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31

네덜란드스러운

by 래리

오늘은 재외국민 투표 마지막날. 학교에 페이퍼를 제출하고 얼른 헤이그로 향했다. 틸버그에서 기차로 한시간. 당일치기로 여행하기에도 괜찮을 거리다. 기차 안에서는 학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한국 정치, 청년 문제, 그러다 결론은 우리 미래. 둘 다 한국에 돌아가면 막 학기. 졸업을 앞둔 신분이기 때문이다. 재수 때 모든 이야기의 결론이 '수능'으로 모아졌던 것과 같은 상황.


우리는 아마 취업시장에 내던져질 게다. 그 무한경쟁 속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으려 안간힘을 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찔하다. 먼저 경쟁에 뛰어든 고등학교 동창은 "이 피말리는 전쟁에 뛰어들기 전에 충분한 체력을 비축해둬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 포커스를 취업에 맞춘다면, 내 교환학생 6개월은 참전을 위한 충전시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여기긴 싫지만.


대한민국 대사관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헤이그 센트럴 역 근처에서 트램을 타고 12분. 시내를 지나 풀길에 내려 3분 정도 걸으면 된다. 덴하그에는 각 국의 대사관들이 있다. 한국에는 모든 대사관들이 서울에만 있는 것 같은데.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이 아니라 헤이그에 몰려있는 듯하다. 아마도 초서울집중적인 대한민국 도시계획 보다는 지방분권이 잘 이루어진 탓인듯 하다.


대사관의 입구를 찾던 중 초록색 철문이 자동으로 열려 놀랐다. 그렇지만 우리를 "안녕하세요"로 맞아주는 양복입은 중년의 목소리에 더 놀랐다. "안녕"은 타국의 교환학생 친구들에게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들이 한국어에 흥미있어해 몇 가지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잖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이 높임 표현을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음속에서 애국심이 끓어오르진 않았지만, "안녕하세요" 한 마디에 감정 변화를 겪을 줄이야!


대사관에 들어서니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다. 투표를 돕는 위원분들은 모두 네덜란드 교민이셨다. 위원장을 맡으신 분께서는 네덜란드에서 무려 30년 가까이 생활하셨다고 한다. 신군부 시절, 87년 민주화 이후부터의 외국생활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아득하게 느껴졌다.


투표 후에는 교민분들과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이번 투표가 네덜란드 교민 사이에서는 참여율이 엄청 높은 편이라더라. 특히 교환학생을 온 청년들이 많이 다녀갔다고..9일 뒤 한국의 선거에서도 많은 청년들이 투표하길 바란다. 삶과 정치는 뗄레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투표도 했으니 오늘 헤이그를 방문한 목적은 달성했으나, 어느덧 오후 4시. 그냥 집에 돌아가긴 아쉽고, 그렇다고 맘먹고 관광을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내일부터는 암스테르담 여행을 해야하니 무리할수는 없는 노릇. 그냥 트램을 타고 왔던 길을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센트럼에 돌아가는 길엔 짙은 먹구름에도 불구하고 고운 빛깔의 꽃들이 피어있었다. 그래도 아직 나에게 네덜란드하면 꽃보다 날씨가 먼저 떠오른다. 하늘은 그 변화무쌍한 날씨를 담고 있는 한 폭의 수채화다. 옅게 푸르면서도 노을빛으로 피어오르는 하늘 사이를 막고 있는 회색빛 먹구름. 그러면서도 먹구름은 하얀 속살을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말 네덜란드스러운 하늘!


노을이 밤하늘에 잠식될 때면 구름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띄기까지 한다. 이 모든 광경을 한 순간에 바라볼 수 있다니. 덴하그의 거리와 너무 대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덴하그의 거리도 정말 네덜란드스러웠다. 거리에 사람이 그렇게 적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북적거림이 없다. 너무나 여유롭고 나긋한 분위기. 왜 하나도 시끌시끌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그냥 이 네덜란드스러운 분위기를 즐겼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밤문화는 대낮의 거리보단 날씨와 비슷하다.


시간은 어느덧 6시. 하지만 personal OV Chip카드로 기차비 40%를 할인받으려면 피크 시간(오전 6시 30 ~ 9시, 오후 4시 ~6시 반)을 피해야한다. 결국 6시 54분 기차를 타고 틸버그로. 돌아가는 길에는 널찍한 들판에 박힌 무지개를 봤다. 정말 큰 무지개가 반원의 형태로 놓여있었는데 저렇게 땅에서 땅으로 연결된 반원의 무지개를 본적이 있었나. 싶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지옥같았던 페이퍼 데이를 그냥 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는 길에 와인을 한 병 사서 친구들과 한 잔했다. 몸도 나른하고 내일부터 시작할 네덜란드 여행을 위해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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