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브 연락 없다>,에두아르도 멘도사,1991
[구르브 연락 없다 - 에두아르도 멘도사] 나는 에일리언입니다.
alien. 생경한, 외국의, 이질적인을 의미하는 형용사이자, 이방인, 외국인 체류자를 뜻하는 명사 alien은 다른 사람, 남, 다른 것을 뜻하는 라틴어 alius를 어원으로 한다. 이방인, 외국인의 의미로만 쓰이던 alien은 1920년대부터 외계인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1979년 에일리언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 발표되면서 외계인이라는 의미로 더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어떤 나라였는지는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이미그레이션에서 alien이라는 단어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국인 부부가 입국 심사 줄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줬을 때, 그들 얼굴에 또렷이 비쳤던 불쾌감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 내에서 같은 국적을 공유하지 않은 자를 지칭하는 단어(foreigner)가 따로 있다는 점에서, 또 ET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외계인이 침략자, 두려움의 대상을 은유하는 데에 쓰였다는 점에서, 외계인을 지칭하는 데에 alien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명칭으로서의 alien이 갖는 부정(아닐 부 否, 정할 정 定)성을 뚜렷하게 시사한다.
에두아르도 멘도사의 <구르브 연락 없다>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 현대인이 주로 감정적인 측면에서 겪는 고질적 병폐, 예컨대 고독, 박탈감, 무감수성, 무관심을 스페인에 불시착한 두 외계인의 표류기를 통해 묘사한다. 본작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구에 파견돼 구르브와의 교신이 끊기자, 그의 파트너인 '나'가 구르브를 찾아 귀환하기 위해 지구에 착륙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스파냐 언어권 특유의 마술적 세계관과 블랙 코미디가 절묘하게 결합한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나 문법(文法)적으로도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멘도사는 명백한 이방인(alien)인 외계인(alien)이 부조리(아니 부 不, 가지, 조리 조 條, 다스릴 리 理)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그의 존재 자체가 부조리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적응하지 못하여 소외감을 느끼는 장면을 사뭇 진지하게 그려내고, 이방인, 경계인으로서 고통받으면서도 공동체에 애증(愛憎)의 감정을 형성하고 결국 귀환을 포기하고 지구에 남게 되는 과정을 유쾌하게 설명한다.
본작에서 부조리는 은유가 아니라 실체화된 결과, 작품이 발표되었던 1991년 이래 2025년까지 유효한 현상으로서 존재한다. 나아가 현대인, 특히 도시인이 겪는 문제들의 원인으로 기인한다. 결혼 후 이사한 지 두 달쯤 되었을까. 주말에 남편과 외출하고 귀가할 때, 우리 또래 정도로 보이는 부부와 유모차에 탄 아이랑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됐다. 아파트 구조상 한 층에 두 세대뿐인데, 낯선 부부는 엘리베이터에서 우리가 눌러야 하는 버튼을 눌렀다. 이사했을 때 옆집에 케이크와 쪽지를 주러 갔다가 집에 사람이 없어서 문고리에 걸어뒀는데, 그때 직접 인사하지 못했던 탓에 이사한 지 두 달 만에 이웃과 첫 대면을 한 것이다. 드디어 얼굴 보고 인사를 드린다는 인사와 웃음을 주고받으며 일상의 사소한 따스함을 느낌과 동시에, 사회적 고립과 어떤 삶들이 겪는 고독한 결말이 현실에 존재하는 일임이 뻐근하게 실감됐다.
기술 발전에 따라 현대인은 연대(연결할 연 連, 띠 대 帶)를 이룰 대상을 오롯이 의지만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동시에, 의도적으로 연대에서 배제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인이 말하는 이상적 삶의 형태로서의 낭만(浪漫)이 대부분 과거의 것인 이유로는 여러 가지 구조적 문제가 있지만, 감수성 측면에서는 현대인이 서로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연결될수록 연대의 피상성은 짙어진다. 메신저로 오래, 자주 대화한다고 하여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과 대화한다고 하여 그 모든 사람과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사회적 영향력이 SNS 팔로워 숫자에 따라 계측될수록, 상대적으로 팔로워 숫자가 낮은 사람의 영향력은 본질과 무관하게 절하된다. 요컨대 현대사회에서 대면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연결은 상시적이고 따라서 긴밀하지만, 고독과 무관심, 박탈감, 양극화를 해결 또는 완화할 수 있는 궁극적 해결책으로 기능하기는커녕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어제와 오늘을, 남과 자신을 비교할수록,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연결'에 의존하는 정도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혼자이지만, 현대인은 한 번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고독에 익숙해지기에는 이미 고도화로 사회화되어 있다. 카뮈에 의하여 선언되었듯이,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방식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그 한계를 깨닫는 매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상과 현실이 일치할 수 없는 한, 사회는 부조리하다. 현대 인간의 연결은 형태를 불문하고 이미 사회의 일부, 부조리의 일부로 편입되고 말았다. '나'가 느끼는 고립감과 불안감이 구르브로부터의 연락 없음을 기록할수록 고조되듯이, 현대인이 '연락 없음', '1이 없어지지 않음', '반응 없음'에서 느끼는 고독은 고조될 수밖에 없다. 본작은 30여 년 전, 지금보다는 대면하는 관계가 일상적일 때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연결될수록 짙어지는 관계의 피상성과 연결에서 배제된 자의 상대적 박탈감, 고독감 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바(르)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따로 있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가장 무고(없을 무 無, 허물 고 辜)하고도 무지한 외계인 '나'가 난동의 주범이 되어 경찰에 연행되고, 몸에 흉기를 지닌 젊은이들이 몰려와 두 차례나 '나'의 조끼와 물건을 강탈하였는데 되려 '나'가 경찰에 체포된다. '나'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존재로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겪게 된 사건들을 평가하거나 자신의 가치관과 비교해 볼 새도 없이, 직면하고 적응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똑바로 직시하고, 본부에서 지시하는 임무를 완성하는 부속품으로서의 삶을 살기 보다 지구에 남아 부조리의 일부가 되기를 선택한다. 음식을 먹을수록, 생각을 할수록, 골치가 아프면 아프도록. 외계인의 솔직한 심정은 지구에 남고 싶다를 가리킨다. 부조리를 직시함으로써 자신을 보고, 자신의 본질적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의미로, 실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대에 살아야 하고, 이 사회를 살아야 하며,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명료하게도.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카뮈는 <이방인(The Stranger)>을 통해 인간이 실존하기 위하여 직면해야 하는 현실로서의 부조리를 뫼르소가 처한 비현실적이고도 극단적인 일화에 은유한다. 멘도사가 관조하는 부조리는, 어머니의 죽음, 연인과의 사랑, 사람들 사이에서의 갈등을 앞에 두고도 무감각하고, 자기 인식에 게으르던 뫼르소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부조리를 직시하고, 그럼으로써 실존을 이룩하는 알베르 카뮈식 부조리와 비교하며 음미할 때 더 색다르게 다가온다. 본작과 <이방인>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부조리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동시에 <이방인>이 뫼르소가 비로소 실존을 이룩하고 삶의 기쁨과 행복을 인지한 바로 그 순간에 죽음을 맞는다는 비극을 조명함으로써 인간의 궁극적 깨달음은 부조리에 대한 직시에 있음을 시사하고 초월을 추구하는 실존주의적 사상에 비판적이었던 반면, 본작은 몇만 광년을 넘어와 스페인에 착륙할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현신을 기리기 위하여 기도하는 외계인들이 부조리한 사회를 선택하였음을 조명함으로써 그들이 부조리의 직시에서 나아가 부조리를 살아낼 것임에 무게를 두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카뮈는 실존주의자들이 고정되어 있는 진리를 거부하지만, 사실 실존주의는 고정된 거리를 거부하는 것 자체, 즉 '초월'을 고정된 진리로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용적인 관점에서 카뮈가 선택한 '소진'과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꿋꿋이 살아내는 시지프스식 '반항'과, 사르트르를 위시한 실존주의자들이 선택한 '초월'과 선택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며 그로 살아가는 구르브식 '실존'에, 독자가 실재하는 부조리를 살아냄에 있어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이 남는다. 본작의 외계인들과 마찬가지로, 뫼르소와 시지프스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부조리극 안팎에서 이방인이자 외계인으로. 각자의 바위를 짊어진 채, 각자가 가진 상식과 현실이 끊임없이 충돌하여 빚어낸 부조리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우리는 이 시대에 살아야 하고, 이 사회를 살아야 하며, 오늘을 살아야 한다. 철학적 논쟁과는 무관하게도.
생은 거대한 모순이다. 인간사(일 사 事)는 부조리로 집약된다. 현실적으로 부조리나 모순이라는 거대한 시류에 직시 이상의 반항은 힘들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르브처럼, '나'처럼. 저 너머에 부조리한 오늘도 껴안으려고 노력하고,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변화의 시작점을 자처하는 이방인들이 있다고 상상하면, 나 또한 반항과 극복의 시작점이 되고 싶어진다. 시지프스처럼, 뫼르소처럼. 오늘도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을 있는 힘껏 소진하는 경계인들이 있다고 상상하면, 나 또한 있는 힘껏 바위를 어깨로 밀어 올리고 싶어진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 각자의 행성을 이루는 외계인이다. 저마다의 경계 위에 서있는 경계인이다. 그렇게 구르브들이 모이면, 그렇게 '나'들이 모이면. 모행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우주선을 버리고 이 땅에 남은 사람들. alien이라는 자신의 ID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어쩌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편지를 보낸다. 옆집에 사는 이웃에게. 부조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반항아들에게. 우리는 그렇게 헐겁고도 느슨하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존하는 띠를 이루면서, 지구를 바꿀지도 모른다. 답장이 없어도, 연락이 없어도 괜찮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땅을, 오늘을 살아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