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경(2016.5 발간) 책 되짚어 읽기
22. 1,2차 세계대전 불안에 빠진 유럽
21. 20세기 초의 예술 1913년, 위대한 마지막 1년
20. 예술 속의 제국주의 먼 나라 일본에 대한 동경
19. 미국과 러시아 두 개의 변방
18. 빅토리아 시대 섬나라 영국의 이상한 퇴보
17. 예술 산업의 성장 직업 예술가와 컬렉터의 등장
16. 인상 중의 미술과 표제음악 햇빛과 물결을 예술에 담다
15. 산업 혁명 파리의 보헤미안, 낭만에 빠지다
14. 이탈리아 통일과 오페라 비바 베르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공화국을 목도한 이탈리아 인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통일을 이룬다면 정치 경제적으로 보다 부강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음을 절감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때문에 문학 작품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음악이 문학을 대신해 민족주의를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에는 350개가 넘는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가 유명해지자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엠마누엘'의 약어인 베르디 VERDI를 통해 통일 이탈리아에 대한 열망이 심어졌다. 나부코에서 '가라 꿈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 오라'고 노래하며, 멀리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처지를 이탈리아인의 상황에 이입시켰다. 베르디 역시 피에몬테-사르데냐로 통합되는 이태리 통일 과정에서, 파르마 공국 대표 5인 중 한 명으로 활약하였다. 이탈리아 통일에 베르디의 오페라가 끼친 영향이 바로 문화 국가주의의 위력이 발휘된 경우일 것이다.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 중 4막 합창 <오, 억압된 조국> /리골레토 중 2막 리골레토의 아리아 <이 천벌 받을 놈들아>, 이중창 <교회에 갈 때마다> / 라 트라비아타 중 2막 이중창 <천사처럼 순수한 내 딸> /가면무도회 중 3막 레나토의 아리아 <너였구나, 내 영혼을 더럽힌 자가>
https://youtu.be/uTasb_9vaz8?si=cz1XbL2jYVSo0SuD
13. 독일 음악과 낭만주의 검은 숲을 방랑하는 겨울 나그네
낭만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잔재로 비롯했다. 나폴레옹은 '라인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공국들을 나누어, 독일어권은 35개의 공국과 4개의 자유도시(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 프랑크푸르트)로 분열되었다. 19세기 초반에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탄생한 낭만주의 예술의 특징은, 현실 정치에서 젊은이들이 맞닥뜨린 좌절과 절망감이 예술 작품에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베토벤은 예술가를 '신과 대중 사이에 중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예술가가 고전주의 모차르트 시대처럼 하인의 옷을 입고 귀족의 저택에 기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821년에 발표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 등장하는 숲은 독일인에게 숲이 얼마나 강렬한 이미지인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독일인에 의한 독일에 대한 오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베버가 <마술피리>를 작곡한 이후 최고의 징슈필이 <마탄의 사수>이다. 바그너 또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통해 중세 기사의 전설을 재현하려는 루트비히 2세의 후원으로 통일 민족주의라는 위험한 가치를 내달리게 되었다.
슈만 리트 <두 사람의 척탄병> 슈베르트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2악장 /리트 <마왕> /연가곡 <겨울 나그네>중 보리수 /연가곡 <물방앗간의 아가씨> 중 방앗간 일꾼과 시냇물
베버 오페라 <마탄의 사수> 중 서곡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 중 순례자의 합창
12. 프랑스 대혁명 혁명, 유럽에 퍼지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부르주아는 더 이상 귀족을 존중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마침 1773년 12월에 유명한 보스턴 티파티(미국인들이 배 세척에 가득 실린 홍차를 바다에 던져 버린 사건)가 터지며 미국과 영국은 전쟁에 들어갔는데, 프랑스는 1776년 독립 선언한 미국을 지원했다. 유럽을 방문했던 벤저민 프랭클린과 함께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이념들이 뜻하지 않게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흘러 들어왔다. 프랑스 대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부르주아에 의한 부르주아를 위한 혁명이었다. 공화정과 왕정으로 혼란의 시기였다. 1784년 혁명과 정치 이념을 배경으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린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수석 화가로 일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과 부루봉과 합스부르크가문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처형으로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혁명에 놀란 유럽 전체와 등지게 되었다. 혁명 후 7년 동안 혁명세력의 마라 암살 및 당통, 로베스피엘이 처형되며 프랑스는 대 혼란에 빠졌다. 1793년 왕당파에 넘어간 남부 툴롱 항구도시를 수복한 24세 나폴레옹 중위는 준장으로 승진하고 이탈리아를 정복한다.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이집트에서도 승리해 111년만인 1804년 35세에 황제에 올랐다.
분노에 찬 베토벤은 '보나파르트 교향곡'의 제목을 '영웅-한 위대한 인물을 추억하며'로 고쳐 썼다.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은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상이용사 기금 마련으로 초연되었다. 공화주의자이며 계몽정신에 경도되었던 베토벤의 3,7번 외에도 5번 '운명', 9번 '합창'에는 혁명의 정신과 나폴레옹적인 분위기가 흠뻑 배어있다. 앙시엥 레짐(프랑스혁명 때 타도의 대상이 된 정치 경제 사회의 구체제)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대, 제2의 카이사르를 꿈꾸던 나폴레옹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대륙봉쇄령을 위반한 러시아를 1812.6월 침공하지만 겨울 추위에 실패했다. 차이코프스키의 1812서곡은 러시아에게 승전기념곡으로 연주되었다.
혁명의 이상적인 모습을 실현할 수 없었고 역사적 격랑은 권력다툼의 장으로 흘러갈 뿐이다. 1830년 루이 18세 왕정, 1848년 시민왕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정, 1852년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의 동생 루이와 조제핀의 딸 오르탕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3세의 제2제정으로 이어진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1막 피가로의 아리아 <춤추길 원하신다면, 백작님>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중 2악장, 교향곡 7번 4악장 /차이코프스키 관현악 서곡 <1812년> /푸치니 <토스카> 1막 테 데움
https://youtu.be/JX2jTVttUis?si=heprt9glPW-awq1q
11. 18세기의 유럽 터키는 왜 예술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나
서유럽의 끝 이베리아 반도는 711년 이래 700년 이상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무슬림지배를 받았다. 카스티야의 이사벨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자의 결혼으로 기독교 세력이 마지막 이슬람 나스르 왕조를 몰아냈고, 1271년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는 중국까지 교역을 할 수 있었고 그가 지참한 가톨릭 교황의 협조 요청 서한을 쿠빌라이 칸은 거절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프를 함락시키면서 '이슬람이 풍부한 도시'라는 뜻으로 이스탄불로 명명했다. 이제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완충지대는 사라져 버렸다.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를 점령하고 합수부르크 왕가의 수도 빈을 포위했다. 1676년에 오스만 제국은 우크라이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족이 러시아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스만 군은 폐퇴하였다. 1683년 다시 한번 빈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동유럽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두 차례 오스만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승자의 여유'로 터키풍이 유행하였다. 모차르트의 터키풍 론도, 하이든의 군대 교향곡, 베토벤의 터키 행진곡 등 최첨단 유행의 산실이었다.
모차르트 최초의 오페라 <후궁 탈출>은 독일어 가사에 곡을 붙인 징슈필이다. 1782년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주교와의 갈등 끝에 고향을 떠나 빈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작곡한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오스만 군에게 포로로 잡혀 오스만 궁의 하렘으로 끌려간 여인들의 탈출기를 담았다. 공공의 적 술탄에 맞서는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왕세자 루이 16세와 혼인시킨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입은 터키풍 헐렁한 바지가 대유행이었고, 콜쉬츠키에 의해 이슬람에서 와인을 대체할 음료로 마시던 커피도 전파되었다. 그의 블루 보틀 하우스는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였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k331 중 3악장 오페라 <후궁 탈출> 중 콘스탄체의 아리아 <어떠한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