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어깨는 가볍지만, 마음은 무거운
어제 숙소를 미리 예약한 덕에 아일랜드 여행 3일차 만에 드디어 가방없이 여행을 하게 됐다. 가방엔 노트북을 비롯해 속옷, 양말, 각종 서류, 책 한권 그리고 감자까지 내 어깨를 짓누르는 수많은 물건들이 들어있다. 이 짐덩어리들을 벗어버리고 여행을 하다니. 생각만해도 상쾌하다. 게다가 새로 산 이어플러그를 끼고 잤는데, 정말 아무 방해없이 잘잤다. 아. 도미토리에서 누군가 내 물건을 훔쳐가지 않을까 가방과 외투를 껴안고 잔 것만 빼면. 어쩃든 이어플러그를 빼자마자 들리는 옆 침대 스페니쉬 청년의 코고는 소리에, 이어플러그에게 정말 고마웠다.
호스텔 근처에서 먹은 Irish Breakfast. 일단 베이컨이 두툼한 데에 좀 놀랐다. 짭짤한 건, 베이컨은 원래 짜니까. 정도로 패스, 소세지도 맛 없진 않았으나, 짯다. 그리고 왼쪽에 보이는 저 검은 물체는 푸딩이라던데, 어묵과 미트볼 중간의 맛이다.가 아니라 재료는 그것들로 만든 것 같은데, 아주 새로운 맛. 연필심을 씹어먹는 맛이 났다. 아무리 향이 강한 음식도 곧잘 먹는 편인데, 저건 포기. 딱 세 입 먹었다. 첫 시도로 한 입, 내 혀가 잘못됐나 확인차 두 입, 마지막으로 확신을 위해 세 입. 결론은 확실히 연필심 씹는 맛이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처음으로 대중교통, 트램을 타고 피닉스 파크로 이동. 지금까지 갔던 곳들은 걸어서 가도 충분한 거리에 밀집해있어 오로지 두 발을 교통수단으로 삼았으나,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피닉스 파크는 유럽 최대 공원 중 하나라는데. 아, 바람이 너무 분다. 너무 심하게. 그런데도 잎파리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가지들은 떨지도 않고 꿋꿋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봄~여름 사이에 왔다면, 정말 아름다웠을 것 같다.
피닉스 파크엔 유럽 최대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은 파리 콩코드 광장, 바티칸 등 유럽 곳곳에서 오벨리스크를 발견할 수 있다. 서구열강들이 이집트를 침략해 이를 약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해자의 나라로 생각해왔던 아일랜드에 오벨리스크가 있다니!
탑의 하부쪽엔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 웰링턴을 기리는 문장들과 그림들이 있다. 알 수 없는 INDIA와 그림도 있었지만. 웰링턴이 아일랜드 출신이라 세워졌다더라. 그런데 왜 하필 오벨리스크를 세웠는지 이해가 안간다. 이집트로부터 약탈해온 건 아닌 것 같고, 오벨리스크를 약탈한 나폴레옹을 조롱하기 위해 세웠나?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지만, 넓은 잔디밭에 혼자 우뚝 솟아 있는 저 오벨리스크가 고독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점심도 안 먹고 바로 칼만하임 감옥으로 향했다. 칼만하임 감옥은 피닉스 파크와 아주 가깝다. 한국으로 치면 서대문형무소. 이 곳에서 아일랜드의 독립투사들이 처절하게 죽어갔다.
칼만하임에 입장하면, 일단 가이드와 함께하는 감옥 탐방 이전에, 박물관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박물관 1층은 제레미 벤담과 존 하워드의 인간관, 감옥의 목적 등이 적혀있다. 판옵티콘은 정말 무서운 감옥이다. 현재는 기술의 발달로 이미 판옵티콘에 근접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획일적으로 고통이 줄어들면 행복이 늘어난다는 생각도 무섭다. '고통'과 '행복'이란 사람에 따라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정부의 보상과 처벌로 통제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무섭다. 그로부터 파생된, 파생될 수 있는 수 많은 폭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 2층은 19세기 일어난 수 많은 독립 투쟁의 주인공들이 감옥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을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아일랜드 독립 이후, 당시 영국과의 휴전 조약에 찬성, 반대하는 세력의 각각의 주장도 전시되었다. 해방 직후 48년 총선거 이전 대한민국의 상황이 오버랩됐다.
처음 감옥에 들어서는 순간, 벽돌이 뿜어내는 한기에 흠칫했다. 이렇게 차가운 공간속에서 홀로 외로이 있는 마음은 얼마나 더 얼음장같을까. 사실 가이드의 설명은 귀에 잘 안들어왔다. 일단 Irish pronunciation이 알아듣기 힘들었고, 집중을 해도 너무 길게 설명해 중간중간 정신줄을 놓았다. 정말로 너무너무 긴 설명이었다.
어제 못 갔던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 정말 환상적이었다. 1층은 켈스 책에 대한 설명. 4개의 복음으로 구성돼있고, 화려한 장식(예를들어 문장의 첫 알파벳을 동물이라던지 그림을 통해 표현한다.)이 눈에 띄었다. 2층 long room은 칼만하임처럼 공기부터 달랐다. 이번에는 피부보다 코가 먼저 반응했다. 오래된, 정말 오래된 나무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진에는 담지 못했지만, 사진 바로 밑 부분에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부터 베이컨, 보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자들의 흉상이 전시돼있다. 이 곳은 종교적 공간과 비슷하게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흐른다.
도서관을 다 보고 향한 곳은 더블린 캐슬.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치하기 위해 세운 성이다. 성벽도 있고, 성 내부에는 과거 정부 주요 기관급 부처들이 있었다. 지금은 아일랜드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총독부를 생각나게 했다. 김영삼 정부 때 철거했지만. 피해자의 역사로서 한국과 아일랜드는 비슷한 면이 참 많다.
아, 시간이 늦어 성 패트릭 성당을 들어가지 못했다. 아일랜드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성 패트릭. 그의 이름을 딴 성당에 들어가지 못하다니. 아쉬웠다. 아쉬움은 음식으로 달래는 게 인지상정. 이태원을 돌아다니면서 간혹 보이던 Irish 음식점들이 생각났다. 가보진 않았지만. 역시 아일랜드의 마지막 밤 답게 전통 Irish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딱히 먹을 게 없다. 스튜정도. 그래서 우리는 스튜집을 찾아 갔다.
양고기 스튜의 맛은 그냥 감자스프. 그리고 양고기는 생각보다 질겼다. 그래도 Irish 기분을 냈다는 데에 만족하며 템플바에 갔다. 역시나 아일랜드의 기네스는 맛있었다. 정말 부드럽고 끝 맛도 좋다. 믿기지 않는다.
오늘은 트윈룸에서 자기 때문에 물건 도난 당할 걱정이 덜하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네스 캔맥주를 한 캔 사갔는데. 이럴수가. 기네스 캔맥주마저 맛있었다. 아니 정말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기네스가 바다를 건너면 맛이 변하나보다.
이렇게 아일랜드, 더블린 여행이 끝났다. 아직 아일랜드를 떠난 건 아니지만, 갤러리는 한 곳도 못 가서 아쉽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자연경관도 정말 아름다운 것 같은데, 지금같은 날씨엔 안 가는게 나을 것 같다. 누군가는 더블린이 자기가 생각하는 최고로 아름다운 도시라는데. 내 기준엔 그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짧지만 좋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