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경(2016.5 발간) 책 되짚어 읽기
18. 빅토리아 시대 섬나라 영국의 이상한 퇴보
1789년 프랑스는 대혁명과 왕정복고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영국은 산업혁명(1760~1820) 중이었다. 1819년 증기선이 대서양을 건너고 1830년 리버풀과 맨체스터사이에 철도가 오고 갔다. 1832년 최초의 선거와 식민지건설로 빅토리아 시대(1837~1901)를 구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 출신 엘버트 공과 9명의 자녀를 낳아 프로이센 러시아 덴마크 등 유럽 왕실과 혼맥도 맺었다. 유럽 왕실의 할머니로 1세기 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를 떠올리게 한다.
런던의 부르주아들은 귀족과 비슷해지고 싶었다. 성공한 부르주아는 보수적이었고 모토는 근면 독립심 책임감이 그들의 모토였다. 이는 200년 전 크롬웰 시대의 청교도들과 흡사했다. 엄격한 도덕관념 때문에 여성들은 반드시 온몸을 가리는 의상을 입어야 했다. '피아노에 다리가 있다'는 말마저도 외설적인 언어로 여겼다. 영국신사는 젠틀맨이라 불렀지만 애첩을 숨겨 두고 남몰래 아편을 피웠다. 추악한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젠틀맨들이었다.
부강해지는 국가 속에 모순도 함께 자라났다.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살았던 빈민층은 여러 가지 범죄와 질병에 노출되어 있었다. 중부 서해안 끝, 웨스트엔드에는 볼룸댄스 성지로 유명한 블랙풀로 상징하듯 빈부차가 대비되었다. 합리주의와 보수성에 대한 반동으로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가 커졌다. '과거로 돌아가자'라는 기치로 미술사에 담긴 것이 영국의 독특한 복고주의인 '라파엘 전파'였다.
해가 지지 않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정서와 그 시절에 대한 향수로, 엘가와 본 윌리엄스의 음악이 영국인들의 보수적인 성향을 대변했다.
엘가: 첼로 협주곡 1 2악장 <위풍당당 행진곡> 1번 / 본 윌리엄스: <푸른 옷소매 환상곡> <날아오르는 종달새>
17. 예술 산업의 성장 직업 예술가와 컬렉터의 등장
귀족과 평민 계급이 사라지고 중산층 시대가 도래하자, 대중은 교회대신 공연장에서 영혼의 정화를 찾았다. 대중은 천재성이 발현된 작품보다는 천재다운 기행에 더 솔깃하기 마련이다. 매독 치료를 하느라 수은 증기를 들이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이빨은 다 빠지고 목소리마저 잃었던 파가니니(1782~1840)는 우선 신기에 가까운 연주 기교를 선보였다. 음악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늘었고, 리스트 쇼팽 등 비루투오소들은 도시와 도시를 역마차로 순회하였다.
음악에서 최초의 지휘자는 베토벤에 의해 탄생했다. 지휘자가 사망하거나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경우에는 일사불란한 지휘자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베토벤보다 22세 연하인 로시니의 유쾌한 희극을 통해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는 남녀 간 교제의 장이기도 했다.
영국 19세기 코톨드는 중산층 출신 콜렉터였다. 그의 갤러리는 인상주의 미술에서 개인 컬렉션으로 세계 최고로 꼽힌다. 코톨드는 자신의 안목으로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 르누아르의 <관람석>,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가을>, <앙티브에서>,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등을 수집했다. 특히 세잔의 <큐피드 석고상이 있는 정물>은 원근법이 무시되는 등 '사물의 형태는 원래 이래야 한다'는 그림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지 않았다. 세잔의 사고방식에서 20세기 피카소의 등장이 예견되었다. 피카소는 "우리는 모두 세잔에게 빚지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런 세잔의 남다른 면모를 코톨드는 직감적으로 파악했다.
https://youtu.be/-ZtitHRACAY?si=sCCp9PZIXYBCcQb3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1악장/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5악장 <마녀들의 밤>/ 브람스 교향곡 1번 1악장/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눈 치우기 Chasse -neige>/쇼팽 안단테 스피니아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Op22
16. 인상 중의 미술과 표제음악 햇빛과 물결을 예술에 담다
인상주의는 파리를 예술의 수도로 정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 국제 박람회 때 하이드파크에 세워진 수정궁 자체가 신기술의 개가였다. 건물을 설계한 조셉 텍스터는 대본 쇼 공작의 정원사였으며 유리와 철근만으로 조립식 건물을 세웠다.
1830년 중 프랑스의 니에프스 형제는 햇볕을 쬐면 질산은이 검게 변한다는 웨지우드에 발견을 실용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풍경의 이미지를 인화하는 기술을 발명했고 1840년대 초 다게르는 구리판을 이용해서 선명한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큰 특징은 빛이 사물에 닿는 순간을 잡아내어 그 인상을 화폭에 표현하는 데 있다. 마네의 <풀밭 위에 점심 식사>는 마네가 고전을 의도적으로 모욕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할 만큼 큰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그들이 밟고 사는 시대를 그렸다는 점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원한 멘토였다.
인상주의를 주도한 인물은 끌로드 모네였다. 그의 작품 <해돋이-인상> 등이 경매에 넘어갔으나 대다수의 작품들은 헐값에 작가 자신이 다시 사들였다.
8살 후배인 모네도 같은 제목으로 <풀밭 위에 점심 식사>를 그렸다.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던 마네와 달리 모네는 풀밭에 둘러앉은 그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떨어지는 한낮의 밝은 햇살에 집중했다.
<발레 수업> <두 명의 발레리나> 등 드가는 마네와 가까운 화풍이었고, 르누아르는 모네의 편에 서서 여인과 꽃으로 만든 멋진 부케를 창조해 냈다.
교향곡의 4악장에 합창을 삽입함으로써 베토벤이 낭만주의의 문을 연 이래, 작곡가들은 표제음악 교향시 등의 방식으로 새로운 조류를 표현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스코틀랜드 슈트파 섬에 기이한 절벽해안과 동굴에서 <핑갈의 동굴> 관현악곡을 표현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리스트의 <순례의 해> 보로딘의 <중앙아시아의 초원>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등은 모두 회화의 한 장면을 음악으로 옮긴 듯하다. 바이올리니스트 '네만야 라두로비치의 유니크 콘서트 in 프랑스 카르나크' 연주는 고인돌이 있는 들판의 영상과 바그다드 천일야화 속 스토리낭독이 돋보인 복합예술이 되었다. 드뷔시의 바다는 당시 유행하던 바그너의 장대하고 거창한 주제의 음악에 대한 반발로 보였다. 19세기 후반은 인상주의와 표제 음악이 주도했다.
멘델스존 관현악 서곡 <핑갈의 동굴> /드뷔시 교향적 모음곡 <바다> 중 <파도의 희롱>
15. 산업 혁명 파리의 보헤미안, 낭만에 빠지다
1850년대 철도 의존도는 전체 교역 10%에서 1870년대 절반으로 늘어났다. 처음으로 실시된 남성 보통 선거에서 대부분의 농민주권자는 유일하게 아는 이름인 루이 나폴레옹을 선택했다. 나폴레옹 3세는 인도차이나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도 건설했고 1869년에는 수에즈 운하를 개통했지만 1870년 보불 전쟁의 패배로 프로이센 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왕정은 종말을 맞았다. 비스마르크에 패한 프랑스는 50억 프랑 전쟁 배상에 저항하는 좌파 코뮌과 정부군의 충돌로 무정부상태였고 3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처형되었다.
혼란 속에서도 1989년 댄스홀 물랭루주가 문을 열었다. 도시화 속에 가난한 여성들은 센 강의 세탁선에 모여 빨래일을 했다. 가장 값싼 천인 회색 옷을 입었던 일하는 여성은 '그리제트grisette'로 부르고 멸시했다. 르누아르가 살던 몽마르트르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는 일요일 오후마다 야외 댄스파티가 열렸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으로 입신양명해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림 앞쪽에 담소하는 남녀들은 르누아르의 친구들이거나 그가 푼돈을 주고 모델로 고용한 처녀들이다.
그림 맨 왼쪽에서 르누아르의 친구와 춤추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10대 처녀 마고는 이 그림이 그려진 지 2년 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 속에서는 행복하게 웃고 있지만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처녀들의 삶은 곤궁했고 매춘을 하기도 했다. 그림 오른편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은 대부분 르누아르의 친구인 작가나 화가들이다. 10년 뒤 <물랭 드 라 갈레트>를 그린 고흐의 작품이 황량하고 1/3 사이즈인데 비해, 르누아르는 무도회의 분위기를 담아내며 그림 속에서나마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묘사했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에서 여급 쉬종을 통해 사교계의 분위기를, 제임스 티소의 <사교계의 여인>, 드가의 <발레 무대 리허설>에서 무용수들의 정부 겸 스폰서인 아보네 abonne를 볼 수 있을 만큼 19세기 중반의 파리 남자들에게는 창부는 일종의 재산과시요 자랑거리로 여겼다.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중 <그대의 찬 손>, <내 이름은 미미>
예술, 역사를 만들다 4
22. 1,2차 세계대전 불안에 빠진 유럽
21. 20세기 초의 예술 1913년, 위대한 마지막 1년
20. 예술 속의 제국주의 먼 나라 일본에 대한 동경
19. 미국과 러시아 두 개의 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