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29

즉흥적으로

by 래리

태양이 너무 뜨거워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겼다면,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 나는 수업을 안 가기로 결정했다.기 보다는 결정당했다. 언제나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현답을 제시하는 건 동전. 앞면이 나오면 학교에 가기로, 뒷면이 나오면 자전거가 향하는 대로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동전을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5센트의 뒷면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망설임없이 학교 반대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핑계에 불과하지만, 수업을 빠진 이유는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긴 이유보다는 합당하리라. 지금껏 본 네덜란드 날씨 중 가장 좋은 날씨였다. 평소 햇살이 맑아도 매서운 바람이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각인시켰지만 오늘은 달랐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을 뿐더러 솔솔 부는 노곤한 바람은 나를 절로 미소짓게 했다.


두 달 남짓의 유럽 생활 동안, 나의 도시 틸버그는 제쳐두고 항상 밖으로 나가기 바빳기에 오늘은 이 도시에서 지금껏 가보지 않은 곳들을 둘러보리라 마음먹었다. 목적지도 정하 않고 그저 발 가는 대로 페달을 밟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다웠다. 역시 내 마음속 1순위 유럽도시 틸버그답다. 도시가 주는 정겨움의 이유 중 이런 풍경도 한 몫 했으리라.


신나게 자전거를 타던 중, 그래도 교수님께 얼굴은 비추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다들 찬성. 처음보는 공원에서 잠깐 쉬다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공원은 정말 작았는데 규모에 비해 너무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더 신기한건 이 작은 공간에서 들리는 새소리. 정체모를 지저귐부터 딱따구리의 집짓는 소리까지 다양했다. 마치 숲 한 복판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공원엔 작은 놀이터도 있었는데,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 기구들을 즐겼다. 아니 어릴 적보다 더 재밌게 놀았다. 신나게 미친짓을 하던 중 웬 중년의 남성이 담배, 맥주 그리고 고양이와 함께 등장했다. 이 좋은 날씨, 한적한 공원에 맥주와 담배라니. 거기다 고양이까지. 낭만의 극치였다. 게다가 그의 옷은 페인트로 얼룩덜룩 했는데 누구라도 그가 예술가일 것이라 짐작했으리라.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 같이 놀아보려고 했는데, 자꾸 도망간다. 담배피던 주인이 겁 많은 녀석이라 그렇다고 일러줌으로써 대화가 시작됐다. 우리는 교환학생이라고, 그는 40년간 DJ를 해왔다고 서로를 소개했다. 그는 재즈 음악을 일렉트로닉에 접목시킨 진보적인 음악을 해왔다더라. 어떤 음악인지 감은 잘 안왔지만, FMA에서 접한 실험적인, 진보적인 음악들은 지금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결론을 냈던 게 떠올랐다.


이어 학우도 재즈 피아노를 십수년 간 쳐왔다.고 알려줬다. 중년의 네덜란드 남성은 자기 집에 괜찮은 피아노가 있다고 말했고, 원한다면 와서 쳐도 좋다고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즉흥적으로 우리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크진 않지만, 아늑했고 개성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벽 한쪽면은 책장. 수백권의 책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 다른 벽면은 LP와 CD앨범으로 가득했다. 멋졌다. 최고의 인테리어 소품들이다.


그런데 궁금했다. 너무 진보적인 음악으로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힘들었을테고, 도시의 작은 바(Bar)나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생을 보내온 것 같은데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 자식은 어떻게 키워냈을지가. 아직 기초연금을 받기엔 일러보이는 데 말이다. 네덜란드의 사회 보장 제도에 대해 공부해야겠다. 그리고 이 집은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30년간 갚아와 최근에야 온전한 자기 집이 됐단다.


사실 그가 우리를 초대한 이유는 책장에 있었다. 전 세계 문화에 관련된 책들이 대다수다. 타문화에 관심이 많다는데, 특히나 중동쪽이 가장 흥미롭다더라. 우리는 이방인이었기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북한에 관한 책도 있길래, 간단히 북한과 우리나라에 대해 설명해줬다. TV가 삼성이길래, 삼성에 대한 설명도 조금 곁들여서.


오늘 밤에 동네 펍에서 연주가 있다길래, 우리를 상대로 리허설 해달라고 했다. 피아노는 프로페셔널하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다. 그리고 학우의 재즈 연주와 함께 스캣을 보여줬는데 흥이 장난이 아니다. 수십년 간 음악을 해와서인지 깊은 내공이 느껴졌다.


음악이 무르익을 무렵 그의 여자친구가 도착했다. 정확히 여자친구라고 소개했다. 사실 오늘 공연은 딸의 남자친구를 위한 공연이란다. 딸의 남친이 스패니쉬라 특별히 스페인 노래로. 아마 그의 여자친구는 이혼 후에 만난 사람인가보다. 이혼, 재혼이 중요한가. 둘이 대화하는 모습은 그 어떤 커플보다도 사랑스러웠는데 말이다.


그의 여자친구 역시 DJ를 해왔고, 영화에도 관심이 많더라. 특히나 김기덕 영화를 좋아한단다. 놀라웠다. 그의 스타일은 유니크하다는 설명과 함께, <빈 집>에 대해서 얘기했다. 더 놀라운건 그녀가 한국인 친구가 있어 김치도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초대해준 고마움에 우리도 그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다들 시간이 널널한 4월 중에. 그런데 이 남성 더치 예술가가 베지테리언이란다. 계란까지는 먹는. 요리 폭이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고기없는 잡채가 떠올랐다. 유럽인들이 좋아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었기에.


즉흥적으로 수업을 빠지고, 즉흥적으로 처음 본 사람에게 초대를 받다니. 그리고 즉흥적으로 맞춘 연주를 듣고, 즉흥적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 하루는 영원히 추억하게 될 인생의 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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