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책을 들고 온 세 살배기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읽어주마고 했다. 안데르센이라는 이름 외에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난생처음 펴든 동화처럼 생소했다. 펼쳐 놓은 인어공주 동화책에서 우선 스토리를 읽느라 말 한마디를 못해 주었다. 인어공주의 이름이 ‘애리얼’ 이고 마녀 할멈이 ‘우르슬라’였다. 할아버지가 쩔쩔매 더듬거리는 걸 세 살배기 손녀가 금세 안다. “할아버지, 인어공주가 어려워?”라고 묻는다. 지난번 아기돼지 삼 형제 때와는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일은 오래전부터 인어공주에 대해 잘 알던 이야기로만 여겼다는 거다. ‘성냥팔이 소녀’라면 좀 나았을 텐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얼마후 행복지수 세계 최고라는 덴마크를 여행할때 코펜하겐의 인어공주를 만나보게 되었다. 이참에 인어공주 이야기를 손녀에게 제대로 들려줄 생각이었다. 인어공주 동상은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두세 시간 걸어 해변 끝에 있다. 거리 풍경도 볼 겸 그곳까지 걷는데 무릎도 아파지니 해변까지 공원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했다. 야트막한 언덕 먼 곳 푸른 잔디위에 외따로 서있는 ‘성 알반 교회(St. Alban’s Church)’ 는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공원 한편의 큰 나무 밑에서 처칠의 흉상을 보았다. 영국의 처칠 경이 왜 덴마크에서 나와? 싶었다. 둘러보니 2차 세계대전에 관한 기록들과 동상들도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레지스탕스 기념관이 있고 옆에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발키리 조각상이 천마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름다운 발키리 여신들이 용감히 싸우다 죽은 전사를 마차로 거두어 갔다. 오딘 신(神)이 사는 발할 궁전에 이르면 부활한다고 믿었다. 전사들은 전장에서 빨리 죽는 게 소원이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관광객이 오고 가는 광장에 게피온(Gefion) 분수대가 우람했다. 게피온 여신은 4필의 황소가 끄는 마차에서 지휘하는 전쟁의 상징이었다. 이웃나라와는 전쟁을 피하기 어려운가. 게피온 여신은 스웨덴 땅을 떼어 내 서쪽에 갖다 붙이고는 셸란(Zealand)이라고 불렀고, 덴마크 최대의 섬이 되었다. 애국심을 고취하고 싶은 장소였다. 80여 년 전 세계대전과 레지스탕스, 북유럽 신화도 만나보니 인어공주는 덴마크 애국심에 묻힌 게 아닌가? 공주를 만나 보기도 전에 우울해졌다.
관광객을 앞에 두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인어공주의 지느러미 발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바다의 마녀 우르슬라가 공주에게 물약을 주며 말했다. 칼날에 베이는 것과 같은 고통으로 뼈가 갈라지고 인간처럼 두 발을 갖고 서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되는 대가로 제 혀를 내주고 목소리도 잃었다. 왕자와 결혼하지 못하면 물거품으로 변할 운명이었다. 목소리만 기억하는 왕자와 연을 끊어야 할 때 인어공주는 슬픔을 참고 죽었다. 해변에는 고니 두 마리가 한가롭게 깃털을 고르고 있었고, 얕은 수면을 따라 덴마크 전통가옥 ‘미역 집(The Seaweed Home)’의 재료인 해초(거머리말Eelgrass)들만 끝없는 욕망처럼 자라고 있었다.
디즈니(Disney)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해진 인어공주는 수난도 많이 겪었다. 테러와 이슈의 표적이 되어 폭파되어 바닷속으로 떨어지기도 했고 목이 두 번이나 잘린 적도 있었다. 핑크빛 페인트로 온몸이 뒤덮인 때도 있었다. 마침 100주년을 기념하는 실사(實寫) 영화가 만들어졌다. 빨간 머리 백인 인어공주 에리얼(Ariel)역(役)에 흑인 여가수 핼리 베일리(Halle Bailey)가 캐스팅되며 인종차별이다 아니다하는 논란만 무성했다.
손녀에게 인어공주 이야기를 들려주겠지만 재미없다고 할 것이다. 인어공주가 애국심과 테러에 몸살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아직 해줄 수는 없다. 티볼리 놀이공원에서 인어공주 그림책을 샀지만 원문이 궁금했다. 다행히 수필 공부를 함께하는 문우로부터 영어로 번역된 1950년 출판 본(80 Fairy Tales)을 빌려 읽었다. 안데르센은 풍부한 시어(詩語)와 상상력, 묘사에서도 천재적인 작가였다. 안데르센에 관해 읽어 볼수록 빠져들었다.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깊은 주제를 동화적 표현으로 다룬 단편소설이었다. 안데르센을 직접 만나는 듯 생생했다. 인어공주에 대한 나의 작은 발걸음은 갑자기 거대한 동화의 세계로 초대받은 듯했다.
인어공주 이야기도 시대에 따라 업그레이드될 터인데 여전히 어렵다. 손녀 수준에 맞게 정돈된 인어공주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무책임한 할아버지는 입 다물고 차라리 “너희들이 자라서 직접 보고 느끼는 편이 낫다”라고 말해 줘야 할까. 속마음을 읽은 아내와 딸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그저 할아버지표 동화 읽어주기로 충분하다고 여길 일이었다.
안데르센이 책 말미에 답을 주고 있었다. 사랑을 잃은 인어공주가 3백 년을 ‘공기(空氣)의 딸’로 지내는 중에도 세상의 착한 어린이를 만날 때마다 1년씩 시련의 기간을 단축하면 불멸의 영혼을 얻고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겨우 해피 엔딩으로 들려주게 될 인어공주 이야기는 손녀가 커감에 따라 수준에 맞게 이야기해 줄 자신감도 생겼다. 인어공주 이야기를 힘겹게 마무리 짓는 나에게 안데르센이 “할아버지는 인어공주가 어려워” 하며 빙긋 웃어 주는 듯했다. 고단한 머리를 이고 중앙역으로 돌아오는데, 저만치 안데르센 동상이 길 건너 티볼리 공원에서 들리는 어린이들의 탄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