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모처럼 연극을 보러 온 거다. 톨스토이 단편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책으로 읽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연극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우리 동네에 붙은 연극 플래카드 광고가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는 대학 다니던 때 연극하면 떠올리던 곳이 주로 동숭동이었기 때문이다. 연극 주제로 보더라도 색소폰 발표때와 분위기가 다르다. 3만 원 티켓, 강남문화재단이 후원하니 예산걱정 없이 치를 수는 있을 것 같다. 젊은이들의 철학을 만나보고 싶다. 청년예술 지원하는 셈으로 쳐도 좋다.
연극배우를 업으로 선택한 청년들은 배역과 같은 삶을 살아볼 수 있으리라. 대사 외우기는 물론 동료들의 대사와 연기까지 암기할 정도는 이미 되었을 터이다. 연습과 리허설로 무대에 올리고 연극이 끝난 후에도 자신이 열연한 캐릭터를 한동안 동일시하지 않을까? 동네 주민센터에 서류를 떼러 가거나 영어수업도 있고 한 동안은 <토지>를 빌려 읽으려 찾기도 했다. 주민센터 4,5층은 영화관처럼 계단식 '오유아트홀'이다. 지인의 색소폰공연으로, 재건축 총회장소로도 대여섯 번이나 동네분들과 자주 만나던 곳이다. 예비군 소집교육 에서 부터 공연 세미나 콘서트등 다목적 홀이다. 이제는 꽤 친숙한 곳이다.
연극 배우는 몰입하기 위해서도 다각도로 톨스토이를 연구할 것이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며 관객과 교감함으로써 원작의 메시지를 소화한다. 노인이 되어서야 천착하게 되는 주제를 젊은 청춘들은 어찌 그리 신통하게 연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내 방식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어리숙한 노인티를 벗어나지 못해 고민하는 중에 무대 앞자리에 자리 잡았다. 연극을 보고는 배우들의 연기와 전달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여 큰 도움이 되었다. 성서의 교리로 읽히던 글이 책에서보다 잘 이해되었다. 어학교재로 보급된 영국문화원의 축약본만 읽으며 내용보다 영어표현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지난 시기가 살짝 부끄러웠다. 영어공부에 도움을 얻으려 읽었던 영어단편집으로부터 이번 공연을 관심 갖게 된 거다. 배우의 현대적 언어와 몸짓 속에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의 부대끼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톨스토이의 원작을 충실히 살린 연극이었음을 알았다. 연극 한 편 보고 든 생각이다.
톨스토이에 감동하고 다시 책으로 읽어야겠다고 도서관에서 톨스토이 단편선을 빌려왔다. 유튜브에는 단편을 요약해설한 것도 읽고 유튜버 '루나 펄스'님이 읽어주는 것도 있었다. 다른 번역본이었지만 양재천을 걸으며 그녀의 낭독으로 들었다. 강승현 번역의 책을 이어 읽었다. 번역자에 따라 표현이 미세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작이 다시 재창조되는 것을 애석해할 것도 아니다. 프랑켄슈타인 영화를 보았을 때 결말이 원작과 정반대로 결말짓는 행태는 인어공주 논란 때에도 그랬다. 영어로 된 축약본부터 연극까지 보고 낭독과 독서도 마쳤으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영화를 찾아볼까 싶을 정도였다.
러시아농부의 빈한한 삶을 표현하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낡은 코트 한 벌은 부부가 번갈아 입고 외출한다. 아내의 내의도 입고 나가야 할 만큼 러시아의 추위와 농부의 삶이 실감 난다. 귀족출신 톨스토이가 일부러 그러한 표현을 살렸을 거라는 AI평론도 있다. 어떻든간에 성서를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놀랍다 못해 질투심도 커지는 것 같다. 민간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설화를 바탕으로 톨스토이가 민담의 형식을 빌어 쓴 것이라고. 톨스토이만의 독창적인 작업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역자의 후기를 통해서 알았다. 그 민담에서 길어 올린 대문호 톨스토이에 대한 경외심이 졸지에 러시아 민중에게로 향했다. 러시아의 문학예술과 발레와 건축물은 아름다운 추억 속에 있는데, 왜 볼셰비키 이후 정치체제는 자유세계의 공적(公敵)이 되었는가?
천사 미하일의 깨달음처럼 '인간에게는 없는 예지력'이 아쉬웠다. 필부들의 시기와 질투심이 줄어 안도할 만큼 톨스토이의 문학은 묵직한 깨달음을 얻게 한다. 벌거벗고 벌 받는 천사라니 설정이 기발하다. 미하일이 깨달은 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사람 안에 엄연하고 그곳이 하늘나라였다. 내 안의 삼위일체와 성체성사를 조금 더 잘 알아듣게 되었다. 무엇보다 천사들도 교육받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훈육하는 하느님이신 것도 새로 알았다. 예수님 없는 지구는 얼마나 삭막했을까? 구약의 선지자들은 삭막함을 일깨우려 예언을 할 수 있었나 보다. 우리 동네 구석까지 들고 온 젊은 청년들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처럼 현대인들을 일깨워준 톨스토이에게 재삼 감사하다. 늦은 나이에라도 삶과 인간에 대한 탐구와 연기를 볼 수 있어 은총으로 여긴다.
금년 하반기는 투병과정에서 죽음에 대해 진지해진 변곡의 시기였다. 아내와 주변의 말에 순종하며 신앙을 체험하고 성서 말씀의 폭과 깊이가 확장되었다. 나날의 새벽미사에 복음 말씀을 기다릴 만큼 변화되어 스스로 은총이라 여기고 있다. 가족들 또한 그렇게 느낀다. 그들의 실망을 상상할 수조차 없으므로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이제 생활의 주제로 되었다. 성지순례를 비롯 성무일도 같은 신심 깊은 활동도 익히고 십자가의 길도 외우며 위령기도를 잊지 않는다. 변화는 한꺼번에 온다. 제일 어려운 기도는 식사 후 기도이다. 식전빵처럼 식사 전 기도는 빈 속이 갈망하나, 식후에는 기도문이 외워지지 않는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의 마음처럼 배고픔도 그렇다. 그래서인가 식후기도를 제대로 바치는 분들은 아내를 비롯, 신심이 대단한 무서운 분들이다. 속마음이 말하기를 "감사 제대로 해봐. 일부러 어렵게 만든 까닭이 있겠지". 일단 부끄럽지 않도록 식후기도는 반드시 외우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아멘.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받으소서. 모든 죽은 이의=>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아멘 =>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천사 미하일은 하느님의 벌을 받고 인간으로 살도록 벌거숭이로 들판에 떨어졌다. 쥐뿔도 모르고 하느님 명령을 거역하다니... 하느님의 '인간에 관한 3가지 질문'에 답해야 천사 미하일은 다시 천국에 들 수 있다. 첫 해는 구두장이의 아내를 보고 지은 첫 번째 미소가 답이 되었다. 두 번째 미소는 인간에게는 미래를 아는 일이란 허락되지 않는 것임을 안 때였다. 구두를 주문하고 돌아가던 길에 죽은 로마노프공작을 통해 안다. 그날 공작의 어깨너머 미하일의 동료였던 죽음의 천사를 보았다. 공작의 배역에 걸맞고 키가 컸던 배우가 맡았다. 평생 신을 튼튼한 장화를 주문하며 기고만장해야 한다. 미하일이 장화주문을 맡으라고 세몬에게 말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죽음의 천사가 목숨을 거두어 갈 것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건장했다. 엄청 키 크고 건장한 그 배우도 아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 것 같다. 자신이 실감 나게 연기한 '로마노프 배역'을 잊지 않는 한 죽음에 대해 겸손함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또 6년의 세윌동안 미하일은 웃는 일도 없고 묵묵히 구두만 만든다. 어느 눈 내리던 날 창문 너머 벌판을 뚫어져라 내다보고 있다. 똑같이 생긴 두 여자아이 둘과 아주머니가 신발을 맞추러 왔다. 7년 전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여 벌을 받았던 일, 갓 태어난 쌍둥이를 두고 엄마를 거두어야 했던 그 기억이다. 부모 잃은 쌍둥이 아이들을 키운 것은 사랑임을 깨닫는다. 미하일이 결국 하느님의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얻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내재해 있으며 미래를 볼 수 없음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없거나 잃은 줄 알고, 제 계획으로만 살다가 남을 위해 살지 못하고 죽는 게 대다수 인간이다. 세 번의 깨달음 때마다 천사는 미소를 짓고 결국 하느님의 질문에 답한 셈이 되었다.
천사에게는 원래 남녀 구별이 없다고 들은 바 있지만 연출의도가 적절했다. 미하일천사는 하얀 얼굴과 작은 키의 여성이 맡았다. 책을 읽는 내내 젊은이로 등장하는 천사는 남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청년들의 연기력도 뛰어났지만 주제를 명쾌하게 풀어 이해시키는 친절함이 좋았다. 연극은 영화나 뮤지컬 보다 더 디테일에 강한 장점이 돋보였다. 얼마 전 강남 50년을 기념하는 양재천 수변쉼터의 오픈, 네 명의 청년 조각가의 전시회등 내실 있는 예술행사 기획에 "우리 동네, 좋은 동네"하며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https://youtu.be/Y3Yn1FG7IXM?si=kd2qZW2JwLcHvC19
https://youtu.be/mBEMGeGPvE0?si=1kMspybOMGqJRH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