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28

방심하지마?

by 래리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증거는 식욕이다. 산산조각 난 멘탈을 긁어 모으니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났다. 거기다 하루 최소 1시간 이상을 자전거와 함께 해 매일매일 식욕이 왕성할 수 밖에. 꿀떡꿀떡 밥을 넘겨온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10kg짜리 스시쌀이 바닥을 드러냈다. 다시 생각해보니 한국인 세 명 모두 성장기 청소년 급의 식사량을 유지하긴 했다.


오랜만에 아시안 마켓으로 향했다. 처음 이 곳에 왔던 충격이 이제는 많이 무더졌다. 네덜란드 곳곳에 아시안 마켓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어쨋든 다른 상품들을 다 무시하고 먹던 쌀 10kg만을 집어들었다. 가격은 17유로. 자전거 뒤에 싣고 신나게 다음 마트로 달렸다.


집 근처엔 Jumbo와 EMTE라는 큰 마트가 있는데 감자를 제외한 대부분 품목들은 Jumbo가 조금 더 싼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감자를 사러 가는 길이니, EMTE로 향했다. 아시안 마켓에서처럼 다른 물건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5kg짜리 생감자 팩만 계산했다.


마트에 도착해서 감자를 구매하는데까지 5분 정도 걸렸을까. 계산을 끝내고 마트 문 밖으로 나섰는데, 이게 웬일. 자전거 뒷 공간이 허전하다. 누군가 쌀을 훔쳐간 것이다. 10kg짜리 쌀을 5분도 안되는 시간에 훔쳐가다니. 분명 자전거나 자동차에 실어 나달린거다. 우리가 아무리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도둑놈의 모습이 보일리 만무했다.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처음 경험하는 도난이었기에. 쌀 10kg. 17유로도 3명이 나눠내면 1인 당 6유로밖에 안하지만, 다들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아껴 여행을 가고 싶어해 한푼한푼이 피와 살 같았다. 게다가 집에서 아시안마켓의 거리는 또 얼마나 먼가. 시계를 보니 집에서 나온지 한 시간 반도 더 지나있었다. 순간 몸의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멘탈이 풀려서 그런지, 엄청난 피곤이 몰려왔다.


너무 안일했다. 자전거를 사는 첫 날부터 도난이 많으니 주의하란 말을 들었는데. 그저 조용한 분위기에 취해 외국인들의 친절함에 취해 이 도시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아침 룸메는 "우리 꼭 마트 앞에서 자전거 잠궈야하나?"라고 말했을 정도로 경계감이 느슨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쌀은 이미 없어졌고, 멍하니 주위만 둘러봐야 뭐하겠는가. 도둑놈도 이미 없다. 정신을 차리고 다음 마트 Jumbo로 갔다.


불행은 동시에 찾아온다던가. Jumbo를 가는 길에 자전거에서 넘어졌다. 네덜란드에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던 적이 었었나. 게다가 사람도 없고 길도 넓은데.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네덜란드인에게 인종차별적 조롱도 들었다. 이 곳에서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있긴 하다, 이제서야 긴장감이 확 올라왔다. 나는 지금 타국 땅에 이방인인 채로 존재하는구나.


집에 돌아와 오늘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어떤 행동 하나를 취할 때마다 악운이 달라붙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게 안풀리는 날이야 한국에서도 가끔씩 있긴 하지만, 타국에서 불행의 날을 겪으니 충격과 당황은 더 깊숙히 다가왔다. 그래도 부주의의 댓가가 6유로 뿐이라 다행이다.고 합리화했다.


사실 훔쳐가는 놈이 잘못햇지, 쌀을 자전거 뒤에 실어 놓고 장보러 간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여자가 밤늦게 술마시고 다니면 안된다.'논쟁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 즉 이 문제의 가장 이상적인 해결은 '아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다. 이런 상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정말 바라고, 만들고 싶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서 '방심하지 말자'란 말이 울려 퍼지고 있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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