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37

다시 파리로.

by 래리

두 번째 파리 여행. 사실 이번 파리행 티켓은 3월 초 첫 파리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끊었다. 막판에 안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파리는 너무 매력적인 도시이고 아직 못 가 본 곳들도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오전 9시 수업을 건너 뛰고 파리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수업을 째고 파리라니. 피시방도 아니고.


대낮에 Flix bus를 타는 건 처음이다. 매 번, 밤 12시쯤 출발하는 버스를 타 그저 비몽사몽으로 시간을 죽이며 목적지로 운반됐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뭐가 다를까. 일단 Antwerp 기차역의 풍경이 다르다. 새벽 시간 돌아다니는 이라고는 돈 있냐고 묻는 양아치들 뿐이었지만, 점심 시간의 기차 역 앞은 수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햇빛이 맑아 활기까지 띤 이 곳이 정말 내가 알던 Antwerp이라니. 그러고보니 백 년도 더 전 고흐가 Antwerp으로 이동할 때 그 곳을 ‘도시’로 표현한 기억이 난다.


지금껏 알아왔던 Antwerp 기차역 이미자와 너무 달라 정신이 흐릿할 뻔했지만, 그 날의 기억은 또렷하다. 파리에서 아인트호벤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를 포함 버스 기다리는 이가 총 4명. 국적은 모두 달랐다. 이른 새벽에 달달 떨며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체 모를 흑인 양아치가 우리 한 명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2유로만 빌려줄 수 있냐고. 당연히 현금은 없다고 하고 넘어갔다. 그 때 폴란드 여성이 양아치에게 물었다. 너 신발이 너무 좋아 보인다고. 그렇게 좋은 신발 신고 왜 이 새벽에 돈을 꾸러 다니냐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양아치가 말했다. “훔친 거야.”


그렇게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마지막, 독일로 인턴을 하러 간다는 청년에게 양아치가 같은 질문을 했다. 청년은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양아치에게 돈을 빌리는 이유를 물었다. 양아치는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했다. 청년은 “네가 정말 음식을 사기 위해 돈을 빌리는 거라면 난 기꺼이 빌려줄 수 있다. 단,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말했다.


일단 지금 시간에 문을 연 마트가 있냐고 물으니 양아치가 있단다. 청년은 양아치를 따라갔다. 자신의 짐을 내게 맡기고. 스케줄 상으론 5분 뒤에 버스가 오는데 청년의 짐들이 내 손에 있다. 이거 어쩌나. 청년은 분명 무모한 면이 있었다. 정류장에 남겨진 셋은 버스 출발 시간까지 청년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게다가 그의 캐리어는 3개나 되었다. 버스 시간은 지났지만 다행히 버스가 오지 않았고, 몇 분 뒤 청년이 돌아왔다.


사실 양아치가 청년을 음침한 곳으로 데리고 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집단 린치를 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다행히 청년은 멀쩡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양아치가 계속 음식이 아닌 라이터에 손길이 갔다더라. 청년은 음식이 아니면 절대 돈을 주지 않겠다는 본인의 의사를 재차 밝혔고, 양아치는 마트를 나와 어디론가로 사라졌다고 했다. 어떻게보면 대단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버스 출발 예정 시간 5분을 남겨놓고 이런 행동을 하는 그의 담력이. 무엇을 위해 그가 이런 행동을 했는지, 어쩌면 단순한 골려 주기 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저 서로 잘 가라는 인사만 남기고 헤어졌다.



그 날과 다르게 오늘은 버스가 제 시간에 왔다. 새벽에 막히는 차가 없어 버스가 제시간에 더 잘 올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버스에 탑승해 고속도로 풍경을 본다. 풍성한 구름에 넓게 깔린 들판. 여기가 네덜란드인지 프랑스인지 구분이 안된다.


Antwerp에는 제 시간에 온 버스가 파리에는 한 시간도 더 늦게 도착했다. 아마 차가 밀려서 그런 걸 게다. 그럼 새벽엔 대체 왜 수 십분 씩 늦는 걸까. 일단 궁금증은 뒤로 하고 버스 시간을 너무 믿진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버스 하차 후 바로 에어비엔비 숙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Pigalle역 근처로 몽마르트 언덕과 상당히 가깝다. 지하철 역 밖으로 나와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웬 술집에서 매끈한 붉은 빛이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성의 망사스타킹을 비추고 있다. 조명보다 더 매혹적인 립스틱을 바른 그녀가 있는 곳이 평범한 술집은 아닌 듯 했다. 몇 발자국 더 내달으니 홍등가풍의 조명에 카운터가 비어있는, 혹은 밖에선 보이지 않는 마사지 업소가 보인다. 이 곳도 단순히 몸의 피로만 풀어 주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수 많은 Bar 간 판이 눈에 채인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짧은 경험적 사실들이 나를 의심하게 만든다.


골목으로 조금 더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으니 쉽게 나의 숙소를 발견했다. 두 번의 현관문을 거쳐 도달한 곳은 좁은 계단 앞. 무려 6층까지 올라가야 한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건물은 상당히 오래된 느낌. 지하는 미지의 세계처럼 남아있고 계단을 오르는 중에도 조금씩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듯하다.


드디어 긴 여정 끝에 방에 입성. 지난 파리 여행 때 묵었던 에어비엔비보다는 낫다. 공간도 더 넓고, 전자레인지도 있다. 가스레인지는 저번처럼 불이 아닌 팬에 달궈지는 방식이지만 화력은 센 듯하다. 지난 번 에어비엔비 팬은 불의 세기를 최고로 해도 냄비 물에 기포만 조금 생기게 하는 수준이었다. 수직에 가까운 사다리를 올라가면 더블 침대가 있는데 천장과 가까워 머리를 조심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창문 밑 구석에 쳐 박힌 TV가 눈에 들어온다. 겉은 번지르르한데 너무도 구석에 위치한 TV를 보니, 한 번도 켜 본적이 없는 내 방 TV가 떠올랐다. 둘은 아마 비슷한 처지일 게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뜯지도 않은 오렌지주스가 놓여있다. 아마 주스를 마시고 상쾌한 여행을 하라는 주인의 배려이지 싶다. 화장실이 복도에 있다는 점과 엘리베이터 없이 6층에 위치한 사실만 빼면 만족스러운 방이다.


무엇보다 현란하게 반짝거리는 에펠탑이 아주 잘 보인다. 밤에는 에펠탑이 정각마다 반짝거린다. 이번 여행도 에펠탑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추억으로 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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