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19

런던-마지막 밤

by 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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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경기 시작은 오후 5시 30분. 뭘할까 싶어 고민하던 찰나 딘 스트리트 28번지로 향했다.

과거 마르크스가 6년간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Quo vadis(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이름의 식당 겸 바(Bar)가 위치해있다. 아직도 전 세계에 그의 망령이 배회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저 가게의 이름이 심오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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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을 지나, 트라팔가 광장으로 향하던 중, 무언가 다른 분위기의 서점이 나를 멈춰세웠다. 테이트모던에서 봤던 작가들의 이름이 보였고, 전시된 책들의 종류도 비슷해보였다. 시간도 남고, 책에 대한 호기심에 일단 들어가봤다. 역시나. 대부분 예술 관련 책들을 파는 곳이다. 런던의 예술을 글로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 일단 한 권 사기로 결정했는데, 값이 만만치않다. 사진이 많은 큰 책들은 30파운드를 훌쩍 넘어간다. 자연스레 눈은 작은 크기의 책들로 향한다.


나는 작은 크기의 책들이 좋다. 지금 입고 있는 외투의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책들은 휴대성이 좋아 어디에서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작은 책들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데 아주 유용하다. <아이와 미술관에 가기>정도로 직역되는 책은 너무 짧고, 내용도 평범해 다른 책을 골랐다. Ways of Seeing John Berger와 How to See the World. 둘 중 뭘 사야할까 고민하다, 결국 둘 다 사버렸다. 어짜피 내일 기차에서, 비행기에서, 그리고 앞으로 네덜란드에서도 책 읽을 시간은 넘치고 넘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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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 않고도 이미 풍족해진 마음으로 거리를 나섰는데, 다른 서점들이 눈에 띈다. 평범한 책방 거리일지도 모르겠으나, 예기치 못한 새로움에 이 거리에 혼자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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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셔널 갤러리로 가는 중. 기나긴 행렬에 또 한 번 멈춰섰다.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소리치고 있다니. 시위가 분명한데, 무엇에 대한 시위인지 궁금해졌다. 피켓과 현수막을 자세히 보니, 쿠르드족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인 듯하다. 쿠르드족을 탄압하는 터키 정부에, 지원을 하는 영국 정부에 대한 투쟁이 런던 한 복판에 울려퍼졌다.



찝찝한 마음으로 내셔널 갤러리 입구에 도착. 엊그제 얼굴만 비추고 나왔기에, 오늘은 제대로 된 관람을 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 입장했다. 먼저 중세시대 작품들이 눈에 띈다. 성경 속 이야기 한 장면. 아 그런데 아직 성경을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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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Cuyp의 그림을 보는 순간, 틸버그가 생각났다. 그림이 주는 목가적 평온함이 틸버그와의 연결고리였나보다. 사실 틸버그는 나의 고향 공주보다도 훨씬 크고 발전됐지만, 대도시가 주는 부산함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다. 여행때문인지 자꾸 저멀리 틸버그가 아득히 꿈틀거린다. 틸버그에서의 생활은 불과 2주도 채 안됐다. 심지어 더블린-런던 여행기간이 틸버그에 보낸 총 시간과 비슷한데도 그 곳이 너무 푸근하게 느껴진다. 내 방 뿐만 아니라, 자전거 타고 돌아다닌 모든 곳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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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그림. Claude의 작품인데 그림 속 풍경이 낯익었다. 군 시절. 2012년도 6월 이등병신분으로 처음 갔던 2주 훈련의 야영장소와 너무나도 비슷하다. 딱 저 풍경을 바라보며, 당시 김모 상병과 축구얘기를 했었다. 당시 훈련은 끝났고, 우리는 돌아가는 이동수단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와 동갑이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전체적으로 말랐지만, 축구로 단련된 두꺼운 허벅지를 소유한 그때 그 김상병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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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적 분위기와 과거향수에 젖어 갤러리를 걷던 중, 한가한 분위기의 다른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Frans Post의 Landscape in Brazil이다. 야자수도 있어, 더 이국적이면서도 나른한 분위기가 흘러나오지만, 그림 속 당시 상황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을 게다. 가장 큰 건물 위에 보이는 저 물체는 십자가다. 브라질에 기독교가 언제 전파됐을까. 물론 식민지 시절이다. 그림 자체로만 본다면, 평화로움 속에 숨어있는 이율배반적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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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전시관들을 지나던 중 유독 사람들이 이 곳에 많다. 분명 고흐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맞았다. 고흐와 모네를 보러 온 관람객들로 공간은 북적였다. 사진은 모네의 Water-Lilies, Setting Sun. 해질무렵, 죽어가는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점들이 수련 잎사귀에 흩뿌려진 느낌이었다. 나의 갤럭시 S4 카메라로는 입사귀 위 태양의 붉은 잔재들을 담지 못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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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런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의 하이라이트. 바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관람을 위해 우리는 스탬포드 브릿지로 갔다. 딱히 첼시팬은 아니지만, 히딩크 임시감독 체제는 0809시즌때도 재미를 쏠쏠히 봤기에, 기대됐다. 첼시는 다음 주 PSG와 챔스 16강 1차전을 앞두고 있기에, 혹시나 파투가 선발 혹은 교체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했었다.


파투. 밀란팬에게 얼마나 안타까운 이름인가. 0708시즌 당시 밀란이 10대의 어린 파투를 거금을 들여 영입했었다. 아마 200억 이상으로 기억. 나폴리와의 데뷔전에는 당시 비대해진 브라질 호나우두 호돈과 스타플레이어 카카가 있었다. 데뷔전 파투의 모습은 미심쩍었다. 공격수지만 패스를 잘 하지도, 받지도 못하고 혼자 겉도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데뷔골을 넣긴 했지만.


0809시즌이 돼자 밀란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파투는 '소년가장'이란 별명으로 당시 노쇠한 밀란을 기특하게 이끌었다. 그런데 '소년가장'시절의 혹사때문인지 언젠가부터 그에게 잦은 부상이 뒤따랐다. 0910시즌 레알마드리드와의 챔스 조별 예선. 당시 레알로 이적한 카카와의 만남으로 드라마는 시작됐다. 베르나베우에서 갈락티코 2기라 불리던 그 때의 레알을 파투의 두 골과 피를로의 중거리슛에 힘입어 3:2승리로 승리. 누구도 밀란이 이길거라 예상치 못했으리라.


그런데 챔스 16강 맨유전 직전 부상으로 파투는 16강 1,2차전에 모두 결장했고, 결과는 홈,어웨이 전부 패배.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0405시즌 PSV 박지성의 맨유 이적을 도운 밀란과의 경기처럼, 또 한 번 그에게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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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나와 스탬포드 브릿지로 가는 길. 벌써부터 파란 기운이 흘러 넘친다. 일단 경기 시작하면 관람하는 우리도 에너지 소비가 많을 것이기에 미트 앤 칩을 사 먹었다. 영국에서 먹는 메뉴에는 거의 칩이 곁다리로 포함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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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탈없이 경기장에 입장했는데, 너무 춥다. 오늘 런던 날씨 왜이리 추운지 모르겠다. 비도 추적추적 내려 추위에 추움이 더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노인분들이 꽤 많다. 아마도 수십년 째 첼시를 응원하고 계시는 분들일 것이다. 영국인들의 축구사랑은 익히 들어왔다. 전광판에는 오늘의 라인업이 소개됐는데 아쉽게도 파투는 교체명단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래도 어떠하랴. 첼시에 스타플레이어들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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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폭죽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자리는 괜찮다. 사이드 16번째 줄에 전반전에 첼시가 뉴캐슬을 상대로 공격할 때 아주 관람하기 좋은 자리. 전반전에 최대한 많은 골이 터지길 바랐는데, 나의 스탬포드 브릿지 입성을 환영하듯 첼시는 전반 10분도 채 되지않아 두 골을 넣었다. 뉴캐슬의 수비 실책이다. 그래도 기뻤다. 골과 함께 홈 팬들의 뜨거운 응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뉴캐슬 선수들이 거친 몸싸움을 하거나 첼시 선수들을 넘어뜨리면, 첼시팬이 아닌 나조차 항의의 제스쳐를 취했다. 그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전부 욕하고 난리났다. 반대로 첼시 선수가 뉴캐슬 선수에게 반칙을 하면, 서포터들은 오히려 첼시 선수들을 응원했다. 예로, 디에고 코스타가 뉴캐슬의 선수에게 거친 파울을 범했는데, 첼시 서포터들은 모두 "디에고, 디에고"를 끊임없이 외치며 그를 격려했다. 원정 선수들에게 너무나 가혹하다고 느꼈다.


그와중에 뉴캐슬로 이적한 존조쉘비가 좋은 모습을 보였다. 리버풀 시절엔 별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스완지 시티로 이적 후에는 꽤 좋은 활약은 펼친 것으로 안다. 이번 경기에서도 그는 '빡빡이 사비'로 불러도 될만큼 중원에서 경기를 조율했다. 경기는 전체적으로 첼시의 원사이드 공격으로 흘러갔지만, 후반 80분 넘어 타운젠드가 만회골을 터뜨렸다. 순수하게 개인기량으로 넣은 멋진 중거리 슛이었다. 이에 뉴캐슬 서포터석이 들썩이며,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곧바로 첼시팬들의 응원에 완전히 진압당했다.


경기는 첼시의 5:1승리. 내 인생 첫 프리미어 리그 직관에 많은 골들이 나와 만족스러웠다. 빨리 5월에 산시로에 입성하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너무 추웠다. 뜨끈한 육개장이 생각났지만, 참았다. 런던 어딘가에서는 육개장을 파는 곳이 있겠지만, 그 곳을 찾아가는 길에 분명 감기가 걸릴 게다. 우리는 곧바로 한인민박으로 돌아와 아쉬운대로 따끈한 라면을 끓여먹었다. 이렇게 런던 마지막날 밤의 만찬은 라면으로 끝냈다. 돌아보면 정말 바쁜 여행이었다. 잠자는 시간과 박물관에 머문 시간을 빼면, 항상 분주히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런던 중심부밖에 돌아보지 못하고, 그마저도 못 가본 곳이 많아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을게다. 하지만 이제 런던 여행의 물꼬를 틀었으니, 언젠가 또 오게 될 날을 기약하며 오이스터 카드는 환급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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