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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당3, 다단계냐고?

by 이용만

8시 25분 그리 넓지 않은 사암당 현관에서 정문을 열자 80여 명이 물밀듯 입장한다. 이미 새벽부터 받아놓은 순번대로 줄을 만든다. 대기번호를 묻고 확인하는 과정이라 어수선하지만 일사천리다. 처음 오신 분은 빠른 번호 받으러 새벽 2시 도착했다는 데 놀란만도 하다. 지나가던 행인이던 때 노인들 모여 있는 것에 다단계 회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면 그렇게 보일만했다. 지금 다시 떠올리니 웃긴다, 침을 놓는 다단계? 각자 새벽부터 받은 대기 순번을 카톡등 어딘가에 기록해 두었다. 잊지 않기 위함이다.

...어떻게 증명하지요? 앞사람이 알고 뒷사람이 알지요. ... 이래서야 되겠냐? 라며 노기를 참기 힘든다. 원장에게 건의해야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모두들 침묵한다. 나도 물끄러미 쳐다본다. 모르는 척하며 "건의 좀 하세요"라며 노련한 노인 누군가 한마디 툭 던진다. 한 번씩 모두 겪어본 일이기에 이 방법이 합리적이더라고 설명할 자신이 없다. 차라리 차차 겪으며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다녀보면 안다. 속 진료에 참여하려는 욕망의 크기가 이것저것 가능하게 만든다. 시행착오 끝에 정착된 검증된 시스템이다.

신줏단지처럼 여기고 있어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못 낸다. 소문 듣고 진료 오신 분들은 조금씩 화가 난다. 도대체 내 앞에 대기자가 최소 70여 명이라니? 직장동료의 부인은 "도곡동, 이 좋은 동네를 무슨 '빌어먹는 것처럼' 줄을 서게 하는 게 말이 되냐"라고 사암당에 항의했다. 그녀는 다시는 이곳 한의원에 오는 일이 없다. 디지털 시대에 이럴 수 있느냐고? 도대체 무엇이 노인들의 이런 행동을 이끄는가? 노인복지를 포함하여 사회정책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크다고 본다.

가방을 침방 좌석에 먼저 던져놓고 차트 호명을 받으러 간 사람이 있었나 보다. 차트를 받아 들고 온 사람은 빈 좌석 앞에 놓인 가방을 발로 밀어 치워 놓는다. '자리 잡아 놓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웅성거리며 작은 소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꼭 원하는 한의사에게 맞아야 할 이유는 많을 것이다. 무색해져 돌아간 가방 주인이 딱해 보인다. 이곳 한의원에 다니는 노인들의 오랜 규칙과 질서를 모르는 신입의 잔머리 해프닝일 뿐이다.

한의사들 외에 남자직원은 없다. 노인들의 화를 돋우거나 가라앉히는 방식은 의외로 간단한 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해결은 여성들이 잘 해낸다. 사무행정 여직원 중에는 새치기는 물론 노인들 사이에 잘 알지 못해 일어나는 사소한 분쟁에 대처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관찰한다. 지각도착하면 인정사정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기강은 군대처럼 날이 저절로 서있다. 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다 쳐도 뒷분들의 시선에 압도된다. 한발 더 나가면 불호령을 듣기 십상이다.

대답도 반응도 굼뜬 노인들을 대신하여 여직원들끼리 복창하면 큰소리로 응답해 주어 상황을 인지할 수 있게 돕는다. 이를테면 "6번 침방 차트 놓습니다." 다 같이 "네~", "대기자 호명합니다." 또 다 같이 "네~", "3번 침방 F입니다.(Full 줄임말로 좌석이 다 채워졌다는 뜻)", "다음 호명은 10시에 합니다." "네~" 아마 유치원보모들을 직원으로 채용했는지 노하우를 습득한 것인지 시스템중 제일 감탄하는 지점이다. 노인들끼리 잘할 거라는 믿음이 바탕에 있다.

예약된 사람은 도착 접수를 한다. 하지만 아침 이른 시간에 원하는 한의사에게 진료받기 위해서는 선착순으로 마감되기도 한다. 다음 진료를 예약할 때에 예약일자와 시간은 정해지지만 한의사를 지정하지는 않게끔 되어있다. 낯선 방식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진료과목에 따라 구분되는 일반 병원 예약 접수와는 매우 다른 시스템적인 특성이다. 한의사는 모든 질병을 다루고 있어서 8번 방까지 8명의 한의사의 진료과목별 차이점은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젠가 한의사도 관절, 소화, 섭식과 배출 체질등 전문분야로 분화될 것 같다.

예약 안된 환자분도 대기호명으로 받아 든 차트를 직접 침방 빈좌석을 찾아 들어가 진료를 받는 식이다.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의 관찰과 지인의 안내라도 받아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해가 되고 적응하다 보면 질서 있고 합리적임을 알게 된다. 오히려 노인들도 사무직원들도 서로 편하게 마주하는 것이 기적 같다. 한국 노인들의 건강을 지키는 방식으로 K-한류의 확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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