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점검
오늘의 Music 수업을 끝으로 첫 Period가 종료됐다. 뭐 수업을 얼마나 열심히 들었길래 이런 자축을 하냐마는 어찌됐든 네덜란드에서 맞이하는 나의 첫 종강이다. '첫 경험'이라는 건 그 자체로 의미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번 종강은 나의 총 네덜란드 생활 중 딱 절반 만큼을 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벌써 절반이나 지났구나. 교환학생 유경험자들이 1학기만 다녀오는 걸 왜 터무니없이 짧다고 하는지, 슬슬 이해가 간다.
'첫 경험'이 나온김에 처음에 대해 더 얘기해보겠다. 나는 이번 교환학생 경험이 인생 첫 해외여행이기도 하다. 5살 때 사이판을 다녀오긴 했지만, 기억도 희미할 뿐더러 단순 휴양지이기에. 딱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 전역 직후엔 일본을 가려했었는데, 하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나서 계획을 접었다. 뭐 정말 가고싶으면야 갈수는 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리하여 나의 첫 해외여행은 유럽 땅으로. 그것도 6개월이란 시간 동안이나 떠나게 된 것이다. 걱정이 없던 건 아니다. 부족한 영어실력에, 때로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공간에서 나 혼자 6개월 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거기다 분명 겪게 될 인종차별까지. 유럽 교환학생이란 긍정적인 요소만을 내포하진 않았지만, 어두운 면보단 밝은 면이 훨씬 더 많은, 가치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인생을 살면서 6개월 간 유럽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을 대학생 때가 아니면 언제 누려보겠는가. 그것도 펑펑 놀면서. 그리고 취업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취업을 한다면, 대한민국에서는 여행 기회를 상당부분 박탈 당할 텐데.란 상념들에 젖어 교환학생을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중간점검을 하는 지금 이 순간, 후회는 전혀 없다. 새로움을 느끼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분명 현재 나의 행복의 4할은 '내가 있는 이 곳이 경쟁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돈 쓰러 와서.', '놀 준비가 돼 있어서', '부담스러운 과업이 없어서'등 심리적 요인이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도 교환학생을 온 마인드로 한 달만 보내면 그 동안은 인생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그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이런 마음을 먹는게 가능할지가 의문이지만.
하지만 심리적 요인은 4할에 불과하다. 내 행복의 6할은 바로 이 곳 생활 자체에 있다. 너무도 싸지만 싱싱하고 맛 좋은 식료품, 친절한 사람들, 일상에서 느껴지는 정부에 대한 신뢰까지. 이 곳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생각이, 태도가, 행동이 바람직한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게다가 며칠 전 만난 진보적인 DJ '루드'를 보며, 바람직한 삶과 직업에 대해서도 고민해 봤다. 그는 상업적 성공을 이루지 않고도 떳떳한 아티스트로서 40년 간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왔다. 자식도 성인이 됐고, 심지어 최근엔 완전한 본인의 집까지 생겼다. 한국에서 변두리의 음악가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상상해보자.
한국에서 많은 '변두리 뮤지션'들은 일단 경제적으로 매장당한다. 홍대뒷골목만 가도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뮤지션들이 많다. 음악으로 버는 돈이 너무 적기 때문에. 그나마 '홍대'는 접근성이 높은 공간이다. 서울이라는 초중앙집중적 도시를 벗어난, 지방 끝자락에서 음악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20대 중후반 이상의 친한 친구중에 이런 길을 걷는 이가 있다면, 대부분 이와 같은 말을 건넬 것이다. "이제 그만하고, '평범한'직장 알아보는 건 어때?"
하지만 이들의 고통은 경제적인데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사회적인 멸시가 이어진다. 나이, 학력, 직업, 소득 등 계급화할 수 있는 모든 요소로 줄세우기를 내면화한 한국 사회에서 '변두리 뮤지션'은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과연 그들의 삶을 '인정'해주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 그들이 어떤 일을 하든, 자식을 양육하고, 생계를 유지할 경제력 능력이 있다면, 부모도 친구도 그들을 나무라지 않을테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다.
EDM강국 네덜란드에서는 짧은 기간있었지만 '자칭'아티스트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본업이 따로 있고 취미로 음악을 하는지, 본업이 음악이고 부업으로 돈벌이되는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꿈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 듯하다.
대한민국 부모, 청소년들이 원하는 직업의 순위를 보면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근엔 공무원과 선생님이 최상위권이다. 왜 그럴까. 나라에 헌신하고, 참된 교육자가 되고 싶어서? 아니다.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안정적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뭘까. 다른 모든 의미를 무시하고 직업을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노동의 의미는 단순히 먹고 살기위함만이 아니다. 사회 일원으로서의 역할, 자아실현 등 다양한 의미를 담은, 삶 자체가 노동이다. 그런데 왜 수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노동과 직업의 한 가지 기능만을 볼까. 아니 왜 그렇게 바라볼 수 밖에 없을까. 답은 간단하다. 자기가 버는 돈, 모아둔 돈, 물려받은 돈이 없으면 굶어 죽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답이 정치를 통해 복잡한 과정을 거쳐나가야 사회가 진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절반의 여행이 더 남았지만, 벌써 평생 잊지못할 추억들을 꽤 많이 경험했다. 남은 유럽 생활도 지금 만큼 설레는 일들의 연속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