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알랭 드 보통, 2012
[불안 - 알랭 드 보통] 불안에, 사랑으로 답하다.
욕망은 인간이 생을 유지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사고체계가 갖춰지기 전의 인간은 본능적 욕구 때문에 울고 웃는다. 지적 능력이 생기고, 희미하게나마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다양한 욕망에 시달린다. 따라서 욕망에 어떤 라벨링을 하든, 그것은 인간에게 존재 자체가 당연하다. 인간이 처한 상황이나 그가 어떤 인간인지에 따라 욕망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영역까지 논의를 확장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마저 욕망에 영향을 끼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여전히, 필연적으로 다양한 욕망을 안고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을 완벽히 제어할 수 없다.
한편 인생이 본질적 자아를 발견하고, 화해하며, 합일하기 위한 지난하고 긴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 욕망 역시 본질적 자아의 일부로 직시해야 할 대상이라고 할 것이다. 자기에 대한 이해, 나아가 본질적 자아에 대한 이해가 완벽히 이루어진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인간은 미지의 영역인 본질적 자아가 자신의 지위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로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본작에서 설명한 바처럼 높은 지위 때문에 타인에 의해 떠받들어지는 쪽은 물론이고, 속물근성을 가진 자들도 마찬가지다. 지위는 상대적인 것이고, 지위 간의 경계가 희미해진 현대사회에서, 명백하게 남들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집단은 예전보다 그 폭이 좁고 얕다.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거칠게 도식화해 보자면, 인간은 그가 이룬 성취의 합이고 사회는 개인적 성취의 합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정상성의 범위는 성취의 결과들의 평균치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사회는 객관적 지표로 표현 가능한 성취의 합집합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가치가 있어야만 성립되지만, 개인은 정상성의 범위 안에 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따라서 노력이 특정한 기대치의 성과를 이룩하기를 기대하며, 기대를 현실화하기 위해 능력을 계발한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 사회는 기대에 부응하려는 개인과 집단적 노력에 의해 발전을 이룩해 왔고, 능력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믿음이 이런 노력을 추동한다.
그러나 사회적, 개인적 기대가 비슷한 수준에서 합의되거나, 합의된다고 하더라도 완벽히 충족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능력주의의 사회라고 하더라도 응보적 인과관계가 사회의 흐름을 늘 지배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기대와 능력주의는, 발전과 불안을 동시에 조성하는 장치로 작동해 왔다. 기회가 있을 때 능력을 갖춰야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능력을 완벽히 갖춘 사람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목표한 바를 성취할 수 없다. 요컨대 현대사회인은 정상성의 범주 안에 들고 자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과 능력계발의 수혜자이자, 불안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할 팔자를 타고 태어났다.
사람의 일들이 모두 그렇듯이 사람이 기획하고 만든 것인 한 어떤 체제든 완벽할 수 없고, 따라서 촘촘하게 합이 짜인 체제에 철저한 방식으로 편입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불확실성은 그의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와 그에 따른 해결책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따르면 인간의 타인을 위한 지원, 도움은 자비심에 기인한다기보다 자선행위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즉 자기애에 비롯된 것이다. 경제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설정한 손익분기점(BEP)은 늘 유동적이다. 인간은 저마다 다른 손익분기점을 정해놓고 있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관성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자비가 아닌 계산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발생한 오차만큼 우리 안의 불안은 증폭된다.
불확실성은 측은지심과 같은 인간이라면 느끼는 것이 당연할 지점에서도 발생한다. 조력관계마저도 자비심 내지 측은지심 같은 통일성을 띄는 감정적 요인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기준을 두고 실시간으로 계산해 내는 손익으로 결정되므로 관계의 불확실성이 발생하고, 자선행위를 포함한 수혜도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 된다. 받는 쪽에서 당연하게 느끼느냐 하는 것과는 무관한 문제지만, 인간적으로 그래 마땅한 베풂도 더 이상 마땅한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어떤 배려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인간다움은 계산된 결과이기도 하다. 스페인어로 모욕은 injuria다. 영어에서 injury는 신체적, 비신체적 손상과 피해를 통칭하며 한국어로는 상처로 번역된다.
사회적 동물인 이상 인간은 외부에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내부적 동요를 겪을 수밖에 없고, 타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지위에 따라 이성적 검토 결과와는 별개로, 인간은 직관적으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본작은 이런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이성을 통해 불안요소를 야기하는 명제를 검토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방법은 무작위 집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직간접적 인용을 통해 보통이 이야기하고 있는 불안의 발생원인과 극복방법은 실존주의와 맞닿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것이 선행된다면 불안은 예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나아가 이미 발생한 불안도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완전한 자기 이해는 평생의 숙제이며, 완전한 이해를 이루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어떤 완벽한 이성을 통해서도 그 이해가 참인지에 대한 객관적 검증이 어렵다. 타인의 이성에 자신에 대한 이해를 명제화하여 입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자신의 이성이 자신에 대한 관찰에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은 불안을 예방 또는 극복하기 위하여 우회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불안은 예방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기보다는, 지혜로운 방식을 통해 공존해야 하는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본작은 예술과 불안의 관계도 관찰한다. 예술은 다양한 인간군상, 인간의 다층적인 면모를, 다양한 관점에 이입하여 관찰하게 한다. 가장 인상 깊은 예시는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다. 제인 오스틴의 작가적 특성을 생각하면, 전통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위계질서의 전복을 관찰하는 데에 있어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이다. 오스틴의 또 다른 작품 <설득>도 부와 계급과 같은 가치가 인생의 전부 혹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의 품위와 진정한 가치는 이성적으로 측정 가능한 가치와 무관함을 증명한다. <오만과 편견>에서는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방식을 취하여, 메가폰적 인물인 엘리자베스가 등장하나, 그렇다고 엘리자베스가 노골적으로 독자를 향해 말을 걸진 않는다.
오스틴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사실을 관찰하고, 관찰한 현실을 세밀한 방식으로 글로 풀어내, 독자로 하여금 문학에 몰입하게 하고, 인물과 상황에 이입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도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도록 설득한다. 재밌게도 본작이 쏟아내는 다양한 예시와 논리적인 서술을 통해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예술이 비평이 필요한 인간의 삶에 비평의 역할을 한다는 작가의 관점을 재발견하고 공감한다. 알랭 드 보통이 풍부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방식으로 채택한, 여러 가지 원전을 이용한 직간접적인 인용이 너무 잦고, 어렵게 느껴지고, 따라서 불편했던 반면, 익숙해진 후에는 여러모로 이점이 있다.
반영론적, 효용론적 관점에서 볼 때 본작은, 작가의 생각과 시대상을 객관적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독자가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거나 단편적이나마 새로운 사실들을 스키마로 편입하는 데에 굉장히 유리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논리적 글쓰기라는 기술적 관점에서 봤을 때, 본작은 교본과도 같다. 여러 측면에서 이 긴 산문은 -여전히 예술의 영역에 있다면- 예술의 역할을 직접 증명한 셈이다.
하마르티아의 존재만으로 페리페테이아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를 지켜본 독자들이 재앙을 겪은 비극의 주인공을 향해 '그럴 법하다' 혹은 '당해도 할 말 없다(구어로 ‘당해도 싸다’고 축약)'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이 다층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다양한 이유로 불안을 느끼는 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 보바리 부인과 오이디푸스가 내린 잘못된 판단에도 나름대로 다양한 상호작용과 참작할만한 사정이라고 부를만한, 완벽히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존재하고, 판단의 이성적 준거들이 존재한다. 하마르티아에 의하여 인간의 지위는 큰 영향(주로 부정적인)을 받는다. 그러나 전지적 관점에서 객관적인 판단과정을 관찰한 존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지위는 단편적으로 잘못된 판단의 순간만을 지켜본 인간이 정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띨 것이다.
요컨대 지위는 잘못된 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어도 전적으로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지위는 문화, 사회, 경제, 계급, 감정, 이성 등, 사회를 이룬다면 동원 가능한 모든 맥락을 종합하여 결정되는 관념적 좌표다. 그리고 이 모든 맥락들이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 고정값이 아니라 변수라는 점에서 인간의 불안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서의 지위는 좌표라기보다 상태에 가깝다. 모든 맥락에서 자신의 지위가 결정된다는 것은 인류 대부분에게 좋은 일일지 몰라도,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존재하는 한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존재에 대한 불길한 신탁에 다름없다.
본작이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불안의 통제 방법은 보헤미아다. 애석하게도 인간은 내외적 불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작품의 대전제 때문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역작인 <월든>을 예시로 드는, 적절한 정도만 유지한다면 상당히 유력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은 뒷심을 잃는다. <월든>의 팬으로서 마치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처럼 그려져 오해를 사게 된 소로우를 변호하자면, 본작이 <월든>을 인용하며 보헤미아 정신을 필요 이상의 지위 불안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 이유는, <월든>이 오두막을 짓는 데에 든 돈이 얼마인지를 자랑하듯이 전시했다는 데에 있지 않다. 소로우가 전시하려 했던 것은 오두막의 건축비가 아니라, 본질적 자아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의 최소량이었다.
<월든>은 우리 모두가 오두막으로 가서 최소한의 여건으로 가난한 삶을 살며 만족하자고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다. 소로우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적다는 이유로 쉽게 불행과 불안을 느끼는 것을 경계하며,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이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제한적인 자본 안에서도 충족감을 느끼고 비교와 불안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월든>을 통해 제시한다. 지위 불안은 내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에 나를 설득시키지 못할 때 발생한다. 본질에 집중하고 주변적인 조건에는 만족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불안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 아쉽게도 본작에서는 보헤미안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저지르는 실수에 대하여 경계하는 데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물론 보헤미안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좋은 사상(思想)도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더 이상 좋은 생각(想)이 되기 어렵다.
극단적인 보헤미안을 지켜보면서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마니아, 평등에 미친 시대>를 떠올렸다. 평등, 즉 근거 없는 차별이 없는 상태는 인간이 지향할만한 가치이지만, 평등이 선(善)이라는 기준을 잃고 무분별, 무차별적으로 작용한다면 더 이상 좋은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다다이즘은 어떤가. 기존의 가치나 질서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사조로서 다다이즘은 꽤나 오랫동안 지지받아온 사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다이즘은 유럽 전역에서 뉴욕으로 건너가면서 황금기를 구가하고, 나아가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가 태동했다. 대표적인 다다이스트였던 마르셸 뒤샹의 작품 <샘>은, 교과서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나는 초현실주의자였던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허무주의가 느껴지는 다다이즘 앞에서는 어떤 자유나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그리고 본작이 묘사하는 지나친 보헤미안을 지켜보며 그 무감(無感)의 이유를 깨달았다. 무분별한 파괴는 자유가 아니라 방황에 가깝다. 다다이즘의 극단적 허무에서 내가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그곳에 삶에 대한 긍정적 지향점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로의 이행이 결여된, 순수한 파괴는 인간을 또 다른 허무의 굴레에 기속 되게 할 뿐, 욕망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보헤미아는 무엇인가. 보헤미아는 현재의 체코령 일부를 기반으로 했던 왕국, 16세기 합스부르크 왕조가 프라하에서 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한 보헤미아 왕국에서 어원적으로 기원한다. 그리고 카르멘으로 대표되는 집시들이 보헤미아 왕국 땅에 기반을 두었던 집단이란 점을 생각해 보면, 집시를 히피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헤미안 파트에서 집시를 문학적으로 풀어낸 <카르멘>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카르멘은 아리아 하바네라에서 연신 사랑(L’amour)을 외친다. 그런가 하면 <셜록홈즈>의 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 에피소드에서는 홈즈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 아이린 애들러가 등장하고,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에는 날 진정 사랑하는지 절규하듯 묻는 목소리가 흐른다.
여러 가지 착점에서 보헤미안의 정신적 지주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으로 불안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하면, 고통이나 본질에서 벗어나는 욕망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워진다. 아마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동의하기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어떤 가치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고 또 얻고 유지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지, 우리는 사랑인지. 사랑에 대하여 끝없이 탐구하고 물어왔던 알랭 드 보통에게는, 어쩜 불안에 대한 답도 당연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기대도 욕망도, 그래서 생기는 불안도. 삶에 대한 어떤 애정도 없다면 가질 수 없는 것들일 것이다.
인간이 과연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삶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기대나 욕망을 품을 수 있을까. 너무 높고, 깊고, 짙은 농도의 불안은 완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불안은 어디까지나 변할 수 있는 것, 인간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에서 발생한다. 어딘가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시련이 닥쳐도 (Any way the wind blows), 우리는 그저 사랑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불안도 그 바람결에 묻어올 것이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어떤 불안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아무런 상관도 없다 (Nothing really matters).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고. 이 삶을 사랑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니까 미리 불안을 불안해하지 말자. 그럴수록 불안도 평안도 없이. 바보 같은 얼굴 위로 무의미한 시간만 흐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