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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토지 제1부 2권

by 이용만


청소년 토지 2권에서 저자 박경리는 남도 사투리를 구어체로 구사한다. 양반 상놈은 물론 여염에서 쓰는 말에 속뜻마저 맛깔나게 재현한 것이 놀랍다. 서울 태생이라 표준말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남도 특유의 정서를 이입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1권에 가계도속 주요인물외에도 주변인물들을 통해 대하소설 <토지>의 전개흐름을 탄탄히 암시하는 듯하여 인물 묘사를 기억하려 애쓰게 된다. 돌연 주인공 최치수가 살해됨으로써 실화인지 허구인지 궁금한 가운데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멀리 있어 <토지>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역사적 사건들과 맞물리는 토지의 등장인물을 통해 조선말 시대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묘사가 일품이어서, 젊은 시절 왜 진즉 읽어보지 못했던 가하는 아쉬움이 더해왔다. 청춘을 통째로 실어 달리는 열차에 탄 젊음은 익숙한 우리네 것들보다는 낯선 서양문물에 경도되기에도 바빴다. 하물며 한국문학작품을 읽기보다 허겁지겁 서양西洋을 인지하기에도 정신없지 않았을까. 세계사 속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시야를 넓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뿌리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한국문학의 진수들에 소홀했고 늘그막에 후회하는 꼴이 되었다. K-한류의 위상이 높아지고서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로, 한국의 좋은 문학작품들이 멀리에 있지 않은 것을 또 잊고 살았나 보다.

물질은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의식주의 모양새를 크게 바꾸었으나 인간의 정신세계는 본질에 있어 다를 바 없음이 불가사의하기도 하면서 다행이기도 하다. 소설 속 시대배경 또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떠밀려 변모하더라도 삶과 죽음 사이 애증, 탐욕, 운명의 모습은 반복되고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임을 발견해 내는 일이었다.


제2편 추적과 음모

5장 풋사랑/ 음양의 이치/ 살인교사/ 행패/ 과거의 거울에 비친 풍경/ 섬진강가에 뿌린 눈물/ 황금의 무지개/ 자수당의 정사/ 한 서린 꿈/ 분노의 추적/ 무명번뇌의 뿌리/ 사람사냥/ 탐욕의 밀회/ 초록은 동색/ 대자대비의 품/ 이지러진 달/ 운봉의 명인들/ 22장 그리움의 심연/

제3편 생명의 강, 생명의 불꽃

제1장 작은 춘사/ 여인의 한, 욕망/ 자유를 위한 선택/ 섬진강 나루터/ 선불 맞힌 명포수/ 살해/ 폭풍전야/ 심증/ 9장 발각/

김 훈장이 말했다 “동학은 이 나라의 마지막 힘이었소” 문의원이 답했다. “오합지졸이었지요” 식자들은 그 힘의 용도를 왜 깨닫지 못했을까? “살생과 약탈이었지요. 왜적에게 대항하겠다는 기특한 생각 말고는.” 작가의 속내가 담긴 말이 이어진다. "동학당이 비록 상놈들의 오합지졸이긴 하나, 척왜척양을 내걸고 승패야 어찌 되었든 간에 결판을 내리기라도 했으니 도리어 체모는 상놈들이 지켜 준 셈 아니겠소."

죄를 지었다면 모를까 사람을 보고 피해 가는 것은 우물을 보고 피해 가는 것처럼 그 이상의 모욕이 없다. 기어이 조준구는 평산에게 묻고 말았다. 노여움이 컸기 때문에 묵살할 여유를 잃었던 것이다. 조준구는 마음을 돌이켰지만 한조에 대한 이때의 분한 마음이 후일 잔인한 보복을 낳게 되리라는 것은 조준구 자신도 예측지 못하였다.


세상의 앞면 뒷면을 다 보고 다니는 각설이 떼들은 으레 말 잘하고 익살스러우며 능글맞고 억척스러워, 다투는 만큼 시간이 축갈 뿐이다. 조준구의 말을 듣기 전에 평산이 그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다른 사내를 보아 애를 밴 계집은 남편을 살해했지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요. 지나치게 조상을 숭배하기 때문에 생기는 범죄지요. 무후無後한 것을 대죄라 생각하는 풍습도 달라져야 할 게고…” 평산은 조준구의 말에 심중을 헤아려 보려고 사방에다 촉수를 펴며 더듬고 있었다. 천길 계곡 사이에 걸린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평산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위틈새에 자라는 여윈 소나무에 보다 많은 솔방울이 매달리는 것처럼 그렇게들 많이 나은 자식들 중에 한두 명이라도 남아 절손이 되지 않는다면 다행으로 생각하는 농민들이었다. 마마에 죽고 홍역에 죽고 열병에 죽고, 거적에 말아 산에 갖다 버리면 잊어야 하고 또 잊어진다. 삼신당 앞에 갔을 때 말없이 어둠에 가려진 서로를 지켜본다. 오는 길에 평산이를 만났느냐고 귀녀 쪽에서 먼저 물었다. 칠성이는 만났노라고 대꾸한다.

노루를 수동이 짊어지고 가까운 화전민 막살이로 찾아들었을 때 해는 서산에 떨어지고 있었다. 세수를 하고 일어선 치수는 “앗”하고 소리를 질렀다. 큰 지네 한 마리가 발 밑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한 마리가 또 나올 겁니다." 화전민 아낙이 웃으며 말했다. "한 마리가 또 나와?" 치수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내외간이니까 한 마리를 찾아서 나올 겁니다. 음양의 이치니까요."

최치수가 우관 선사에게 사실을 규명치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은 결정적인 포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끝장을 내기 전에는 그 문제는 괴로운 숙제다. 확증을 회피하고 연곡사를 떠나왔으나 확증을 얻음으로써 구천에 대한 응징이 보다 가혹해질는지 응징을 포기하게 될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변한 게 아니고 본시부터 그런 거 아닙니까. 지체 높은 최참판댁에서도 본시 재물을 모으기로는, 아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닙니까. 숭년에 보리 한 말 주고 뺏은 땅이 새끼를 치고 새끼를 쳐서,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그릇되어 그렇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1895년 왕비 시역에 대한 보복과 단발령의 항거하여 봉기한 의병들의 뜻에 따라 의병 대장에 추대된 의암 유인석은 평민 출신 김백선이 원군을 보내지 않아 패배하게 되자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 들었다 하여 처형되었다.

듣자니까 서울서는 만민 공동회라든가 관민 공동회라든가? 뭐 그런 것이 생겼다 하는데 참의 대신 조병식이 보부상들을 긁어모아서 만든 황국 협회가, 서재필의 독립 협회에서 만든 만민공동회를 쳐 부수려 습격을 했다는 소식이요. 허 그거 참 야릇한 일이오. 한쪽에는 아녀자에서 백정까지 끌어들이고 한쪽에서는 보부상들이니 이거 천민들이 세상을 만났구려. 세상을 만난 게 아니라 반식자半識者와 권력자들의 고깃밥이 된 거지요.

화냥기 있는 년이 편했다가는 볼장 다 본다. 해는 어느덧 서편에서 까뭇거리고 있었다. 추위를 타는 듯 오종종 하니 짚단에 모여 앉았던 참새들도 잠자리를 마련하려고 강가 대숲을 향해 날아간다.

반죽음이 된 귀녀는 이미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닫고 조용했으며 칠성이는 씨 빌려준 죄밖에 없으니 "재수 없다"라고 투덜거렸을 정도였다. 읍내 관아로 죄인들이 옮겨지는 날, 이 기괴한 살인 사건의 죄인들 얼굴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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