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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역사를 만들다 4-4

전원경(2016.5 발간) 책

by 이용만

22. 1,2차 세계대전 불안에 빠진 유럽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을 대전쟁 (Great War)이라고 불렀다. 4년의 전쟁 동안 1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또한 1918년과 1919년 사이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전 세계에서 2,100만 명에 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세력 확장을 노리던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을 들며 프랑스를 침공했기 때문에, 프랑스로 진군하는 길에 독일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하고 전통적으로 벨기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은 곧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영국에게 아프리카와 지중해 식민지를 뺏긴 오스만 제국은 독일 편에 섰고, 나폴레옹에 맞섰던 러시아 역시 영국 편을 들며 전쟁에 가담했다. 마침내 독일 유보트 U-boat의 공격과 독일-멕시코 밀약에 발끈한 미국이 참전했고 독일연합은 패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의 전쟁 배상금은 320억 마르크에 달했다. 극우 나치정당이 1933년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했다.

국가를 막론하고 적국의 예술은 추방되었다. 다시 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회환을 담은 벨 에포크(좋은 시대)는 갔다. 보헤미아 출신의 에곤 쉴레는 결국 1915년 전쟁으로 끌려갔다. 운 좋게 전쟁 중에도 <가족>을 주제로 그렸지만 스페인 독감때 아내가 죽은 뒤 곧 이어 30세로 생을 마쳤다. 고통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예술의 시대였다. 1914년 일시적으로 러시아에 귀국했던 유태인 화가 마르크 샤갈은 <다친 군인들> <누워 있는 시인> 등을 제작한다. 프랑스로 망명 이후에도 제2차 세계 대전이 임박해서 미국 망명의 길을 택했다. <크랜베리 호수로 가는 길>의 음울한 푸른 색채는 유태인 박해에 다시 직면하게 된 샤갈의 어두운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제1차 대전 후 미국을 거쳐 파리로 이주했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는 1933년 스페인 출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을 박해했던 스탈린과 같은 날인 1953년 3월 5일에 세상을 떠났고 아내 리나는 서방으로 망명했다.

전쟁 속에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본업인 예술마저도 파괴하고 조롱하는 길을 택했다. '다다'는 목마를 뜻하는 프랑스의 유아어로, 다다이즘은 과거의 모든 예술적인 유산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버리겠다는 극단적인 결단을 표방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는 꿈속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그렸다. <기억의 지속>이나 <석류 주변에서 벌이 날아다녀 꿈에서 깨기 전>과 같은 그의 작품에는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계가 초현실임을 드러냈다. 파리에 머물던 피카소는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1,645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된 그림 <게르니카>를 그렸다. 전쟁은 예술의 방향은 물론 예술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예술이 대중을 떠난 자리에는 재즈 영화 뮤지컬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 예술이 들어왔다.

석류 주변에서 벌이 날아다녀 꿈에서 깨기 전,달리

라벨 : <쿠프랭의 무덤> 중 미뉴엣/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OP 39-5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번 4악장/ 사티 피아노곡 <역겨운 멋쟁이를 위한 세 개의 품위 있는 왈츠>

https://youtu.be/DbgZvgVYg8k?si=uBBmGWj-6MHRfz0r


21. 20세기 초의 예술 1913년, 위대한 마지막 1년

1870년 보불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평화가 지속되었고 피카소와 브라크가 입체파를, 마티스는 현란한 색채의 야수파 회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1906년에 그린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었다. 피카소는 '미술이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시대가 저물었으며 예술가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관념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시대가 왔음'을 선언했다. 마르셀 뒤샹은 선과 면을 분할하는 입체파의 방식을 연구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1912년에 완성했다. 곧 유럽 각지에서 새로운 예술 운동 즉 아방가르드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야수파라는 이름이 생긴 배경에는 전시실 한가운데 놓인 고전적인 조각상을 보고 비평가 루이보셀이 탄식처럼 내뱉은 "저런, 야수들 사이에 도나텔로가 있군"이라는 말에서 탄생했다. 마티스의 <붉은 조화>를 보면 색채를 강조하기 위해 원근법이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묘사보다 표현이 앞선다는 점에서 마티스의 야수파와 피카소의 입체파는 접점을 찾는다.

붉은 조화, 마티스

영국의 경제학자 노먼 에인절은 '세계가 이처럼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절대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라고 단언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독일에서의 예술 경향은 무리한 군비 증강을 지켜보던 사회 전반의 피로와 불안감이 키르히노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에 잘 나타나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사이의 다리가 되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다리파, 남부 독일의 러시아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독일의 동료들과 함께 청기사파를 결성하고 잡지 청기사를 발행한다. 청기사라는 이름은 칸딘스키가 청색을 사용하고 프란츠 마르크가 말의 역동성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음악 속에 추상회화의 요소를 집어넣는 실험이었다. 다리 파가 고통을 표현할 때 청기사파는 자연을 바라보았고 그림을 통해 외부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순진한 꿈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칸딘스키는 독일에서 추방당했으며 마르크와 마케는 모두 전사했다. 청기사 파의 푸른 꿈 역시 허망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기계 문명과 예술을 연결하는 시도로 역동적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더 나은 미래를 얻기 위해 대거 자원입대하였다. 1905년 혁명으로 러시아 황실 발레단의 존재는 마술적인 흥행사 디아길레프에 의해 '러시아인의 발레'라는 이름을 내걸고 파리에 입성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역시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시카>와 <봄의 제전> 등이 있다. 밀짚 인형 페트로슈카는 영혼을 가지고 있고 사랑을 갈망하지만 결국 농부의 칼에 힘없이 베이고 만 스토리인데, 니진스키의 운명을 예고한 것이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 살로메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905년 발표하여 38번의 커튼콜을 받았다 1914년 6월 28일 발칸반도에 사라예보에서 전쟁의 신호탄이 터졌다.


스크랴빈 : 피아노 소나타 4번 2악장 /스테라빈스키 발레 음악 <불새> <봄의 제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살로메 중 1막 살로메의 아리아 <요한, 당신의 입술에 오래도록 키스하고 싶어요>


20. 예술 속의 제국주의 먼 나라 일본에 대한 동경

1299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등장한 황금의 나라 지팡구(재팬)로부터, 1492년 콜럼버스는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세 척의 배를 빌릴 수 있었다. 1571년 나가사키는 포르투갈 상선과 신부들이 상륙한 이래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등의 전쟁 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00년 영국선원 윌리엄 애덤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무라이가 되어 선박 건조 기술을 전수했다. 당시 가톨릭 신자만 30만 명이었으나, 예수회가 막부의 반란을 지원한 일로 200년간 쇄국한다.

산업혁명으로 생산된 공산품은 내다 팔 시장과 원료가 필요하였다.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일본을 강제 개항했고 250년 막부정치는 막을 내렸다. 막강해진 천황의 야심은 군국주의를 향했다. <유럽음악연주회>의 벚꽃과 보름달은 목판화 우키요에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파리 인상주의 화가들과 작가들에게 일본풍 예술 즉 자포니즘은 최신 트렌드였다. 고흐는 <가나가와의 큰 파도>를 보고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파리의 화가들에게 배운 것은 이젠 다 잊어버렸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고흐가 1,887년에 그린 <가부키 배우의 초상>과 <다리 위의 소나기>는 언뜻 보면 우키요에 그대로다.

다리 위의 소나기, 고흐


1887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국화 부인>은 피에르 로티라는 해군 장교 겸 소설가가 나가사키에서 게이샤인 현지 처와 잠깐 동안 살림을 차린 자전적 이야기였다. 이미 토스카로 인기를 끈 푸치니는 1898년 런던에서 국화 부인 연극을 보고 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1700년대 출간된 베네치아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우화 속에서 투란도트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오페라 <나비부인>은 나가사키를, <투란도트>는 고대 중국을 무대로 한다.


푸치니: 나비부인 1막 핑커톤-샤플레스의 이중창 <온 세상을 누비는 우리 양키는> <어떤 갠날> 허밍 코러스/ 투란도트 <먼 옛날 황궁에서>, 칼라프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


19. 미국과 러시아 두 개의 변방

1620년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 필그림 파더스가 메사츄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한 이래, 영국인은 뉴암스테르담을 사들여 뉴요크가 되었다. 영국 본토에서는 1649년 챨스 1세를 처형하고 크롬웰이 1658년까지 재위하였다. 미국의 세금 무역권에 대한 반발에 1763년 조지 3세는 영국군대 1만 명을 주둔시켰으나, 1773년 보스턴 티파티사건으로 식민지 미국인과 전쟁을 벌였으나 1783년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노예제도로 남북 전쟁이 불가피했던 미국이 태동하던 시기에, 러시아의 표토르 1세(1682~1725 재위) 또한 열악한 러시아 자연환경에서 농노제도를 유지해야 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유럽의 예술이 나폴레옹 이후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낭만주의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신대륙 미국에는 기억할 수 있는 과거가 아예 없었다. 자연주의자인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연에 대한 귀의 또는 허드슨강 화파들이 새로운 미국의 낭만주의를 일궜다. 바이런은 ‘미국이 힘과 자유 그리고 절도의 표본’이라며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다시 실현되고 있다고 했다. 영국의 지식인들은 미국의 평등사상을 보여주는 인사법인 '악수'를 찬양했다.

1893년 창설된 뉴욕의 미국 국립 음악 원장으로 드보르작이 초빙되었다.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와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를 작곡했다. 미국미술을 대표하는 휘슬러의 걸작 <어머니>의 정식 제목은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이었다. 그 밖에 존 싱어 사전투의 <마담 x의 초상>, 드가의 영향을 받았던 인상주의 화가 메리 카섹의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있다.

한편 러시아는 1855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크림 전쟁의 패배로 급서 하고, 알렉상드르 2세에 의해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1881년에 폭탄 테러로 암살당하면서 러시아 개혁은 없던 일이 돼 버리고 말았다. 귀족이 주도하던 문화 활동은 농노제를 포기한 톨스토이 같은 지식인 층이 넘겨받고 ‘슬라브의 이념과 예술’ 즉 슬라브주의를 내세웠다.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레핀

미술에서는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무소르크스키의 초상>등이 있다. 비잔틴 미술에서 영향받은 이콘을 벗어나 스스로의 색채를 찾아냈다. 음악에서는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민족주의 작곡가들과는 별도로 차이콥스키는 유럽과 러시아 쪽 감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지만 1893년 초연이 있은지 9일 만에 콜레라로 발표된, 그러나 자살이 강하게 의심되는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드보르자크 :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 2악장,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림스키 코르사코프 <세헤라자데> 중 <바다와 신드바드의 이야기>/ 무소르크스키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10번 <키예프의 대문>/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4악장, 교향곡 6번 1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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