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1922
(요약)
싯다르타는 모든 모순적 얼굴을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하여
삶의 강물 안으로 불러들이며,
양립 불가능한 모든 일면이 서로 맞잡은 손을 본다. 깨닫는다.
아니, 마침내 받아들인다.
(원문)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깨달음 너머 받아들임.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깨달음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은 깨달음의 순간을 제각기 다르게 맞이할 수밖에 없다. 구도자는 각기 다른 간절함으로, 다른 뜻을 구하며, 다른 길 위해 선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공교롭게도 삶에는 어떤 적확한 표현도 있을 수 없는 깨달음이 수반한다. 불가해한 비극이 사고처럼 깃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로. 따라서 기대했던 바에 부합하는 모습의, 그래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깨달음은 존재하기 어렵다. 애초에 만족하기 위해서 구한다면, 깨달음은 그 본질로부터 소외되며 깨달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이 된다.
헤르만 헤세는 인간의 필연적인 번뇌적 요소로서 인간의 양면성에 집중했다. 참나적 존재로서의 일면을 발견하는 것이 그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생각했고, <데미안>에서 표현하였듯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내면에 대한 탐구를 거듭했다. 다양한 일면들 속에서 그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충동을 겪으며, 오래 아팠다. 그러나 통일성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헤세의 아트만의 발견에 대한 오랜 탐구가 집약되어 있는 그의 역작이다. 헤세는 본작을 통해 불립문자의 깨달음을 얻은 한 인간을 그림으로써, 인간은 다층적인 존재로 그 모든 면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통일성을 이루며 공존할 때 비로소 내면에서 발생하는 갈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내면의 다층성을 끌어안는 일이 헤세가 말한 구원의 길이라면, 외부로부터 들이닥치는 삶의 무작위성을 수용하는 일은 이언 매큐언이 <레슨>을 통해 보여준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언 매큐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레슨>은, 한 번의 틀어져버린 레슨이 삶 전체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무덤덤하게 풀어낸다. 주인공 롤런드는 우리가 가지 않은 길, 하지 않은 선택으로 인해 소거된 세계 또한 어쩌면 어느 시간대에서는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건 후회일 수도 있고, 날려버린 기회에 대한 안타까움, 회한, 아니 어쩌면 제대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위안, 혹은 그 모든 것을 내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그림자가 드리운 오랜 시간을 건넌 롤런드는 인생이 주는 진정한 레슨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너울, 복잡하고 기나긴 레슨, 반복되는 실수와 슬픔의 연속 속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교훈이 아니라, 이 너울을 무사히 넘어갈 연대와 지혜, 또 실패하고 실수하며 끝내는 죽는다는 물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실존자로서의 의지, 복잡하고 거대한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하기보다 삶이라는 긴 레슨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와 인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거대한 부조리로서의 세상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가치 있다.
한편 본작의 싯다르타는 고행을 그만두고 속세에 머물렀던 긴 세월 끝에, 사문의 길에 들기 위해 건넜던 강물과 다시 만나,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강이 발원지부터 바다까지 흐르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싯다르타의 모든 생애는 강물 속에 중첩되어 흐르고 있다. 나아가 싯다르타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롤런드가 과거의 손을 잡고 선형적인 시간 속에서 과거를 긍정하며 상처를 보듬었다면, 싯다르타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손이 이미 하나로 맞잡혀 있음을 본다. 싯다르타는 강물 앞에서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동시성의 경지에 닿는다. 관측하기 전에는 죽음과 삶이 겹쳐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일생의 양립 불가능한 모든 면은 동시에 존재하며, 또 서로가 없으면 동시에 존재하지 못한다. 파인만의 말처럼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내가 놓친 어느 순간들이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인간의 마음에 위안을 주고 또 인간 존재의 본질적 한계로의 유한성이라는 굴레에 인간이 무력하게 기속(굴레 기 羈, 묶을 속 束)되어 침잠하지만은 않도록 한다. 강물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시간에서 자유로워진 싯다르타는 통일성을 깨닫는다. 지자와 불지자, 본질적 자아와 주변적 자아, 세속적 가치에 매몰된 자와 초연한 자. 그 모든 것은 한 명의 싯다르타에게 공존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를 이루는 생각이 달라진다고 하여, 인간을 연대기별로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실용적 관념으로서의 시간은 존재하고 인간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로 자리 잡았지만, 시간은 존재의 변화와 무관하게도 여전히 흐름과 동시에 그 속도는 상대적이다. 어른의 시간을 나눠 받아 자기 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아이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자신의 시간을 먹고사는 치열하고도 질긴 일에 투입하는 어른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건너, 존재에 내재하는 수많은 일면들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블록우주론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이미 존재하며, 현재는 의식의 기준점으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 놓여 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롤러코스터에 올라 앞만 보고 달려가지만, 사실 궤도 전체는 이미 그곳에 놓여 있다.
과거의 싯다르타가 없다면 현재의 싯다르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싯다르타가 없다면 미래의 싯다르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의 싯다르타가 없다면 과거의 싯다르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의 역작 <이방인>의 뫼르소는 헤세가 본작을 통해 조명했던 인간의 다면성을 떠올리게 한다. 뫼르소는 삶을 운용함에 있어 타인과 다른 범주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거대한 부조리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게 되면서 실존적 존재로의 지위를 잃고 부조리에 흡수되는 결말을 맞는다. 동시에 삶의 본질에 집중하는 양상의 삶에 대한 태도, 본질에 집중하지 않는 허상적 요식행위에 대한 거부감과 그 부조리에 대한 저항적 행위ㅡ사제와의 말다툼, 일말의 감정과 공감을 보이는 모습, 소시오패스처럼 아무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 그 모두가 여전히 그를 이루고 있다.
그 모든 뫼르소의 얼굴이 여전히 뫼르소인 것처럼. 브라만의 아들이자 사문, 창녀의 정부, 노름꾼, 뱃사공이었던 모든 순간은 모두 싯다르타다. 뫼르소가 본질을 위해 죽음을 택함으로써 부조리에 저항했고 동시에 부조리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으로 부조리에 흡수되었다면, 싯다르타는 모든 모순적 얼굴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하며 삶의 강물 안으로 불러들임으로써 부조리를 내면의 통일성 안으로 흡수하고 해체한다. 싯다르타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가 존재하기에 모두가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헤세가 그토록 염원했던 참나의 발견과 모든 일면의 동시적 존재가, 보리수나무 아래가 아니라 실제 세상을 이루는 공기 아래의 싯다르타를 통해 비로소 이룩된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 참나를 발견하는 것. 그 순간이 삶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 되며, 질문은 던져볼 만한 것이 되고, 거대한 부조리와 모순에 맞부딪는 것으로 삶의 주체성을 지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어진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중생을 구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구원했고, 고빈다를 구원했으며, 헤세를 구원했다. 통일성의 원칙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무의미한 시간을 반으로 접으며 구원은 내 앞으로 왔다. 세계는 그런 작은 구원이 모여 구원해 왔고, 앞으로의 세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달음이 허상뿐인 목적지라면, 받아들임은 이미 우리 곁에 흐르고 있는 강물이다. 윤회의 무거움과 자유로워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어렴풋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받아들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