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정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
집이란 무엇일까
나의 가족이 사는 곳? 나의 거주지 등록이 된 곳? 태어난 곳? 가장 익숙한 곳?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쉼을 얻을 수 있는 장소?
2015년 6월부터 2017년 3월에 이르기까지 거의 2년에 걸친 기간 동안 나는 달팽이 마냥 배낭을 둘러메고 '집'이라는 곳을 찾아 헤맸다.
따듯한 기온, 저렴한 물가 덕분에 마음마저 푸근해지는 동남아에 머물기도 하고, 모험과 흥분을 찾아서 모로코로 떠나기도 하고, 히피 하고 세련된 멋쟁이인 베를린에서 춤을 추다가, 다시 호기심 덕분에 루마니아, 그리고 이스탄불을 지났다.
물가는 어떠한가
기온은 적당한가
사람들의 인심은 좋은가
아시아 여성이 살기 안전한 동네인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
내 맘이랑 맞는 친구를 사귈 수 있는가
배울 것들이 있는가, 흥미로운가
...
리스트는 끝이 없었고, 나는 열심히 체크리스트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한 달을 살아보고, 점검해보고, 물가를 비교하고, 인간관계를 점검해보고, 비자를 확인해보고, 일자리도 한번 들여다보고, 이 커뮤니티는 적당한지, 이 동네 사람들은 어떠한지... 리스트가 길어질수록 나도 덩달아 마음이 다글다글 들끓었다. 왠지 여기는 아닌 것 같다. 이번엔 여기를 가보자. 아. 이제는 대륙을 바꿔야겠다. 남미를 가야 하나?
그렇게 마음만 복잡 복잡하던 어느 날 밤이었던 것 같다. 그냥 평범한 어느 날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다음에 어디를 가야 하지, 아 어쩌지, 몸은 피곤한데, 사실 나 어디도 가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나 아직 집을 찾지 못했는데. 나 어디를 가야 해? 집에 가고 싶은데 집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한국에 가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고 인도에 갈 수도 없잖아. 어디로 가야 하지? 내 집은 어디지?
시뻘게진 눈에서 뜨거운 뭔가 또르르 떨어졌다.
아. 집은 어디에도 없구나.
그리고. 그래서.
집은 어디에든 있겠구나.
집은 무엇인가.
그의 영혼이 마음이 모든 가면일랑 훌훌 집어던지고 쉴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육체도 정신도 온전히 쉴 수 있는 곳이다. 아무리 근사한 유럽도, 온화한 기후도, 저렴한 물가도, 가면놀이가 계속되는 한 그 어디도 집이 될 수는 없는 거다. 근데. 그 가면놀이는 누가 하는 거지?
바로 나 자신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장 먼저 잽싸게 초라하고 가난한 나를 어떻게든 무마해보려고 가면을 집어 쓴 것은 나 자신이었다. 이 젠장맞을 가면놀이를 끝내지 않는 한 난 어디를 가서도 쉴 수 없을 터이다.
치앙마이에서 셰어하우스를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살아봤다. 무려 6개월 동안. 다들 나처럼 조금씩 뭔가 부족하고, 허전하고, 헤매거나, 불안한 그런 밍숭밍숭한 사람들과 모여서 살았다. 캠프도 해봤다. 강아지도 업어서 키워봤다. 정말. 완벽한. 나의 집이었다.
https://brunch.co.kr/magazine/matehaus
약속한 6개월이 끝난다. 2016년 11월 - 2017년 4월
6개월이 끝나면? 이제 어디로?
갈팡질팡하지 않았다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사랑하는 나의 모로코 친구가 말했다. 이제 넌 모든 것이 시작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해. 그것이 너의 여정의 끝이야. 그리고 시작이 되겠지. 영화, 신화 속 모든 주인공들이 겪었듯이 너도 이제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치앙마이에 살고 있는 존경해마지않는 친구가 말했다. 그것이 당신의 삼사라의 끝이 될 것이라고. 돌고 도는 삼사라의 커다란 바퀴의 끝을 한번 봐야 할 것이라고. 물론 그 끝에서 또 다른 삼사라가 시작되겠지만.
내가 있는 곳이 곧 집인 것이다.
집은 선택하는 것이거나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나 자신의 집이 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돌아간다. 이 모든 여정이 시작된 그 원점으로. 귓가에는 '귀향'의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손은 바쁘게 초조하다. 그러나. 종당에는.
이 여정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
Trips do not begin or end, they merely change form
- Robyn David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