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18

런던-예술속으로, 빠져들진 못했다.

by 래리

오늘 일정은 꽤 수월하다. 비틀즈의 앨범자켓으로 쓰였고 유명 스튜디오가 있는 에비로드, 맑스와 스펜서가 마주보고 있는 하이게이트 묘지, 공장 내부를 리모델링해 현대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테이트모던, 마지막으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


사실 에비로드는 나에게 확 와닿는 공간이 아니었다. 한 때 음악을 열성적으로 좋아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내 열정이 조선 반도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래도 같이 가는 학우가 음악을 십수 년 간 해왔고, 나도 잃어버린 열정을 찾을 수 있을까.해서 에비로드로 향했다.


런던 지하철은 서울지하철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갈아타는 곳을 찾기도 쉽고, 내가 갈아탔던 열차들의 거리는 모두 짧았다. 지하철 요금이 거의 3파운드로 비싸지만, 오이스터 카드를 구입한다면, 하루 최대 요금 상한선이 6.5파운드로 정해져 최대한 많이 이용하는 게 효율적이다.


에비로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스튜디오는 사적 공간이라 촬영, 출입이 불가가능해 옆에 있는 기념품샵에 들어갔다. 학우는 기념품 하나하나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드러낼 감정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비틀즈의 초 유명 몇 곡은 알지만, 딱 거기까지. 감정이 개입할만큼 비틀즈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뭐 한 곡만 듣고도 열성적으로 좋아할 수 있지 않느냐, 따질수도 있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미 나는 진작에 비틀즈 전집을 완주했을 것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자우림을 위한 공간들과 샵들이 생긴다면, 오늘 학우가 보여줬던 감정 그 이상의 것들이 흘러넘칠 게다.


무미건조하게 샵관람을 마치고, 학우가 산 연필로 샵 앞의 벽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 흰 벽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들로 얼룩졌고, 아마 몇 번이나 덧칠을 한 듯하다. 연필을 조금 세게 눌러 쓰면 흰가루들이 벚꽃처럼 흩날린다. 나는 "Not yet, for me"라고 썼다. 아직까지 관심이 안가서.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하이게이트 묘지. 이제 내 가슴이 벅차오를 차례다. 사회학 교수가 얘기했던 공교롭게도 맑스와 스펜서의 무덤이 마주보는 그 장면을 보러가기 때문이다. Archway 역에서 내려 주택가를 가로질러 묘지를 찾았다. 입장료는 4 파운드. 내셔널 갤러리, 대영박물관, 현대미술관 모두 입장료가 없지만, 이 묘지는 입장료가 있다. 기꺼이 내고 들어갔다.


%B9%A6%C1%F6.jpg?type=w2



%B9%A6%C1%F61.jpg?type=w2



%B9%A6%C1%F62.jpg?type=w2



%B9%A6%C1%F63.jpg?type=w2



%B9%A6%C1%F64.jpg?type=w2



%B9%A6%C1%F65.jpg?type=w2


한국의 무덤들이 정돈되고 깔끔한 느낌이라면, 하이게이트 묘지는 널부러져 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하지만 제멋대로 자란 넝쿨들이 묘비를 휘감고, 삐뚤빼뚤 누워있는 묘지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묘지들을 보면, 죽음이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임을 상기한다.


그리고 찾은 맑스와 스펜서의 묘. 맑스를 추종하는,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묘지 지도에 맑스의 이름만 붉은 색으로 써 있다. 그의 사상의 붉음을 나타내는지도 모르지만. 묘지에서 가장 인기있는 자리답게 누군가가 이미 맑스를 위한 꽃을 두고 갔다. 스펜서의 묘와의 거리는 불과 3미터 남짓. 맑스 사후 100년도 더 지난 지금, 왜 아직도 맑스를 향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지, 왜 스펜서보다 인기가 훨씬 많은지, 잘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런데 Archway 역에서 나오는 도중 엄청난 걸 발견했다. 하이게이트 묘지와 반대 방향으로 Arsenal Football Club->이란 표지판이다. 하이게이트 묘지를 다보고 나니, 점심 열두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B0%B3%BD%BA%B3%AF.jpg?type=w2



%B0%B3%BD%BA%B3%AF2.jpg?type=w2



%B0%B3%BD%BA%B3%AF3.jpg?type=w2



%B0%B3%BD%BA%B3%AF4.jpg?type=w2



%B0%B3%BD%BA%B3%AF5.jpg?type=w2



%B0%B3%BD%BA%B3%AF6.jpg?type=w2



%B0%B3%BD%BC%B6%F31.jpg?type=w2


유럽에서 가게 된 첫 구장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이라니. 아스날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역과 가까워 한 번 와봤다. 거너스라면 정말 좋아할 듯하다. 스타디움의 벽 면은 레전드 선수들의 소개가 그려져있고, 곳곳에 동상들도 있다. 검지 손가락 크기의 피규어를 좋아해 뭘살까 고민하던 중 벵거를 샀다. 지금 아스날에 있는 선수들 보다는, 벵거가 훨씬 상징성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월에 밀라노에 있는 산시로를 간다면, 기분이 어떨까. 과소비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C5%D7%C0%CC%C6%AE%B8%F0%B4%F8.jpg?type=w2


그리고 도착한 테이트모던. 기존 권위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현대미술 작품들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순간 그 목적을 상실한다는 글을 읽었지만, 모든 미술가들의 생각이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새로움을 시도하지만, 기존 권위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미술가들도 분명 많았으리라. 난해하다는 현대미술, 그래 한 번 덤벼봐라.는 외침을 마음속으로 하고 입장.


사진은 테이트모던 입장 후 가장 처음 본 작품이다. 뭘까, 흙이 있고 풀들이 자라고 있네, 어떤 곳은 흙만 있네. 이게 뭘까 고민하다 참지 못하고 설명을 봤다. Abraham cruzvillegas의 'empty lot' 런던의 흙을 무작위로 퍼와 퇴비와 섞어, 물을 주고 기다리는 작품이다. 생명체가 포함된 작품이기에 날마다 작품이 변화한다. 작품의 목적은 희망과 기대.란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흙에 단지 물과 빛만으로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희망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퇴비와 섞이기 전 흙들은 그들의 출신으로부터 애초에 물만 주어도 흙이 자랄지 말지가 결정되어 있었을 게다. 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확률은 심하게 차이가 날 듯 싶다. 불모지의 흙과 자연공원의 흙. 둘 중 어느 흙에서 생명이 피어날 확률이 높겠는가. 문득 금수저와 흙수저 논란이 떠올랐다. 정말 우리는 저 작품으로부터 희망을 찾을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C5%D7%C0%CC%C6%AE%B8%F0%B4%F81.jpg?type=w2


사실 바로 2층으로 올라가 처음 접한 작품이 우리나라 Lee bul님의 설치미술이었는데, 난해했고, 와닿지 않았다. 그나마 좋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 사진속의 그림이다. Ernst Nay의 white spring. 노란 색들이 개나리, 봄의 따사로움을 불러일으키고, 나는 씨디라고 여긴 저 동그라미들 속에서 음악이 흘러낭로 것 같았다. 나머지 작품들은 너무 어려워, 테이트모던 입장 전, 당찼던 나의 포부를 무너뜨렸다.


%C5%D7%C0%CC%C6%AE%B8%F0%B4%F82.jpg?type=w2


중고등학교 미술책의 단골손님. 몬드리안의 작품이다. 어디까지 추상화를 한걸까. 아직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품에 메시지가 있는 걸 좋아하기에, 설명도 읽고 다시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가 스페인 내전의 잔인함과 무서움을 소재로 그린 작품들이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당시 스페인 내전이 유럽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니. 그럴만하다. 동시에 '달리 밴 피카소'의 주인공 빈지노가 생각났다. 정말 그들을 보며 자랐으면, 좀 더 의미있는 가사들도 써주시길.


%C5%D7%C0%CC%C6%AE%B8%F0%B4%F83.jpg?type=w2


Joseph Beuys의 원자력 반대 작품. 심지어 체르노빌 원전 사고 보다 전의 작품이다.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핵개발을 감소하는 추세인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원자력 발전소를 늘리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히 원자력 문제 뿐 아니라, 무조건적인 효율성 추구와도 연관시켜야 한다. 왜 기술은 발전하며, 왜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원자력 발전소를 지으려 하는가. 지나친 효율성 추구가 불러올 대재앙을 수도 없이 목격해오고, 경제에서는 시장실패도 여러 번 겪었는데(현실도 마찬가지) 왜 정부는 이에 반성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C5%D7%C0%CC%C6%AE%B8%F0%B4%F85.jpg?type=w2



%C5%D7%C0%CC%C6%AE%B8%F0%B4%F86.jpg?type=w2


John Heartfield의 두 작품. 보는 순간 찌릿했다. 지난 학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수업 때 명사의 스피치 분석 레포트를 쓸 때, 나는 히틀러를 선정했기 때문이다.(그의 악명과는 별개로 단순히 스피치 기술만을 고려했다.)


첫 번째 그림은 괴벨스가 히틀러를 맑스로 분장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틀러의 메이데이의 연설을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맑시즘이 널리 확산돼있는 독일의, 노동자들 앞에서 히틀러는 맑스처럼 노동자를 위하는 척 하면서도, 맑시스트를 국가의 발전과 진정한 노동 해방에 방해가 되는 집단으로 만들어 자신의 지지율을 높였다. 그것도 5월 1일 노동절에. 짧게 말하면 위기를 기회로.의 순간이었다.


두 번째 그림은 '더 이상 십자가는 충분히 무겁지 않다.'는 문구가 함께 있다. 왜일까.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에서 종교적 단어를 상당히 많이 사용했다. 이는 청중들로 하여금 연설가에게 신비로움, 엄숙함, 그리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무분별한 단어 차용은 종교의 권위와 위엄을 더이상 강력하게 남아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B7%B1%B4%F8%C7%CA.jpg?type=w2



%B7%B1%B4%F8%C7%CA1.jpg?type=w2


현대미술로 머리가 어지러운 채로 저녁을 먹었다. 케밥을 먹었는데, 유럽엔 케밥집이 정말 많은듯하다. 내가 케밥을 좋아해서 다행. 그리곤 바로 사우스뱅크 센트레로 향했다. 이 곳은 런던아이와 가깝다. 엊그제 한인민박집에서 우연히 만난 분께서,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싼 값에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재빨리 예매했다. 자리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우리 자리는 2층 중간쯤 자리로 16파운드였다. 괜찮았다.


이번 공연은 셰익스피어 사후 400년을 기리기 위한 공연.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은 수없이 많았을 게다. 일단 음악을 하는 학우로부터 오케스트라의 개략적 구성부터 배웠다.


오늘의 바이올린 솔로는 한국인 박혜윤씨. 사실 8년 전 쯤 바이올린의 선율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 그 소리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언젠가는 바이올린을 배우리라 결심했던 그 때. 하지만 그건 순간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바이올린 솔로 연주를 보니, 꺼져가던 불씨가 되살아났다. 바이올린 솔로는 정말 멋있다. 오늘 연주는 초절기교로 정말 높은 수준의 테크닉을 필요로 했다.


바이올린 연주는 소리도 소리지만 동작이 너무 멋있다. 절도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몸짓이 정말로 매력적이다. 넋을 놓고 봤다. 하지만 아쉬운(?)건 오케스트라 연주를 잘 모르는 내가 들을 때도 바이올린 솔로의 음정이 조금 불안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정도 수준이면, 음정 틀리는 것 또한 연주 과정의 일부분이지만, 그래도 솔직한 내 느낌은 저렇다.


공연은 전반적으로 좋았다.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역량이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두시간 가량 힘차고 정열적인 지휘를 하는 그의 모습에 장시간 렌즈 착용으로 건조한 눈을 꿈뻑거리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늘 예술의 거대한 두 축. 음악과 미술을 모두 접했는데, 나의 부족함이 많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물론 베르캄프의 볼터치도 예술이다. 학우는 요번 여행 때 잃어버린 음악에 대한 나의 열정을 다시 찾게끔 노력하겠다 했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음악을 하는 친구와 음악얘기를 하니 나도 다시 흥미가 생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음악보다 더 흥미롭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얼른 자야지.

매거진의 이전글유럽기행-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