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셰와 지베르니.
두 번째 방문한 파리. 첫 여행지는 나의 핸드폰이 박살났었던 오르셰다. 핸드폰이 박살난 시점은 상징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던 중이었기에 이미 봤던 밀레 작품들을 빠르게 훑었다. 오리엔탈리즘 작품들을 보던 중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이 있었다. 바로 tournemine의 코끼리그림. 노을 빛으로 물든 하늘이 따뜻하고 정적인 이미지를 줌과 동시에 어디론가 향하는 새 떼, 하늘로 솟아있는 코끼리들의 코는 역동성을 부여한다. 하루를 여는 아침도, 햇빛이 사물이 색감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한 낮도 아니지만, 작품에서 활기참을 느꼈다.
사실 작품이 나의 시선을 사로 잡은 이유는 코끼리 떼. 코끼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재수 때 깨달았다. 그림에 소질은 없지만, 공책에 코끼리를 그렸었다. 가장 잘 표현하고 싶었던 건 코끼리의 상징인 코도, 두꺼운 다리도, 건조하게 갈라진 피부도, 펄럭이는 귀도 아닌 바로 눈. 왜 하필 눈이었냐하면, 코끼리의 눈에서 일종의 거룩함을 느꼈다. 특히나 세월이 새긴 주름 사이로 푹 패인 늙은 코끼리의 눈에서는 숙연함마저 전해졌다. 친했던 누나에게 코끼리 '따위'에 '거룩함'이라는 수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잔소리를 듣기도 했지만.(누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역시나 성경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빠르게 건너 뛰고 윗층으로 이동. 나비파, 후기인상주의, 자연주의 등 화법별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다. 점묘법이 이전의 인상파 표현기법보다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않았지만 Luce의 '파리 코뮌 당시 5월' 작품은 인상깊었다. 코뮌 진압 후의 상황을 표현한 듯하다. 시냑, 쇠라 등의 작품을 보면 환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들을 무서워할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다른 작품들의 붓터치 하나하나와 달리, 점묘법의 점들에게서는 독립성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일단 점들이 각각 독립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독립성을 희생해 작품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기괴한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보면 점들의 그 고유함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작품을 형성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비뚤어진 이데올로기의 발현이지 싶다.
다행히 이번에는 어떤 사고도 없이 오르셰 관람을 마쳤다. 오늘은 지난번에 봤던 작품들과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들을 대충 훑었지만, 제대로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천천히 오르셰를 관람한다면 최소한 5~6시간은 걸릴 것 같다. 피곤한 관계로 4월16일의 여행은 오르셰로 만족하고 과 선배가 강추한 국수집으로 갔다.
쌀국수집이라고 들었는데 중국식 국수를 파는 곳이었다. 6시 45분 쯤 가게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엔 오후 7시부터 영업을 시작함에도 이미 세 팀이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국물이 있는 국수와 없는 국수를 하나씩 시켰다. 국물이 있는 국수는 설렁탕 국물에 고수와 면을 넣은 익숙한 맛. 국물이 없는 국수는 정체모를 검은 소스에 비벼먹는데 너무 매웠다. 맵기를 3으로 주문했는데 이렇게 매울줄이야. 물론 매운 음식을 잘 못먹는 탓도 있지만, 이 매움은 입술과 혀가 아프고 속이 쓰리기 보다는, 입 속이 '화'해지는 느낌이었다. 면발에 리스테린을 묻혀 먹는 듯한. 결국 비빔 국수는 다 먹지도 못했다. 식당에서 제일 맛있었던 건 피가 두꺼운 만두.
옆 테이블들을 보니 정말 맛있게 잘 먹는다. 다들 그릇도 깨끗이 비운다. 그냥 나와 맞지 않는 곳이었나보다. 계산을 하러 밑 층으로 내려갔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더 길어졌다. 그들의 단골 손님인지 우리처럼 첫 방문객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처럼 남기지 말고 맛있게 드시길 빌었다.
다음 날 목적지는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이 있는 그 곳이다. 사실 모네를 좋아한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오랑쥬리를 갔을 때의 충격은 너무도 강렬했기에 지베르니를 갈 수 밖에 없었다. 생 라자르 역에서 버논까지 왕복 기차 요금은 무려 30유로쯤 한다. 거기에 지베르니까지 왕복셔틀버스 8유로!
모네의 정원에 도착하니 가지런히 정리된 꽃들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큐겐호프를 갔다온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비교적 무덤덤하게 꽃길을 걸었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모네의 작품에 출연한 연못이 나온다. 일본식으로 꾸며진 연못의 물은 보통의 고인물마냥 똥물에, 나무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고 연잎은 적갈색으로 바랬다. 내 이미지 속의 연못과 실제는 달랐지만, 연못과 대조적인 주위의 꽃들과 물에 비친 하늘이 너무도 푸르렀기에 그나마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정원은 잘못한 게 없다. 내가 시기를 잘못맞춰 지베르니에 간 것뿐. 아마 연꽃이 활짝 핀 시기에 왔다면 훨씬 더 감동이 진했으리라. 그래도 버드나뭇잎이 흐드러진 연못의 정경은 지베르니 방문을 만족스럽게 했다. 숨어있던 햇빛이 모습을 드러내니 연못에 더욱 더 생기가 돈다.
기념품샵에서 엽서 몇개를 산 뒤 버논역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사실 모네의 그림이 그려진 우산을 살까말까 고민했었는데, 지금이라도 우산을 사라는 신의 계시인가 싶어 눈 앞에 보이는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그런데 우산의 그림이 썩 맘에 들지 않는다. 가격도 20유로 이상. 과감히 포기하고 다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생 라자르역으로 돌아오니 하늘이 맑다. 역시 우산을 안 사길 잘했다. 전엔 몰랐는데 역 중앙에 a vous de jouer라 적힌 피아노가 놓여있다. '당신의 차례' 정도로 번역되는 문구. 아마도 SNCF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피아노를 치도록 놔둔 듯하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연주하는 영상을 찍어올려 시상식도 하는 모양이다. 역시 낭만의 도시 파리답다. 공식적으로 놓여진 피아노 말고도 지하철 역 거의 모든 장소에서 음악소리가 들릴 정도로.