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의 거대한 절망

<변신>, 프란츠 카프카, 1916

by 새벽녘 연필소리

[변신 - 프란츠 카프카] 다정한 사람의 거대한 절망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령의 체코에서 태어난 유대인,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는 회사원, 동시에 하루에 두 번씩 쪽잠을 자며 잠을 줄여 독일어로 글을 쓰는 작가,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억압받으며 자란 아들. 프란츠 카프카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부장적이고 위압적인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애석하게도 40세에 요절할 때까지 그 참혹한 압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순종적이었던 카프카가 아버지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활동하며 치열하게 글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 카프카는 나아가 전업작가로 생계를 이을 방법을 부지런히 모색하기도 했다. 나는 카프카가, 현대인들의 활동반경이 가상공간으로 넓어지면서 일반화된 페르소나, 이른바 '부캐’의 영토로 망명(亡命)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이웃 소녀가 인형을 잃어버리자 이틀간 함께 찾으러 다닐 정도로 사랑이 많았던 카프카가, '카프카스러운(kafkaesque)'이라는 고유 형용사를 만들 정도로 혼란스럽고 불쾌하며 충격적인 작품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문학이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을 털어놓을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카프카는 자신의 욕망을 하나 남은 병약한 아들에게 투영하는 아버지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했으나, 설상가상 나머지 가족 역시 그의 작품활동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늘 집이 시끄러웠고 따라서 매우 혼란스러운 작업환경까지 견뎌야 했다. 그가 처한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독해하는 <변신>은, 평범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공동체로부터 외면받고 심지어 경제적 쓸모가 없어지자 버림받는 구성원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레고르 잠자는 무너져가는 집안을 위해, 원치 않았던 외판원으로 일하며 힘들게 빚을 갚아 나간다. 그리고 조금씩 가계를 정상 궤도에 회복시키던 어느 평범한 나날의 아침, 자신이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것을 인지한다. 모든 사람에겐 간사한 면이 있어서, 성실하고 부지런한 이에게 가혹한 기준을 들이대는 경향이 있다. 매일 새벽 일찍 출근하던 그레고르가 출근하지 않자, 회사에서는 그의 성실함을 참작하는 대신 즉각 집으로 찾아오고, 그가 아프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출근을 재촉한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의 비정상적인 '변신’은 회사 사람과 가족들에게 발각되고, 그는 방에 감금된다.


이물(異物)로 여겨져 고립된 그레고르는 결국 조금씩 인간의 모습을 잃어가고, 유일하게 그를 인간으로 대하던 누이마저 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일련의 웃지 못할 비극적 해프닝들이 지나고,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몸에 낸 생채기 때문에 오랫동안 앓았던 그레고르는,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가족을 한 데 묶어주는 달콤한 매개체가 되어줘야 할 사과가, 존재를 부정하는 가장 치명적인 흉기가 되어 그의 몸에 박혀 상처로 곪는다는 것은, 그레고르의 깊은 절망을 적나라하게 실체화한다. 아침에 출근한 가정부가 그의 사체를 버려버리고, 가족은 그의 흔적이 없어지자 홀가분하게 집을 팔고 이사를 떠난다. 본작은 어떤 맥락에서 읽느냐에 따라, 독자마다 달리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의 외피는 기괴하고 충격적이다. 그러나 독자가 이야기의 각 요소를 메타포로 치환하여 읽는 순간, 이 특수한 비극은 우리 시대의 정상성을 위협하는 소외와 혐오에 대한 서사로 확장된다. 이 기묘한 이야기를 메타포의 합집합이자 거대한 하나의 메타포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 속에 담긴 비극의 의미가 역설적이게도 보편적인 우리의 현실이 된다.


카프카의 가족사와 노동현장과 가까웠던 직업적 특수성을 고려하면, 본작은 인간을 부속품처럼 바라보는 산업화의 후폭풍, 경제적 관점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폐기하거나 판매대에서 내려버리는 자본주의적 사고의 뒷모습, 결정적으로 남들과 다른 인간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다루고 있다. 한편, 표면적으로 그레고르의 죽음에 따라 자유를 얻고 홀가분해진 가족들이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는 마지막 장면은, 그레고르의 죽음이 가족들을 자유롭게 한 것도 맞지만 그레고르 자신을 가족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남긴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장치는 가족의 외관을 쓰고 다만 필요에 의해 이어지던 질긴 인연의 굴레를 끊어낸다. 생을 바쳐 사랑한 사람들에게 멸시받아야 했던 그레고르 입장에서도, 이 비극적 결말이 또한 잔인하도록 간편하고 홀가분한 결말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이 인간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카프카의 작품관을 고려하면, 존재의 필멸성에 대항하는 그레고르 생의 마지막 장면들이야말로 카프카식 실존주의의 대변이 아닌가 생각한다.


강제적이기는 하지만, 변신이라는 사건은 그레고르에게는 진정한 자아를 대면하기 위한 기회를 주는 사건으로 보인다. 현실의 압박에서 도망친 카프카의 망명처가 문학이라는 가상 공간이었다면, 소설 속 그레고르의 망명처는 역설적이게도 벌레의 몸이었다. 경제적 유용성을 강요받는 외판원이라는 껍데기가 파괴되자, 그 비참함의 심연에서 비로소 인간 그레고르의 진정한 자아가 강제적으로나마 발현한 것이다. 물론 카프카의 작품에 드러나는 실존주의는 훗날 사르트르가 주창한 실존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벌레의 모습으로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직면한 상태에서 자신의 과거와 그로 인해 상처 입은 내면을 살펴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가고 사고가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도 죽음에 대항하여 하루하루를 살아낸 것 자체를 '아직은 인간인' 존재로서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실존적 행위로 읽을 여지가 있다. 본작은 다정한 사람의 거대한 절망을 그린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앞두고 무력하게나마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자기 앞의 생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무력한 그만큼이나 그가 겪은 거대한 절망과 깊은 비극마저도 우주를 이루는 미력한 티끌처럼 느껴진다.


비극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다정한 인간 그레고르 잠자는 슬퍼하고 좌절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사랑했고 배려했으며 또 걱정했다. 분노 대신 사과를 던지는 아버지와 기절하는 어머니, 자신을 혐오하는 누이를 이해했다. 늙은 부모가 일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으며, 귀중한 동생이 꿈이 아니라 생계를 선택하는 것을 슬퍼했다. 자신이 인간이었을 때 그들이 진작 생계에 나서지 않은 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레고르는 다시 예전처럼 인간 그레고르 잠자로 눈을 뜬다 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더 나은 선택, 더 고매한 자아여서가 아니라, 다정한 인간이 그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내고, 더 나은 내일을 살기 위해. 더 다정한 공동체를 이룩하는 더 온전한 연대를 이루기 위해, 다정한 마음을 그러모아 있는 힘껏 존재할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관을 반영한 작품으로 인정받아 카프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는 드센 너울 꼭대기에 까치발로 섰다.

파도가 고운 모래밭에 부서질 때마다

그도 사납게 연안에 흐트러졌다.

손톱만큼도 의지하지 않은 모양으로

산산이 갈라져 나부낄지라도.

속절없이 멀어지는 낙조를 향해

그는 다시 여린 발끝으로 달려간다.

일수유에 깨지던 물방울이

겁파의 대양이 되는 순간.

그는 그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를가파른 파도를 거슬러 올라, 드센 너울 꼭대기에 까치발로 선 카프카를 상상한다. 절망의 꼭대기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다, 나뭇가지처럼 가는 다리로 서는 벌레 그레고르를 상상한다. 그를 지탱하는 건 오로지 그 자신뿐이다. 모든 시간을 삶으로, 모든 존재를 인간 자체로 바라보는 눈빛. 비극이 그를 벌레로 만들었을지는 모르나, 그 비극조차 부수지 못한 그의 다정함이야말로 그를 운명보다 우월한 존재로 만든다.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형벌을 자각한 시지프가 운명보다 우월하다고 말했듯, 벌레의 몸으로도 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레고르는, 그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다정한 그레고르는 그가 맞닥뜨린 거대한 절망보다 우월하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실존주의의 형태는 그레고르 식의 ‘다정한 실존’이다. 혐오와 차별의 물결 속에서도 타인을 향한 배려와 다정함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긍정하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그레고르를 그레고르로서, 그가 선택하지 않은 변신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그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비극도 부수지 못하는 다정함이 가득한 그레고르 잠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