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을 그려낸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by 이용만

매봉시니어센터 2025년 10월 인문학 특강

울림을 그려낸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 12. 16 ~ 1944. 12. 13)

일시: 10. 17.(금) 15:00 강사: 정수은

1. 개요

출생: 1866. 12. 16 러시아, 모스크바

사망: 1944. 12. 13 프랑스,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

국적: 러시아→ 프랑스 귀화

주요 작업: 화가, 미술이론가, 현대 추상미술의 창시자.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활동한 화가이자 미술 이론가로, 서양 미술에서 추상미술의 선구자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뒤 서른 살이 되어서야 미술가의 길을 택했고, 색채와 선, 형태를 음악적 어휘처럼 이해하여 회화가 외부 세계의 재현을 넘어 인간의 내면과 정신성에 직접 호소할 수 있음을 일생 동안 탐구했다. 이러한 신념은 그의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1911)와 「점·선·면」 (1926) 같은 이론서로 체계화되었고,무르나우 시절의 '영적 추상'에서 바우하우스기의 '기하학적 추상', 파리 후기의 '생명체적 추상'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사유의 축을 이루었다.

11. 칸딘스키의 생애와 배경

1. 초기 생애와 예술가로의 성장(1866~1910)

칸딘스키의 성장 배경은 문화적 자극이 풍부했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4일 모스크바의 부유한 차 상인인 아버지 바실리 실베스트로비치 칸딘스키와 모스크바의 상류 중산층 출신인 어머니 리디아 이바노브나 티헤이예바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1년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를 따라 칸딘스키의 가족은 흑해 연안의 오데사로 이주했다. 칸딘스키는 이곳에서 고전적인 인문교육을 중시하는 김나지움에서 수학하고 피아노와 첼로, 미술을 배웠다. 그는 일찍부터 색채에 비범한 감응을 보였고, 민족미술과 러시아 정교 전통의 강렬한 색 대비를 직접 경험했다.

1889년 볼로그다 지방으로 떠난 민족지학 조사에서 그는 농가 내부 장식의 선명한 색면과 암색 바탕 위에 놓인 화려한 색채 대비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후 색채의 '자율적 생명력'을 확신하게 된다. 청년기에는 모스크바대에서 법학·경제학을 전공해 부교수로 강의하며 안정된 경력을 쌓았으나, 1895~1996년 경험한 두 사건 - 모네의 <건초더미>에서 받은 충격, 그리고 볼쇼이 극장에서 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 그의 진로를 돌려놓았다. 그는 "그림 속 대상이 지워졌는데도 화면이 강력하게 지속되는 경험"과 "음악이 형식과 서사를 넘어 감정을 직접 고양시키는 경험"을 통해, 회화 역시 구체적 재현 없이 감정과 정신을 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지했다. 결국 1896년 법대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뮌헨으로 유학, 안톤 아즈베의 사립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뮌헨미술아카데미에서 프란츠 폰 슈투크에게 사사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III. 추상의 탄생과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뮌헨과 무르나우 시기는 칸딘스키가 '영적 추상'의 어휘를 다져가는 단계였다. 그는 팔랑크스 협회를 결성해 전시와 교육을 병행하고, 그의 제자이자 여류화가 가브리엘레 윈터와 연인으로 발전하여 함께 남독일과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색채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무르나우에 정착한 뒤에는 야수파적 강렬한 색면과 표현주의적 붓질을 바탕으로 풍경과 러시아 민속 모티프를 재구성했는데, <푸른 기수>(1903), <푸른산>(1908-09)에서는 형태의 세부가 단순화되고 색채의 리듬이 화면을 주도했다.

1909년 칸딘스키는 뮌헨 신예술가협회(NKVM)를 이끌며 대담한 전시를 시도했고, 1911년에는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를 결성해 예술의 영성, 색채의 정서성, 다학제적 접근을 옹호했다. 이 시기 칸딘스키는 '인상 (Impression) - 즉흥 (Improvisation) 구성 (Composition)'이라는 이름 체계를 통해 작업을 발전시키는데, 즉흥은 내적 충동의 폭발을, 구성은 그 충동을 음악처럼 조직화하는 작곡 행위를 뜻한다. 1913년의 걸작 <구성 VII>은 성서적 암시들이 화면의 심층에서 진동하면서도 서사로 고정되지 않고, 색면과 선, 리듬의 격렬한 교향악으로 승화되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회화는 특정 대상을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상승과 이완, 현의 울림과 타악의 강세 같은 음악적 체험을 유발하는 매체가 된다.

IV. 러시아와 독일 바우하우스 시기

1. 러시아 귀환기(1914~1921)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칸딘스키는 1914년 독일을 떠나 스위스를 거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러시아 시기(1914-1921) 그는 혁명기의 문화 행정과 교육 개혁에 관여하고, 미술 교육의 기초 커리큘럼을 설계하는 등 제도적 차원의 기여를 남겼다. 동시에 그는 구성주의와 절대주의가 요구하는 재료 분석·구축의 태도와 일정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칸딘스키에게 형태는 내용없는 외피가 아니라 영적 울림을 담는 그릇이어야 했고, 비이성적 · 직관적 충동은 창작의 핵심 원동력이었다. 그는 “내용이 없는 형태는 공기로 가득한 빈 장갑”이라는 메타포로 순수 형식주의를 비판했으며, 자신의 추상은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과 공명하는 또 하나의실제성'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의 이념적 압박과 예술적 고립은 그를 다시 서유럽으로 이끌었고, 1922년 발터 그로피우스의 초청으로 독일의 바우하우스 교수로 임명되었다.

2. 바우하우스 시절(1922~1933)

바우하우스 시기(1922-1933)는 칸딘스키 예술의 두 번째 전성기다. 그는 회화의 기본 단위를 '점·선·면'으로 분석하고, 원·삼각형 · 사각형과 삼원색의 상관구조, 시각적 리듬과 긴장, 균형의 법칙을 체계화했다. 이 성찰은 1926년 「점·선·면」으로 정리되며, 교육과 창작이 상호 피드백되는 독특한 생산성을 낳았다. <구성 VII>(1923)은 냉정한 팔레트와 기하학적 요소들의 정밀한 배치가 만들어내는 지적 긴장을 보여주었고, <노랑-빨강-파랑>(1925)은 화면 왼쪽의 유기적 자유 영역과 오른쪽의 기하학적·구조 영역이 대위법적으로 호응하며 하나의 화성을 구축했다.

바흐의 푸가를 듣는 듯 반복과 변주, 응답과 전개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칸딘스키에게 원은 '완전함'의 감각적 상징이었고, 화면 위원들의 크기 · 간격·중첩은 화성의 음정관계처럼 시지각적 울림을 만들었다. 이 시기 그는 벽화, 무대, 그래픽, 에어브러시등 매체 실험에도 적극적이었으며, 파울 클레 리오넬 파이닝거 등과 '청 4인조'를 결성해 강연과 전시로 추상의 보편 문법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쇄되면서 그는 다시 프랑스 망명길에 오른다.

Ⅴ. 프랑스 파리 시절과 후기

파리 시기(1933-1944)의 칸딘스키는 전기와는 다른, 유기적이고 생명체적인 추상을 전개했다. 뇌이쉬르센의 작업실에서 그는 장 아르프, 호안 미로 등과 교유하면서 원색 대비의 강렬함을 누그러뜨리고 섬세한 색조의 뉘앙스를 탐색했다. <구성>(1939)에서는 검은 배경 위로 별, 세포, 미생물 같은 형상들이 중력에서 풀려난 듯 부유하며 우주의 심연과 생명의 약동을 동시에 암시한다. <하늘색>(1940)은 부드러운 톤의 공간 속에 기호와 표식들이 가볍게 떠오르며, 화면 전체가 포르테가 아닌 피아니시시모의 숨으로 호흡한다. 전쟁과 물자 부족 속에서도 그는 작은 판지에 구아슈로 작업을 이어갔고, 생의 마지막까지 “추상은 자연의 이웃 세계”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예술 세계'는 자연의 세계와 병치되는 또 하나의 현실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추상 미술'보다 '구체(具體) 미술'이라는 말을 선호했다.

칸딘스키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정신성'과 '내적 필연성'이다. 그는 예술의 목적을 감각적 쾌락이나 현실의 모사에 두지 않고, 음악처럼 영혼에 직접 진동을 일으키는 데 두었다. 색채와 형태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기호가 아니라, 울림을 매개하는 음표이자 호흡이다. 그가 남긴 유명한 비유 “색은 건반이고, 눈은 화음이며, 영혼은 여러 현을 가진 피아노, 예술가는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기 위해 건반을 누르는 손"—은 시각과 청각의 경계를 넘는 공감각적 체험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노랑은 트럼펫처럼 밝고 전진하는 음색, 파랑은 첼로처럼 깊고 침잠하는 울림, 빨강은 타악의 강한 박동, 초록은 바이올린의 균형감과 같은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러한 감각의 대응 관계를 절대적 규칙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나, 회화를 음악처럼

작곡하는 사유의 토대로 삼았다. 청기사파 시기의 <구성 VII>에서 우리는 말러의 거대한 합주를, 바우하우스기의 <노랑-빨강-파랑>에서는 바흐 푸가의 치밀한 대위적 구조를, 파리 후기의 <하늘색>과 <구성 X>에서는 드뷔시적 여백과 우주적 서정을 연상하게 된다. 칸딘스키의 '총체예술' 개념은 음악·문학·무대·색채가 서로를 번역하고 진동시키는 예술 간 상호 전달의 실험이었다.

대표작을 통해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푸른 기수>와 <푸른산>은 야수파의 평면화, 러시아민속 색채, 표현주의적 필치가 결합해 구상 요소를 압축하고 색과 리듬의 주도권을 강화한다. <구성 VII>은 즉흥과 구성이 교차하며 화면을 교향악적으로 고조시키고, <구성 VIII>은 기하학적 요소와 냉정한 팔레트로 보편적 문법을 구축한다. <노랑-빨강-파랑>은 유기와 기하의 양극이 한 화면에서 긴장과 화합을 이룬 사례로, 칸딘스키의 이론이 회화적 언어로 실현된 전범이다.

후기의 <구성 X>와 <하늘>은 유기체적 기호, 부유하는 표식, 미세한 색조의 떨림으로 우주. 생명의 감수성을 시적으로 제시한다. 여기에 1929년작 <상승 Upward(Empor)> 같은 작품은 원호·절단면·수직축의 응집으로 '상승'의 에너지를 형식 자체에서 도출해내며, 제목의 첫 글자 (E)를 연상시키는 표식이 화면 곳곳에서 장난스럽게 반향하는 점도 주목된다. 직관이 먼저 형상을 선택하고, 그 형상이 다시 자연의 상응물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작업 방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칸딘스키의 유산은 회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바우하우스에서 정립된 기초조형과 색채 이론, 시각 리듬의 문법은 20세기 중반 이후 그래픽, 건축, 산업디자인, 정보 시각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점·선·면의 구조화, 기본형과 삼원색의 대비, 공간을 질서 있게 계획하고 구성하기 위해 격자 형태로 배치하는 그리드(Grid) 사고, '필요한 만큼의 형식'이라는 태도는 국제주의 디자인과 현대 시각문화의 표준으로 확산되었다. 동시에 그의 예술은 위기의 시대에 예술이 무엇으로 위로하고 각성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재현의 해체는 세계와의 단절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질서와 울림'을 가시화하는 확장이었다. 그래서 칸딘스키의 추상은 차가운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의 불안과 물질주의에 맞선 정신의 작곡이었다.

1944년 12월, 파리 인근 뇌이쉬르센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칸딘스키는 끝없이 형태의 언어를 정련하며, 추상이 자연의 이웃 세계라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했다. 그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뉴욕 구겐하임, 모마, 파리 퐁피두센터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상설기획전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대중들과 만난다. 관람자들은 그의 화면 앞에서 여전히 '눈으로 듣는' 체험을 하며, 색과 선, 점과 면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악곡을 각자의 감각으로 연주한다. 칸딘스키의 회화는 그래서 하나의 작품이자 하나의 악보이며, 채워지지 않은 어떤 합주의 여백으로 오늘의 우리를 초대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