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루마니아
정말 웃기는 게 난 세계여행이 나름 꿈이었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단 남들도 그걸 좋아하니까, 그리고 영화에서 보니까 멋져 보여서, 그리고 그걸 하면 멋진 사람이 되니까.. 가 그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약 2년 전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자! 를 외칠 때 아주 자연스러운, 그리고 그럴싸한 핑곗거리였다.
'세계여행 떠나요. 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후후!'
때려치우는데 그냥 때려치우면 너무 없어 보이니까, 나에게도 남에게도 좋은 훌륭한 변명되시겠다. 근데 문제는 이거다. 거짓말도 너무 오래 하면 뭐가 진짜 인지 헷갈린다고, 나도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1년 반에 가까운 기간 동안, 그니까 지금까지, 아니 오늘도, 내가 하는 행동을 곰곰이 쳐다보니 이건 여행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행동을 하고 있다. 난 그저 너무 피곤하고 게을러서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다. 루마니아에 온 지 한 달이 거의 되어가는데 가장 유명한 관광지 1개도 안 갔다. 루마니아에 온 건지 방콕 하러 온 건지 모르겠다. 나 뭐 하고 있니 여기서. (...) 아 뭐 어쩌라고. 귀찮. (긁적긁적)
아, 난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
근데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아, 나 도망친 거구나. (...)
그렇다!
세계여행은 구실일 뿐, 그저 난 한국이 싫고, 내가 다 저지르고 싸질러 놓은 일에서 후다다닥 도망친 것이다!
이걸 깨닫는데 1년 반이 걸리다니!
뭐. 그냥 한국 안에서 도망쳐도 되는데, 워낙 크게 싸질러 나서, 글로벌하게 도망쳤다고 생각하자. 그래도 이왕 도망쳤으니, 좀 즐겨보자. 남들의 꿈과 로망인 세계여행 (..)인데 좀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몇 번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세계여행이 (특히 혼자서 하면) 피곤한 이유
1. 잠자는 곳, 먹는 것이 자꾸 바뀌면, 인간인지라 생물학적으로 몸에 무리가 온다.
이게 무리가 안 오는 사람들도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특수 종족이고, 그분들은 계속 그렇게 여행하시면서 사시면 된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인간인지라, 1년 넘어가니까 그저 뜨끈한 국물만 찾을 뿐 (...)
2. 만나는 사람이 자꾸 바뀌는 게 너무 끔찍하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한테 이게 형벌이었다. 매번 내 이름은 무엇이고 어느 나라에서 왔고 어디 나라를 다녀왔고를 마치 랩 하듯이 랩 랩 랩 하다 보니 지긋지긋했다. 그저 맴도는 이야기뿐이고, 진짜 속내를 후벼 파는 이야기를 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그런 경우들도 아주 간혹 가다 있지만, 그건 정말 가끔일뿐, 대부분 그저 자기소개하다가 끝난다. 그리고 설사 친해졌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랑 좀 이것저것 뭔가 할라치면 난 떠나야 하는 운명 (...)
3. 거기가 거기다.
진짜다. 이제 대략 새로운 나라에 내려다 기본적인 두근거림도 거의 없다. 거기가 거기고, 그놈이 그놈일 뿐 (응?)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를 가도, 아 일단 가지도 않는구나. 억지로 끌려가서 구경을 가도,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뭐 여기까지 왔는데 거길 안 가면 너는 대역죄인이라고 하면, 네 -나 대역죄인 하겠스므입니다. 끄덕끄덕하고 안 간다.
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위의 3가지가 아닌가 싶다. 물론 나는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돈도 더 많이 들고, 몸도 더 피곤하고, 게다가 여성이다 보니까 별 미친 놈들을 글로벌하게 만나다 보니 짜증이 더 빨리 증가한다는 부분도 있다. 일단 세계여행을 혼자 하는 것과, 커플-부부가 함께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아, 그냥 다른 여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부과 함께 하면 세계여행을 하는 이유도 좀 더 그 두 사람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 여기서 부럽다고 말하면 지는(....) 쳇.
하지만, 그래도 세계여행을 혼자서 하니까 좋은 이유
1. 나를 알게 된다. (끝)
이건 아마 커플이 부부가 같이 여행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건 모를 거다! 메롱! (... 쓰고 나니 더 초라하군) 그렇다 이 길고 긴 장구한 세월 동안 혼자서 세계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수많은 것들을 혼자서 다 결정한다. 어디를 갈 건지, 뭐 먹을 건지, 가서 뭐할 건지, 누구를 만날 건지, 블라블라... 나의 진정한 투루 칼라를 알게 된다. 남자 친구가, 남편과 조율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들 의견에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오로지 나만의 결정, 나만의 의견! 내가 하고 싶은데로~ 내가 말하는 대로~~~~~~~~~~~~~~
그러다 보니, 내가 여행을 무척 귀찮아 하고, 피곤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쩝.
그뿐인가? 나와 혼자 있는 시간, 내가 나를 마주 보는 시간을 끔찍하게도 무서워하던 그런 닌겐이었다. 그래서 그런 붕 뜬 시간을 없애기 위해서 열심히 미드를 정주행 하고, 웹툰을 보고, 예능을 챙겨보셨다. 그러나 와이파이는커녕 전화도 안 터지는 농장에서, 별을 세면서 맹-하게 있다 보니, 저절로, 나와 마주하는 시간, 나와 대화하는 시간, 그러다 빵 터져서 나도 모르게 내가 너무 싫었다가, 나를 대면하기 무서웠다가, 나를 막 둘둘둘 싸서 집어넣었다가, 여튼 정신분열에 가까운 과정을 거쳐서...
나와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혼자서 세계여행을 하는 가장 좋은 이유고, 지금 생각하니 가장 값진 결과물이구만. 그렇다. 너무 뻔해서 손발이 오그라들고 차마 적고 싶지 않지만 사실인 것을!
혼자서 세계여행을 하면,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나름 담백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나 자신을 찾는 여행을 하려면 이것보다 빠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귀찮고 피곤하고 돈도 들고, 몸과 영혼도 너덜너덜해지지만,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는, 소크라테스도 누누이 강조했던 "나 자신을 알라"를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다.
난 이제 세계여행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아직까지는) 다만 세계 곳곳에 가서 자빠져 드러누울 수 있는 장소, 헛소리를 늘어놓을 친구가, 내 시꺼먼 속을 다 알고있는 멋진 친구들이 세계 곳곳에 생긴 것이 마냥 기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나는 나랑도 잘 지낼 수 있고, 혼자서 밥도 잘 먹고, 잘 놀 수 있게 돼서, 전 세계 유명 관광지와 유적지보다 더욱 흥미롭고 신비롭고 묘묘한 나 자신의 내면을 알게 돼서, 그게 참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