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90주년
브뤼기에르 주교
1.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 산맥에서 멀지 않은 지중해변 나르본 읍 근처 레삭 마을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15년 12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고 모교인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며 교구 사제로 지내다가 아시아 선교를 갈망해 1825년 9월 17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1826년 6월, 태국 방콕으로 와서 연로한 교구장 플로랑 주교를 보필했다. 그러던 중 25년간 사제를 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조선 교우들의 요청에 5가지 이유를 내세워서 거절하는 파리 외방전교회 회람문을 접하고 1829년 5월 19일 본부에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제가 가겠습니다.” 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해 6월 29일 태국 보좌 주교(갑사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였다.
1832년 조선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 그다음 주인 8월 4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 목적지인 조선으로 가기 위해 싱가포르행 배를 탔다. 그리고 2년에 걸쳐 갖은 고생을 다하며 중국 하북성 서만자에 도착했다. 2년 동안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질, 열병, 피부병과 중국 관리에게 발각되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힘내자. 오늘은 죽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뎌 나갔다(여행기 9장).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인 라자로회 회원인 고 신부, 왕 요셉 등과 함께 봉황성을 향해 서만자를 떠났다. 장장 2천 리! 모방 신부는 서만자에 남아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고 샤스탕 신부는 산둥 반도에서 역시 희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10월 19일 마가자 교우촌에 무사히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저녁 식사 후 갑자기 발병해 다음 날 곽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홀연히 선종했다. 당시 나이 43세. 1832년 페낭에서 출발하여 1835년 10월 20일 마가자까지 3년이 넘는 험난한 여행을 감행하다가 건강을 잃었던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최양업 신부(1821~1861년)를 떠오르게 하는 힘들고 장한 순직이었다.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고를 받고 서둘러 마가자로 가서 그해 11월 21일 마가지 성당 묘지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을 안장했다. 이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한 해인) 1931년 10월 15일 조선 교구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을 마가자에서 용산 성직자 묘소로 이장하였다.
2.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품
브뤼기에르 주교의 오랜 친구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키가 평균보다 작고, 몸은 약간 가늘며, 금발에 얼굴은 적동색이었다. 그의 의지가 너무도 강하고 독립심이 대단하여 어떤 장상이 이르기를 브뤼기에르 신부가 주교가 된다면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가 뭐라든, 나는 전진하리라'라는 사목표어를 택할 것이다.”라고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신심과 집념이 대단해 마치 사냥개를 연상시킨다. 한번 조선을 알고부터는 오매불망 조선에 가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렇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8월 4일 페낭에서 싱가포르행 배를 타면서 이미 자신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었다. "나는 페낭을 떠나면서 내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습니다."(여행기 10장) 마치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로마 4,18) 아브라함을 연상시킨다. 아울러 시나이 반도와 모압 땅을 40년간 헤매다가 끝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를 떠오르게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와 서한집에는 그의 치밀한 논리와 관찰력이 돋보이고, 빚지고는 못 사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품이 엿보인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예리한 선견지명으로 약속의 땅 조선에 못 들어가고 죽더라도 조선 교회가 사멸하지 않도록 몇 가지 조처를 취했다.
첫째, 1833년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교구를 맡게 한 점이다. 그리하여 여러 번의 박해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 조선에 들어왔다.
둘째,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신부 등 탁월한 세 선교사를 발탁해 조선 선교를 맡겼다. 세 분은 모두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훗날 시성되신 분들이다.
셋째, 브뤼기에르 주교의 노력으로 1838년 신설된 만주 요동 교구를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맡음으로써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3.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사업의 의의
우리는 위대한 신앙 선조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철저한 신심과 끈기, 사리 분명한 처신, 선견지명을 현양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의 철저한 천주 신앙과 예수 고난에 동참하는 희생정신을 되새겨 교회 공동체와 한국 사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해야 할 것이다.
첫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로 이어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연결 고리면서도 아무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한 부분이 있다면 조선 교구의 초대 교구장이신 브뤼기에르 주교이다. 만약 브뤼기에르 주교가 없었다면 조선 교구의 설립은 한참 뒤로 미뤄졌을 것이며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 성 앵베르 주교뿐 아니라, 성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도 없었을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 자체가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을 떠올리게 하는 '선교 정신' 그 자체이다.
우리는 자주 '선교'라고 말은 하면서도 조금 힘들면 '선교'가 불가능한 수백 가지 이유를 생각해 내곤 한다. 190년 전 누가 조선 선교가 가능하다고 했나? 파리 외방전교회가 처음에는 다섯 가지, 나중에는 열두 가지 이유를 들어 조선 전교의 불가능함을 토로하였을 때 브뤼기에르 주교는 기꺼이 자청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하나 반박하였다.
"이런 위험한 사업을 맡을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합니다.”
"그럼, 불가능을 시도해 봐야지요."
"알려진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길을 하나 만들어야지요."
“아무도 주교님을 따라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두고 봐야지요."
불가능을 시도하는 것,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드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며 오늘날 온실 속의 화초로 변해 가고 있는 우리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신앙 정신이다.
조선 대목구의 탄생 과정
1. 조선 대목구代牧區)의 설정 경위
1824년 혹은 1825년에 유진길 등은 교황께 성직자 파견 요청 서한을 올린다. 1825년 이 서한은 마카오의 포교성성 대표부를 경유하여 1827년 교황청에 도착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레오 12세 교황은 청원서를 읽고 포교성성 장관인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대책을 강구하도록 주문한다. 추기경은 마카오에 있던 포교성성 (대표부)의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 교회를 독자적으로 담당할 선교회를 물색한다. 처음에는 예수회를 생각하였지만 예수회는 여력이 부족했기에 그곳과의 교섭은 실패하고 다른 곳을 물색한다. 이윽고 1827년 9월 포교성성은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서한을 보내어 조선 전교지를 맡아 줄 것을 의뢰한다. 하지만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인 랑글루아 신부는 조선 전교지를 맡는 일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현재 관할하고 있는 전교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전교지에서 활동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선교사들을 충당할 수 있는가?
둘째, 여행 비용과 선교 사업에 필요한 비용 등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
셋째, 선교사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넷째, 새로 감당해야 하는 이 임무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선교지의 여러 기관(전교회의 대목구, 마카오 대표부, 페낭 신학교 등)에서 활동하는 장상들이 동의할 것인가?
랑글루아 신부의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지만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는 다수결로 주요 사안들을 의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회원들에게 포교성성의 제안을 알리는 공동 서한을 발송한다. 샴 대목구의 선교사로 활동하던 브뤼기에르 신부는 공동 서한을 접하고 사명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많은 장상들과 회원들은 브뤼기에르 신부와는 달리 조선 선교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주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1829년 5월 19일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 신학교 장상들과 각지의 회원들에게 보내는 서한(2014년에 원본 발견)을 작성한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장상들과 회원들의 반대 이유를 반박하며 조선 교회를 버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 서한 덕분에 조선 교회의 운명은 기사회생의 길을 걷게 된다.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기금이 없다. 내일 닥칠 일을 너무 걱정하여 섭리를 모욕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라. 주님께서 새로운 재원을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둘째, 우리는 선교사가 없다. <교훈이 되는 서한집> 中 조선 항목이 들어 있는 기사들을 모두 인쇄하고 조선의 신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교황 성하께 올린 편지들을 첨부하면 된다.
셋째, 다른 전교지에도 부족한 것들이 많다. 도움이 필요한 곳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경우만큼 절박하지는 않다.
넷째, 조선을 들어가기가 힘들다. -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해도 시도해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하지 않다.
다섯째, 이런 위험한 사업을 기꺼이 맡고자 하는 신부가 없다면 내가 하겠다.
1830년 11월 30일 비오 8세 교황이 선종하고 1831년 2월 2일 포교성성의 장관이던 카펠라리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가 그레고리오 16세이다. 1831년 7월 4일 카펠라리 추기경의 뒤를 이어 포교성성의 새 장관으로 임명된 페디치니 추기경은 중국과 인도 지역의 교회와 관련된 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청원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결정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브뤼기에르 주교의 청원을 허락한다.
둘째, 샴 대목구장에게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떠날 경우에 새로운 부주교를 서품 할 권한을 부여한다.
셋째, 조선을 북경 교구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한다. 단, 이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을 시에 발효된다.
넷째, 새로 설정된 조선 대목구를 관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 '포교성성의 직할로 남겨둘 것인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서 충분히 안전하게 체류할 때까지 연기한다.
다섯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을 입국하기 전에 그에 따른 준비를 위해 중국인 신학생을 먼저 파견한다.
1831년 9월 9일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두 개의 소칙서를 발표한다. 하나는 조선 대목구 설정에 관한 내용이고 둘째는 조선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앞서 언급된 회의와 내용이 조금 다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 연구 중이다. 이렇게 조선 대목구는 설정되었고 이에 대해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이제 교황청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 방침이 바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선 대목구 설정을 통해 정치적인 입장은 배제하고 오직 신앙적인 관점에만 입각한 통일적 선교정책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책이 변경된 데는 조선 신자들의 열성적인 청원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헌신적인 태도가 큰 역할을 한다.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라는 정치적인 장치를 약화시키면서 조선교회가 보편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황청이 아시아선교를 순수한 복음 선포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2.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대한 난관
브뤼기에르 주교는 샴 대목구에 소속된 페낭 신학교에서 교황청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가 1832년 7월 25일 조선 대목구 설정과 대목구장 임명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8월 4일 조선을 향해 페낭을 출항하였다. 그러나 1832년 10월 18일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의 움피에레스 신부를 만나게 되고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된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마카오의 극동 대표부로 서한을 보내어 브뤼기에르 주교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황청이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지만 이것은 주교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일 뿐 파리 외방전교회에게 조선 전교지를 맡길 의향이 없다고 판단된다.
둘째, 조선 전교지 문제는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가 알아서 할 일이고 파리 외방전교회와는 무관하다.
셋째, 통킹과 코친차이나 그리고 사천 대목구의 주교들은 조선 문제에 관하여 부정적인 입장이다.
넷째, 파리 외방전교회가 나서는 것에 대해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라 판단된다.
이에 대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오해를 풀고자 해명을 하게 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주변의 주교들과 제대로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포교성성에 청원서를 낸 일에 대해 사과한다.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를 탈퇴하여 개인적으로 조선 선교사가 되려는 의향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둘째, 파리 외방전교회가 나서서 조선 전교지를 맡겠다는 의사를 포교성성에 밝혀 주기를 간청한다.
셋째, 포교성성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에게 조선 선교지를 맡아 줄 것을 다시 요청해 주길 바란다.
처음에는 주저하였던 파리 외방전교회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해명과 간청으로 인해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833년 9월 “이제는 주저할 이유가 없고, 모든 회원들이 조선 전교지를 맡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를 전담하여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은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조선 대목구 설정이 무산될 위기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 위기의 원인은 바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한 이후'에 조선 대목구가 설정된다는 조항 때문이다. 이 조항을 빌미로 남경 교구장이자 북경 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가 조선 선교지에 대한 재치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방해함으로써 북경 교구 안에 속한 조선을 독립 관구로 분리시키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해가 있었는데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남경·북경 교구 관할 지역에서 조선 선교사들이 성무 집행을 할 수 없도록 하였고 요동 지역의 교우촌에는 프랑스 선교사에게 숙소를 제공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남경 주교의 명을 받은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방해하였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의 조치를 취한다.
첫째, 요동 지역도 북경 교구에서 독립시켜 조선 대목구 관할지로 지정해 달라고 교황청에 청원한다. 그리하여 요동 지역은 1838년 독립되어 만주 대목구로 설정된다. 이것은 조선 대목구 선교사들이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 없이 용이하게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둘째,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부터 받은 <조선 대목구장 권한집>에 는 "대목구장은 자신이 죽는 경우에 타 대목구에서 근무하는 유럽인 사제들 중 한 사제에게 자신의 특별 권한을 위임할 수 있다."라는 항목이 있다. 이를 근거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후임자를 정해놓는데 바로 사천 대목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앵베르 신부이다. 그리하여 앵베르 신부는 1836년 4월 26일 포교성성의 교서를 통해 주교로 임명되면서 조선 대목구 부주교가 된다.
셋째, 사천 대목구장으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허락받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를 총대리로 임명한다. 이를 통해 조선 대목구장에게 부여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위임한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1836년 1월 12일에는 모방 신부, 그리고 1837년 12월 18일에는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인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다. 이로써 북경 교구에서 독립된 조선 대목구 설정의 단서 조항은 모두 해결되었다. 1)
1) 사실상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소칙서에 보면 조선대목구 설정에 대한 확정을 명시한다. 곧 1831년이 조선대목구의 설정 년도이다. 다만 포교성성 추기경들의 권위를 존중하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무효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효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는 단서 조항과 당시에는 교황교서의 전파가 빠르지 못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그 이후 여정이 계속 어려웠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용산 성직자묘지는 해발 30M 용산에서 남쪽으로 새남터 성지와 동쪽으로 당고개 성지까지 바라보는 자리에 한강 뷰도 아름다웠을 곳이다. 71분의 묘지는 번호까지 정리되어 묘소가 관리되고 있지만, 묘지조차 알 수 없는 12분의 신부님은 6.25 직후 9.28 수복까지 시기에 납치 후 피살로 추정되거나 생매장되었다는 기록만으로 남아있었다. AI로 검색해서 대조해 본다(Perplexity).
6·25 전쟁 직후 북한 정치보위부(당시 인민군 정치보위국 포함)는 남한의 가톨릭 및 개신교 성직자들을 “반동 세력”으로 규정하여 집단적으로 납치·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전쟁 범죄가 아니라 이념적·체제적 숙청 정책의 일환이었다.
납치·살해의 이유
북한 정권은 종교를 “제국주의 잔재”, **“반공·반체제 사상의 근원지”**로 보았다. 기독교와 천주교 성직자들이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김일성 정권은 그들을 체제 위협 요소로 간주하였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정치보위부는 “반동 세력 제거 후 퇴각하라”는 지침을 내려 전국적으로 종교인 숙청을 시행하였다. 당시 인민군 장교들은 체포된 종교인들에게 “우리는 너희 같은 종교인은 필요 없다. 너희는 기생충이다”라고 모욕하며 살해했던 사례도 기록돼 있다. 피해의 규모종교인 납치·학살 규모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 1,026명, 천주교인 119명 등 총 1,145명 희생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연구소, 진실화해위원회 의뢰 보고서). 가톨릭 한국인 성직자 52명(신부 40명, 수녀 7명, 신학생 4명 등)과 외국인 98명 포함, 약 150명 순교(한국가톨릭대사전). 단일 납북 규모로는 서울 등지에서 약 177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북한으로 끌려감. 납치 및 살해 방식북한 정치보위부는 남한 점령지에서 교회 목사, 신부, 수녀 등을 연행해 북으로 이송했고, '죽음의 행군'이라 불린 강제이동 중 다수가 굶주림·혹한으로 사망했다. 일부는 북상 도중 총살되거나, 교회에 감금된 채 집단 방화나 몽둥이·죽창 학살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종로 YMCA 사건처럼 교인을 유인해 집단 검속 후 납북하는 사례도 있었다.
종합 평가
6·25 전쟁 직후의 종교인 납치·살해는 북한 정치보위부가 종교를 체제 통제 장애 요소로 판단하고 조직적으로 주도한 대규모 숙청행위였다. 이는 단순 폭력이 아닌 이념적 박해로, 남한 내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기반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성전을 둘러보며 그림과 장식 해설 등을 살펴본다. 유명화가의 그림을 임화라는 형식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문장
브뤼기에르 주교 문장은 주교가 교구를 순시할 때 쓰는 모자와 그 양 옆으로 교구장을 상징하는 3단 수술이 있고, 그 안에 방패 모양의 문장이 있는 전통적 양식을 취하고 있다.
주교 모자는 조선교구에 대한 사목 책임을 표현한다.
방패 모양의 문장 한가운데에는 빛나는 십자가가 있고 왼편에는 AVE MARIA의 약자인 A와 M을 겹쳐 성모 마리아를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 오른편의 배는 넓은 의미에서는 교회를, 좁은 의미에서는 아시아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를 태운 범선을 상징한다.
방패 바탕에 줄이 쳐져 있는 것은 바다의 파도를 상징하며 하단의 ME는 Mission Etrangeres (외방선교)의 약자로 자신이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문장 하단의 라틴어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목지침으로 '가서 만백성을 가르쳐라'는 뜻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표어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고향인 프랑스 카르카손교구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중국의 시완쯔(서만자)를 떠나기 직전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쓴 1835년 9월 28일 자 편지 왼쪽 윗부분에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