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최진영, 2015
[구의 증명 - 최진영] 내가 너의 증명이 될 수 있다면.
이야기(談)는 천천히, 사랑(球)을 삼킨다.
아, 내(談)가 너(球)의 증명이 될 수 있다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들 때문일까. 나는 유독 아이들의 불행에 예민한 편이다.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은 세상이 온통 절망뿐인데, 저항할 힘도, 저항해야 한다는 인지도 없는 아이들. 책임(꾸짖을 책, 빚 채 責, 맡을 임 任)져야 하는 어른들 대신, 제 몸보다 큰 지게를 짊어지는 아이들. 내게는 이태원에서 있었던 참사가 그랬고, 세월호가 그랬고, 삼풍백화점이 그랬고, 형제복지원이 그랬다. 선택한 적 없는 미래 앞에서, 무기력했을 그 눈동자들을 생각한다. 나는 인생이 선택적 숙명의 연속이라고 믿는다. 인간에게는 여러 갈래의 운명이 주어지지만, 그중 하나를 생의 주체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고 숙명을 살아내는 것이, 실존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사회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병폐가 있다. 자신이 선택한 바 없는 결과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순수한 영혼들의 비명이, 그것을 증명한다.
상대방이 나의 전부, 나의 세상인 연인이 있다. 그대는 내 혈관의 피, 내 심장의 숨, 내 대지의 흙, 내 바다의 물, 내 초라한 들판의 단 한송이의 꽃, 내 텅 빈 하늘 위 휘노는 단 한마리의 신비로운 새, 내 아침의 별, 내 공기의 열, 수억 광년 어둠을 뚫고 날 부르는 별, 날 이끄는 길, 날 지키는 법, 수백만 년 정적을 깨고 날 흔드는 손, 유일한 나의 세계, 매일이 하루 같은 나의 꿈. (9와 숫자들의 <창세기 (시작할, 다칠 창 創, 인간, 대세 세 世, 기록할 기 記)> 가사 중). 시대가 시작하면서 생긴 이야기. 인간이 다치고, 서로를 다치게 한 이야기. 사랑은 세상을 태어나게 하고 운용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다치게도 한다. <구의 증명>은 구와 담이의 창세기다. 서로가 세상 그 자체인 두 사람이, 세상을 시작하면서 생긴 이야기다. 그리고 서로만이 세상의 전부여서, 세상 밖에서는 다칠 수밖에 없었다는, 구슬픈 사랑 이야기.
이 처절한 사랑 이야기는 독자에게 묻는다. 책임 없는 자가 짊어진 책임은, 운명이라는 이유로 그가 겪어야 온당한 일인가? 책임 없는 자에게 책임을 짊어지게 한 어른은,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가? 영문도 모르는 채로 타인의 책임을 짊어진 젊은 연인은, 속수무책으로 사랑 안에 서로를 가둔다. 사랑 밖에서 어떤 것도 이 안으로 틈입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더 이상 다칠 수 없도록. 그들은 구(공, 아름다운 옥 구 球) 모양을 띄는 둘만의 왕국을 만들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사랑에 침잠한다. 그들의 사랑은 구의 모양. 빈틈없이 담을 쌓아 올려 스스로를 가두어 꽉 갇힌 모양의 구. 깊은 산에 사는 청설모처럼. 둥지 안에 놓인 둘만이 세상의 전부가 되도록.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없도록. 그러나 세상에 흐르지 못하는 이야기는 좁은 구 안에 고이고, 이 폐쇄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기형(불구 기 畸, 모양 형 形)을 겪는다. 독자는 또다시 물음표를 만난다. 사랑은 꼭 아름다워야만 하는가?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린 구와 담은, 서로가 있어서 덜 불행하거나, 서로가 있어서 더 행복하기 때문에 함께하지 않는다. 구(球) 안에 갇히고, 담(이야기, 말씀 담 談) 안에 갇히더라도. 그 사랑 안에 갇히면 불행하더라도 괜찮아서, 그 이야기(談) 안에 갇히면 불행한대로 괜찮아서. 조금이라도 괜찮기 위해서 사랑을 선택한다. 어차피 불행할 수밖에 없다면, 살기 위해서 이만큼은 괜찮아도 되지 않을까. 어린 연인은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니면 기형적으로 변형된 사랑이 이미 집착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는다. 기형적인 것은 전부 나쁜가? 매끈한 모양에 아름다운 색깔을 갖춘 구. 아름다리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그림 같은 들판 위에, 담쟁이가 물든 담. 그렇지 못하다고 사랑이 될 수 없는가? 울퉁불퉁한 채로 풍파에 변색된 구. 폭우에 허물어져 가며 비명을 내지르는 담. 그들의 탓이 아닌 채로. 동화를 닮지 못한 창세기는 묵시록으로 다시 쓰인다.
그들이 지어 올린 담이 허물어지고, 견고했던 구가 붕괴 되던 날. 담은 아포칼립스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만만 년 남을, 창세기보다 오래 남을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談)로서의 자신이 구의 증명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긴 겨울을 맞기 전의 청설모처럼 장례를 준비한다. 잔뜩 여위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자신의 우주를 정성껏 씻기고, 그의 머리를 빗기고, 손톱을 깎아 단장한 후, 그 부산물부터 삼켜낸다. 너무 아름다워서.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서 죽어버린 우주 안에서나마 한순간이라도 더 괜찮고 싶어서. 차마 구를 훼손하지 못하고. 담은 천천히, 구를 삼킨다. 이야기는 천천히, 사랑을 먹는다. 너를 다 삼키지 못하면, 그래서 나 홀로 이 사랑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여전히 불행한대로, 조금도 괜찮지 못할 테니까.
본작의 핵심은 구와 담의 특별하면서도 폐쇄적이고, 그래서 기이(기이할 기 奇, 다를 이 異)한 사랑(구) 이야기(담)지만, 이 사랑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룬다. 구와 담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들의 사랑이 폐쇄적인 모양을 띌 수밖에 없었던 이유, 오히려 관점에 따라 현대 사회에서 그들의 사랑은 다른 관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관계'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시각이 시사된다. 특히 구의 사연이 그러하다. 구의 부모는 빚을 갚기 위해 쓴 사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행방불명이 되었고, 사채업자는 법적으로 성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 빚의 책임을 군복무를 하고 집에 돌아온 구에게 고스란히 떠넘겼다. 그리고 국가와 어른들은 아이가 부당한 책임 지움 때문에 겪는 고통을 모른 척한다. 구가 어린 나이에 사채업자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결국 그들 손에 잡혀 '맞아 죽는다'는 점에서, 평범한 세상을 겪지 못한 구를 위해 스스로 구의 존재, 그들 사랑의 증명이 되어 구에게 여생을 선물하기 위해, 구를 삼켜내는 담의 사랑이 훨씬 상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구는 이야기한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수없는 불행 중에, 희망이 섞여 있었다고. 희망은 미래를 꿈꾸게 하고, 욕심을 품게 하니까, 나쁜 것이라고. 그러니 희망 없이 살았던 두 사람은 조금은 덜 불행했을까. 아니면 희망이 없어도, 담 때문에 살고 싶었던 구는 사실 희망을 품고 살고 있었을까. 구는 이야기한다. 소니 빈 일족이 전원 사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되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어른들이 만든 관습대로 인육을 먹었던 아이들도 함께 사형을 당했다고. 그리고 담에게 제안한다. 노마가 나눠준 꿈, 울트라 캡숑 아빠가 되고 싶다고. 그러니,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아이에게 다 해주고. 아무것도 물려주지 말자고. 그래. 담은 산뜻하게 동의한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 그 생각은 이미 희망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타인의 어리고 여린 희망을 눈여겨 바라보는 따뜻한 어른이었다면. 울퉁불퉁한 돌멩이의 사연도 문진(글월 문 文, 누를 진 鎭)으로 쓰고,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도 있는 그대로 들어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면. 인간도 물건 취급하는 어른이 아니었다면. 구와 담은. 그 아이들은.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는 그들은. 깊은 산골에 들어간 청설모들은. 좁은 구에 스스로를 가두고, 사랑에 질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인간은 죽는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무(無)로 돌아간다.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그렇게 인간이 한계에 부딪혀 사라진 후에도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판도라의 이야기처럼. 소니 빈의 이야기처럼. 그러나 그들을 진심으로 야단하고 걱정하던 유일한 어른, 담이의 이모가 돌아가신 후, 그들 곁에는 완벽하게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담, 이야기 담 談)가 사랑 안에서 온전했던, 짧지만 따뜻한 시간도. 구가 상처 입고 바스라진채로도 담이와의 사랑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찬란했던 시간도. 울트라 캡숑 아빠가 되고 싶었던 노마와 그 꿈의 계승자인 구와 담이, 달빛 아래 걸었던 시간도. 기억해 줄 사람 하나 없다. 그래서 담은 스스로가 이야기가 된다. 스스로가 논증이 된다. 잊지 않으려고. 잊히지 않으려고. 이런 사람도 있었다고. 이런 사랑도 있었다고.
이 철저하게 처절한 증명(증거 증 證, 밝을 명 明)과 엄숙하고도 엄격한 장례 (장사 지낼 장 葬, 예도 례 禮) 앞에서, 내가 구와 담을 위해. 그들을 닮은 어떤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특히나 혼자서는.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누군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구와 담의 증명이 되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라도 울퉁불퉁한 구와 무너져가는 담장을 본다면, 그저 그대로 괜찮다고. 그것 역시 사랑이라고, 그 붕괴 역시 너의 이야기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고.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희망은 불행이 아니라 내일 이야기를 써 내려갈 힘이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고. 모든 사람은 이야기고, 하나의 우주고, 나는 너의 이름을 웅숭깊은 이야기로, 우주로, 기억하겠다고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너의 증명은 완벽하다고. 피타고라스의 정리처럼 천년, 만만 년 동안. 그 증명이 아무도 없는 너희 같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는 부모가 될 거라고. 그러니 나는 오늘로 돌아온다. 너희를 위하여. 펜을 놓으면 침대로 기어가 잠든 남편의 귓불을 가만가만 잘근잘근 물어야지. 아. 내가 너의 증명이 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