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32

암스테르담

by 래리

암스테르담 센트럴 역 밖으로 나가니, 지금껏 다녀왔던 네덜란드 도시와는 다르게 “나 관광객이야” 를 티 내고 다니는 사람들로 붐볐다. 꽤 북적북적하다. 페이퍼 데이 이후 하루도 쉬지 않아 약간 피곤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새 도시를 여행한다는 긴장은 하나도 없었다. 고작 두 달의 네덜란드 생활로 생긴 익숙함 때문인지, 비행기를 안타서 그런지는 몰라도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공주에서 서울올라가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방에서 피어 오르는 대마 냄새에 긴장이 풀려버린 걸지도.


사진의 건물들은 편집샵이 아니다. 그저 운하 다리에서 바라본 암스테르담 풍경.


일단 오늘의 첫 목적지는 네덜란드 유대인 박물관. 구글맵으로 위치를 찍고 걸어가는데 네덜란드 최대 도시답게 길마다 편집샵들이 보였다. 물론 지나치지 않고 하나씩 다 들렀다. 예쁜 신발이 많았지만 딱히 끌리는 건 없었다.


KILO SHOP도 발견했는데, 말 그대로 옷의 무게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곳이다. 구제샵 정도로 부르면 될 듯하다. 케케묵은 냄새가 좀 나지만 맘에 드는 옷이 꽤 있었다. 사이즈가 너무 커 포기한 겨울 자켓부터 살지 말지 정말 정말 고민한 끝에 구매를 포기한 봄 자켓까지. 그런데 갑자기 몸이 가렵다. 설마 옷에 있던 벼룩이 들어왔나.


암스테르담 거리가 재밌는 건 옷가게 사이사이로 자리 잡고 있는 섹스 스토어. 한국에서는 주로 눈에 띄지 않을 법한 곳에 성인 용품점이 있지만, 네덜란드는 다르다. 대낮부터 치명적인 옷들과 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자위기구는 물론 다양한 의상과 포르노까지. 그 곳에 들어가 콘돔만 사고 나온다면 대형마트에서 껌 하나 사가는 느낌이려나.


거리 사이마다 배들이 지나다닌다. 암스테르담은 베네치아처럼 물의 도시다. 운하가 있고, 물과 집의 문이 맞닿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물의 도시답게 지반이 약해 건물들을 일부러 붙여서 지었다고 한다. 정말 골목길이 난 곳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건물들이 하나로 이어져있다.


목적지는 유대인 박물관인데, 가는 길에 램브란트 하우스를 발견. 네덜란드 뮤지엄 패스도 끊었겠다, 거침없이 입장했다. 이 곳은 램브란트가 20년 간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17세기 가구, 예술품등으로 장식한 박물관이다.


램브란트의 작품보다는 그의 동료들, 제자들이 그린 작품들이 있다. 빛을 잘 쓰기로 유명한 램브란트의 모작도 있다. 층마다, 방마다 테마도 다른데 램브란트의 art cabinet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오브제들을 수집하는 데 많은 돈을 썼다는데 거북이 등딱지부터 일본도, 중세시대 갑옷까지 정말 다양한 물건들이 있다. 비파형 동검처럼 생긴 물건도 있어 사진은 찍었는데, 정말 비파형 동검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공간은 그의 누드 작업들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르네상스부터 출발한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완전한 시도들. 현실은 불완전한 육체구조를 가졌더라도, 이상적인 비율과 자세를 그린 집단들이 있었다. 이에 반해 램브란트는 ‘true-to-life’,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여성 누드엔 축 쳐진 뱃살이나 가슴이 적나라하게 표현 돼있다. 그가 그린 ‘다이애나’는 아마 내가 본 모든 다이애나 예술품 중 가장 못 생겼을 것이다. 램브란트를 비하하는 발언은 아니다. 그가 집중한 건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었으니.


드디어. 티켓을 끊고 처음 들어선 공간은 유대교 의식에 관한 설명들 뿐 이어서 그런지, 지루함이 나를 압도했다. 한 층을 올라가니 네덜란드 유대인의 역사. 이제부터 좀 흥미롭다.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유대인들(Sephardi)들이 15세기 말 탄압을 받고 네덜란드로 이주해 온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들은 네덜란드에서도 차별을 면치는 못했다. 길드에 가입할 수 없었으며, 암스테르담 사회의 상류층이 되어도 그 속에서 차별이 존재했다. 길드에 가입할 수 없어 국제 무역이라는 경제활동으로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가난했고, 사회적 약자였다.


그러던 와중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그의 동생을 네덜란드 왕으로 임명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도왔다. 당시부터 더치인들에게 붙인 surname은 유대인들이 정했고, 직업이나 고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종교에 대한 헌신 이외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국가를 향한 애국심은 없을 만하다.


19세기 들어 계속된 차별에 네덜란드의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이 모여 평등에 대한 논의를 했다. 이게 내가 알고 있던, 프랑스 혁명의 토대가 된 계몽주의란다. 프랑스 혁명 인권선언문에 유대인들까지 평등을 확장시키지는 않았지만, 1796년부터 계몽된 프랑스 의회가 유대 차별 폐지를 논했다.


충격적이었다. 계몽주의의 출발을 네덜란드에서의 논의만으로 환원하긴 좀 그렇지만, 유대인이 영향을 계몽주의에 꽤 영향을 끼쳤다니. 그러고보니 내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회사상가들, 맑스, 베버, 칼 폴라니 모두 유대인 출신이다. 심지어 몇몇은 세상을 흔들기도 했다. 스피노자도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대계에서 처음으로 추방당한 사람이란 것도. 유대인 사상가, 철학자들을 보니 어렸을 적 탈무드가 왜 그렇게 유행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유대인’하면 다들 나치에 의한 학살을 떠올릴 것이다. 이를 소재로한 예술작품도 많다. 하지만 유대인이 언제나 약자이며 피해자만은 아닌 듯하다. 현실을 보자.


오늘 하루 알차게 보냈다. 구제샵에서 옷도 샀고. 새로운 지식도 얻고, 볼거리도 많이 즐겼고.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음식. 도착하자 먹은 감자튀김이 너무 느끼해서인지 하루 종일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점심으로 싸온 나시고랭을 저녁으로 먹었을 정도. 내일부터는 맛있는 식사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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