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린 아니고 기린 Dec 12. 2019

영화, 윤희에게(2019)

멀고도 가까운 당신의

“야, 나 네 엄마야.”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설명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내 눈 앞에 있는 이 중년의 여성이 이 지구 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거의 대부분의 순간은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떤 거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아득하게 멀고도, 신기할 정도로 가까운. 바깥세상에 나와 숨을 쉬고 살았던 시간보다 더 오래 붙어 있었던 ‘엄마’라는 여성과 딸의 관계란 그런 게 아닐까.


*


당신에게도 내가 모르는 찬란했던 순간이 있었을 테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참 당연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살고 있는 삶 이전에 분명 지금처럼 많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일상이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 사실을 잊고 산다. 엄마는 그저 엄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인생을 나는 다 겪어봤으니까.’ 하는 눈으로 모든 걸 알아차리는 신기한 사람. 그리고 조금 더 자라면, 거기에 어느 정도의 연민이 붙는다. ‘아, 이 여자는 참 외롭겠구나.’ 그래서 다 이해해주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새봄이 바라보는 윤희는 어쩌면 참 심심한 존재다.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아도 크게 화를 내는 법이 없고, 아빠와 달리 괜찮은 새 애인을 만들 생각도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눈에 띄게 밝게 웃는 법도 없다. 하지만 가끔씩 툭 내뱉는 말 안에는 새봄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고, 세상 모든 것을 시니컬하게 보는 것 같지만 기쁘거나 설레거나 행복하거나 우울할 때도 있다.


대부분의 딸들이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었고, 로맨틱하거나 다이내믹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엔 조금 기력이 없다. 사는 이유도, 깜빡이는 눈빛도 그저 나이브한 것 같지만 아주 사소한 부분, 특히 딸에 대해서는 예리하게도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예리함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제2, 3의 인생을 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엄마라는 혈연관계를 떠나 그냥 같은 여자로 지켜보면 이렇게 심심할 수가 없다. 나를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할 때 조금 못된 마음이 들 때를 제외하면 곁에 있어주고 싶다. 외롭고, 심심하고, 재미없는 매일을 살고 있으니까.


별 다른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이 영화가 묘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두가 알고 있는 엄마라는 사람의 삶을 아주 고요하고 담담하게 그려낸다는 점. 특별히 별나지도, 과장되게 슬프지도 않게 흘러가는 일상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온다. 담배 따위가 외롭고 고독한 인생에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 즈음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은 담배가 피우고 싶고, 그 연기 너머로 꽤 많은 것들을 날려 보내고 있는 것 같은 한 여성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


영화는 엄마라는 대상으로 시작해 자신의 선택에 솔직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을 보여준다. 솔직할 수 없었던 대신 도망치듯 다른 삶을 선택했고, 그 벌을 받는 것처럼 세상과 맞서 왔던 어떤 사람. 숨기려고 했던 비밀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 경중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대부분 많은 사실들을 숨기고 침묵한 채 살아간다. 나답게 바로 설 용기가 나지 않아서, 혹은 그렇게 했을 때 세상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서.


조금 더 오래 세상을 살았던 쥰이 료코에게 그게 무엇이든 부디 당신의 비밀은 비밀로 간직하고 나서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래서 오래 남는다. 몇 마디의 말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보다는, 누군가에게 그 말을 하기까지 쥰이 살아왔던 시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침묵하는 것만이 세상에 맞서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쥰의 시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새봄의 계획대로 윤희와 쥰이 재회하지만, 두 사람에게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윤희는 윤희대로, 쥰은 쥰대로 다시 자신들의 시간 속에 묻어간다. 현실이 그렇다. 료쿄에게 쥰이 말했던 순간처럼, 그 모든 것들을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밝히는 순간보다는 그저 묻어두고 다시 걸어가는 순간들이 더 많을 테니까. 두 사람의 재회도 그 순간들 중 일부일 뿐이다.


*


다만 이 영화가 그렇다고 외롭고 고독한 절망만을 향해 가는 건 아니다. 적어도 가끔, 아주 가끔씩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생각해도 된다는 여지를 준다. 애써 부정하거나 지우지 않아도 되는,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 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정도. 말주변이 없는 윤희가 편지의 마지막에 남긴 추신 한 마디는 그래서 더 무게를 지닌다. 나도 너처럼, 그리고 젊었던 시절의 윤희처럼, ‘꿈을 꾸고 생각을 하곤 한다는’ 그 말 한마디가 희미하게나마 위로가 된다.


영화 속에서 윤희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든 우리는 그저 우리일 뿐이다. 드러내도 좋고, 감춰도 좋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거면 충분하지 않으려나. 조금 외롭고 고독해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문라이트(20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