭아에도 진딧물까지 생겼다.

 플라스틱 쌈채소밭에 나비 벌 거미와 까치도 들르면서 생태계가 만들어졌고 덩치 큰 애벌레부터 처치했어야 했다. 머리를 식힐 채소밭인 줄 알았는데 애벌레와 쌈채소는 불가분 관계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약을 치던가 애벌레를 솎아 내던가를 머뭇거리다니 큰 일을 할 위인이 못된다는 자각만 커갔다. 아무 일도 없으려 무위(無爲)라는 말이 머릿속에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무엇이든 싹둑 자르는 일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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