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社의 인어공주 애니메이션 100주년을 기념하는 실사(實寫) 판 영화를 보았다. 세 살 손녀가 들고 온 인어공주 동화책을 읽어주려는데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인어공주 원문을 찾아 읽다가 안데르센의 작품세계는 동화라기보다 욕망이라는 주제를 다룬 단편 소설임을 알았다. 1년 전 코펜하겐을 여행하면서 만난 인어공주에 대한 추억이 새로웠다.
1세기 전 칼 야콥슨이 인어공주 동화 발레극을 보고 덴마크의 자랑으로 동상을 세웠다. 인어공주의 얼굴은 당대의 유명 발레리나였지만 나체는 허락받지 못해 조각가의 아내가 몸의 모델이 되었다. 유명해진 인어공주 해변은 2차 세계대전 후 애국심 선전과 테러 장소로 변했다. 안데르센 원문의 슬픈 이야기로는 흥행이 안되는지 이번 실사 영화도 해피엔딩이었다. 안데르센에게 무례한 일 같았는데 정작 그의 동상은 티볼리 공원에서 들려오는 어린이들의 함성을 향해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는 배를 타고 있던 선원들이 인어를 발견하고 사냥하는 왁자지껄한 장면부터 시작했다. 바닷사람들에게 희생된 인어는 바다의 왕 트라이튼(하비에르 바르뎀 분)의 아내요 인어공주의 어머니였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주인공 '안톤 쉬거'를 열연한 하비에르 바르뎀은 동화 이야기 속의 바다 왕국보다 강력한 이미지를 뿜어냈다. 곧 폭풍에 휩싸인 바다는 아틀란티카 바다 왕국의 복수로 여겨졌고 바닷속 인어와 뭍의 인간은 서로 어울리지 않거니와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폭풍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이렌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혼미해진다. 사이렌이 부르는 유혹의 노래를 들으면 죽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선원들은 귀를 막아야 했다. 사이렌의 노래는 인어들만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닌가. 인어공주는 왕자를 사랑하는 갈망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목소리를 바다의 마녀 우르술라에게 내어 주었다.
욕망이라는 주제로 읽던 인어공주 이야기가 다르게 다가왔다. 안데르센의 원문에서 알아채지 못했던 목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목소리 또는 혀를 잃는다는 것은 자기다움을 상실하는 것으로 욕망의 대가로 교환될 만한 무게감을 가졌다. 마녀 우르술라가 제조하는 마법의 물약에 필요한 재료를 잘 살펴야 했다. 마녀에게도 일말의 양심이 있어야 했는지 마녀 자신의 가슴을 긁어 흘린 피 한 방울과 인어공주의 혀를 잘라 써야 했다. 인어공주의 허황된 욕망의 대가를 안데르센은 동화적으로 은유했다. 인어공주 자신이 왕자를 구해냈음을 설명할 혀가 없는 벙어리임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뜻하는 도구라는 게 선명해졌다.
아주 오래전 스킨 스쿠버를 배우며 서귀포 ‘새섬’ 앞바다를 처음 들어갔던 때가 떠올랐다. 허리에 8kg 납덩이를 두르고 수심 20m를 내려가면 되었다. 아가미가 없어 산소통을 등에 맨 한 마리의 물고기이던가 인어인 셈이었다. 지느러미도 필요해서 물갈퀴를 신었다. 일렁이는 파도가 두렵지만 강사를 따라 20여 명이 바닷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3, 4m쯤 내려갔을까? 홀로 뒤처져 이미 아래쪽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사방이 연두색으로 위아래마저 알 수 없어 무서웠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바다와 하늘이 혼동된다는 게 이해할만했다.
햇빛이 바다 밑 모래 바닥에 반사되어 공간이 보였고 발을 디뎠을 때 겨우 안도했다. 수심 20m 코앞에서 초록색과 노란 줄무늬의 물고기들이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며 오가고 있었다. 인어공주의 아버지이며 바다의 왕인 트라이튼이 다스리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숨 쉴 공기를 산소통에 담아서라도 바다 아랫녘 세상이 궁금했을까. 헤엄조차 못하면서도 호기심과 욕망이 인어공주처럼 컸었나 보다. 인어공주가 바로 나였는가 아니면 천재 안데르센 때문인가는 모르지만 일순(一瞬) 소름이 돋았다.
해피엔딩을 위해서 영화의 흐름이 바뀌어야 했다. 바닷게가 뒷다리로 경쾌하게 퍼커션을 두드리며 물고기들의 바닷속 연주회가 열렸고 뭍의 인간과 바닷속 인어가 공존하는 합주로 들렸다. 원문에서 물거품으로 변한 인어공주의 슬픈 결말이 영화에서는 연주회 장면으로 이미지를 바꾸었다. 예술이 정치에 활용된 방식을 흐릿하게 보는 듯했다.
문학작품을 시류에 따라 해석하는 것도 창작의 영역이지만 기억 속의 이미지는 잘 바뀌지 않는다. 네 살 손녀에게 스킨 스쿠버를 설명하며 ‘인어공주가 된 할아버지’로 바꾸어 말해 볼까? 손녀는 ‘할아버지, 그게 아니고…’하며 제 말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손녀를 바라보는 한 해 한 해가 무섭게 빠르다. 애니메이션의 붉은 머리 백인 애리얼(Ariel)도 이미 전설이 된 일이다. 흑인 캐스팅 논란부터 수많은 말의 향연이 된 인어공주를 이야기하려 애쓰느니 손녀와 함께 그냥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